차례
[편집자주] 참사의 정의는 간단하다. ‘비참하고 끔찍한 일’을 참사라 부른다. 지난달 29일 밤, 이태원 해밀턴호텔 옆 골목에서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 158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 현장이 증언으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기억으로 남았다. 비참하고 끔찍했다.
최근 발생하는 참사들엔 ‘사회적 참사’라는 말이 덧붙는다. 참사의 발생 배경을 살펴보면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참사라 했을 땐 재난의 원인을 개인의 잘못이나 불운에 두지 않고 사회 시스템을 점검한다.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에서 희생자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에 집중됐다. 이태원 참사 이전 한국에 사회적 참사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준 4.16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자들은 대부분 고등학생이거나 아르바이트 노동자,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 노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조명되지 않았지만 이전에도 대형 참사의 희생자는 대부분 일반 서민이거나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어느 한 집단에서 사망이 반복되는 것 역시 사회적 참사로 부르기로 했다. 중대재해로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 조용히 계속해서 살해되고 있는 여성들, 살 권리를 박탈당한 발달 장애인, 주거 취약 계층 등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죽고 있기 때문이다. 불평등을 가리키는 사회적 참사가, 2022년 마지막 우리의 이슈다.
2008년 경기도 이천 물류센터에서 40명 노동자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다시 2020년 경기도 이천 ‘한 익스프레스’ 물류센터에서 유사한 사고로 38명의 노동자가 죽임을 당했다. 사고 원인은 복사판이다. 우리는 중대 재해로 수많은 노동자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노동자의 한명 한명의 영혼의 무게감은 단순한 숫자로 표현된다. 그리고 “하루 몇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수십 년째 되풀이하고 있다. 사고의 원인 역시 추락, 끼임, 협착, 맞음, 화재 폭발이 반복된다. 전혀 달라지지 않은 사고들이 노동자를 죽이고 있다. 이 정도면 과거의 악몽이 아닌 현재의 악몽이 되풀이된다고 봐야 한다.
노동자는 생을 마감하도록 강요당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동자도 있다. 발전소 폐쇄 소식에 고용불안에 이직을 준비하던 발전소 노동자가 이직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석탄 화력 발전소 폐쇄에 직접적 이해 당사자인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노력은 없었다. 고용 대책은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는 개인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스스로 생을 마감하도록 강요당했다. 어떤 비정규직 노동자는 근골격계 질환으로 근로복지공단에 요양을 신청했지만, 결정 과정이 너무 길어져 치료를 포기하고 현장으로 들어갔다. 회사는 노동자에게 회사를 그만두라고 할 뿐이었다. 노동자는 재해를 당한 후 회사 눈치를 보면서 산재를 신청해야 할지 고민하고, 요양을 신청하고 난 후엔 결정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계 문제로 회사 복귀를 결심하고, 복귀 후 변화되지 않은 작업 환경에서 동일한 업무를 하면서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노동자는 절망을 느꼈다. 노동자는 살아남기 위해서 산재를 신청하고, 치료하고, 회사 복귀를 결정했으나 이 긴 과정에서 그는 철저히 고립됐다. 책임 있는 자들이 책임을 외면하는 사이에 노동자는 재해의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했고 회사의 매몰찬 태도에 절망했다. 이 노동자 역시 생을 마감하도록 강요당했다. 그렇게 노동자는 희망을 잃고, 죽임을 당했다.
노동자는 왜 죽임을 당하는가
현대 사회는 위험 사회다. 그래서 개인적인 노력으로 위험을 감소시킬 수 없다. 사고 원인이 반복적인 이유는 사업주들이 그 원인을 알고 있음에도 위험을 제거하거나 감소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데 있다. 예를 들면 두산중공업에서 노동자가 추락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사고 직후 두산 중공업은 추락 방지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고용노동부가 작업 중지 결정을 내리니 불가능하다고 항변하던 추락 방지 시설을 설치했다. 예방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목숨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치권이나 정부 역시 지도 감독을 강화하기보다는 자율안전과 경제 논리를 들며 규제 완화를 외칠 뿐이다. 누군가에겐 샌드위치 패널의 효율성과 편리성이 사고의 위험을 높여 노동자를 위협한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 그간 사업주와 정치권은 노동자의 생명보다는 효율성과 편리성을 택했고, 공사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사업주와 정치권 그리고 사법부는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해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필요악’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 노동자의 죽음보다 사업주가 받는 처벌이 더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왜 중대재해처벌법인가?
중대 재해로 희생당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하라고 요구하며 기업살인법 제정을 요구한 지 약 20여 년이 지나는 동안 4만 5천여 명 이상 노동자가 중대 재해로 희생당했다. 노동자의 생명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사업주의 행위와 이를 방관하다시피 업무를 처리한 정부의 태도에 노동계와 중대 재해로 소중한 이를 잃은 유족들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며 투쟁한 결과 ‘중대재해처벌등에관한법률(이하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사업주의 논리에 충실한 이들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 및 시행되자 처벌 강화가 능사가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은 노동자를 위험으로부터 제대로 보호할 체계와 인력 그리고 비용, 노동자의 위험한 작업에 대한 작업 거부권 확대, 노동자의 안전보건 참여권 확대 등 노동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기업을 상식적으로 운영한다고 해서 노동자가 다치거나 죽어야 할 이유는 없다.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하기 위한 사업주와 정부의 노력
중대재해처벌법은 위험을 관리하도록 한다. 중대 재해는 단순한 물리적 위험이 아니라 위험을 유발하는 고용구조 및 조직체계 등 다양한 위험 요소를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한 노력으로 예방할 수 있다. 그래서 중대재해는 개인의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사업장 내의 안전보건 관리체계의 실패 즉, 위험 관리의 실패로 인해 발생한다. 그리고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 관리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해, 책임있는 자가 의무를 다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적인 법률에 대해서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겉으로는 처벌보다 예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사실상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인해 사업주가 처벌받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전에 예방 노력을 해야 했지만, 처벌에 대한 가능성이 매우 낮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은 중대 재해를 막기 위한 제대로 된 노력은 하지 않았다. 중대재해처벌법 1호 기소 사업장인 두성산업은 중대재해처벌법 위헌법률심판 신청을 해 놓고 있으며, 사업부는 1호 기소 사업장에 대해서 구속 영장을 기각한 바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무혐의 1호 사업장인 대흥알앤티에 대해서 검찰은 “법률이 정한 절차와 내용대로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 의무’를 준수한 사실이 확인된 경영책임자에 대해서는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의 점에 대해 불기소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형사법집행이 이루어지도록” 하라고 해 사실상 형식만 갖추면 처벌하지 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완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노동자를 제외하고 사업주와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에 앞장서고 있다.
중대 재해를 막기 위해 나선 노동자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보다는 사업주의 이윤이 우선인 대한민국의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면 중대 재해는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중대 재해를 유발한 사업주에 대해서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한 중대 재해를 막을 수는 없다. 매일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참사에 희생되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가장 많은 이윤을 가져가는 자가 중대 재해에 책임을 지지 않는 현실을 바꿔 나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사업주와 정부 스스로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가 나서야 한다. 참담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투쟁이 지속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