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엮다-인권운동사랑방 30년 이야기·질문·시대를 엮다 중」
인권운동사랑방(이하 사랑방)이 설립 30년을 맞았다. 1993년 세워져 '진보적 인권운동론'이라는 이론적 바탕 위에서 활동해 온 사랑방. 사랑방 활동가들은 2013년 사랑방이 스무 살 되던 해 “다시, 변혁을 꿈꾸자! 체제를 거스르는 관계를 조직하자! 변혁을 도모할 수 있는 관계, 사람 속으로 우리를 더욱 밀어 넣자!”며 대중의 힘을 변혁적으로 조직하는 운동 전략을 선언했다. 쌍용차 분향소가 있는 대한문, 서울 한복판 거리에서였다.
그리고 지난 10년, 사랑방 활동가들은 부지런히 이야기를 엮고, 질문을 엮고, 시대를 엮었다. 10년 전 이야기했던 ‘대중의 힘을 변혁적으로 조직하자’는 전략은 사랑방 30년을 맞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지 궁금했다. 본인이 직접 만들어 온 역사보다도 훨씬 긴 사랑방의 시간들을 30주년을 준비하며 어떻게 맞이하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31일 열리는 인권운동사랑방 30년 후원의 밤 ‘기꺼이 엮인 우리’를 앞두고 분주한 사랑방 상임활동가들을 찾았다.
▲ 왼쪽부터 사랑방 상임활동가 민선, 몽, 가원. |
현재 사랑방에는 상임활동가 8명이 활동하고 있다.서른 살 사랑방과 13년을 함께 해 온 상임활동가 민선, 사랑방과 나이가 엇비슷해 하마터면 ‘사랑방둥이’라 불릴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린 상임활동가 어쓰, 그리고 다른 곳에서 오랜 기간 활동을 하다가 사랑방이라는 낯선 공간으로 옮겨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상임활동가 가원과 몽을 27일 영등포구 신길동 사랑방 사무실에서 만났다.
'30년’이라는 숫자의 무게감이 클 것 같다. 20주년 때는 사랑방의 역사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번 30주년은 어떻게 준비했나.
사랑방은 대중적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조직이다. 우리끼리 밖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조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운동을 연결하고 조직하는 데 매우 많은 에너지와 관심을 쓰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30주년에는 이런 사랑방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엮는다’는 키워드를 꺼내보았다.(몽)
20주년 때는 역사 하나하나를 돌아보는 걸 열심히 했다고 들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운동 전략이라고 불렀는데 ‘대중의 힘을 변혁적으로 조직하자’라는 방향을 세웠다. 30주년에는 특별하게 새로운 방향을 잡기보다는 20주년에 세운 방향으로 좀 더 가보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대신 우리의 활동을 꿸 수 있는 키워드로 ‘이야기를 엮고, 질문을 엮고, 시대를 엮는다’는 식으로 정리해 보았다.(어쓰)
20주년에 세운 방향을 더 잘 펼쳐보고 싶다고 했는데, 20주년에 세운 방향은 무엇이었나.
▲ 사랑방 상임활동가 민선 |
20주년에는 ‘대중의 힘을 변혁적으로 조직하는 인권운동’을 운동전략으로 세웠다. 20주년 전에 사랑방을 대표하는 말은 '진보적 인권 운동'이었던 것 같다. ‘진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는 시기이기도 했고, 인권을 고민하는 단위도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한편에서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았고, 대중운동도 쇠퇴 시기와도 맞물렸다. 그때 대중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에만 머무르지 말고 대중의 힘을 조직하는 인권 운동을 우리가 다시 한번 해보자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 사랑방이 중요하게 하고 있는 기후정의, 차별금지법 제정, 길 내는 모임 등의 활동이 그 연장선에 있다.(민선)
사랑방은 감옥인권이라든지 자유권 중심의 인권 운동을 하다가 2천 년 대 초반 ‘인간답게 살 권리’라는 책을 내면서 사회권 의제를 한국에 등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나 의제 자체를 한국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사랑방이 해 왔다면, 2013년 20주년 때는 그렇게 등장한 권리들이 이미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시점이었던 것 같다. 주거권, 노동권, 사회권 이런 것들이 사회 제도화되면서 자리를 잡아간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개별 권리를 더 많이 등장시키고, 이 권리 하나하나를 더 두텁게 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오히려 이런 운동 각각의 흐름이 어떻게 사회를 변혁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할지 고민하게 된 것이 20주년의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어쓰)
사랑방 활동가들은 2022년 한 해만 하더라도 △거통고 조선하청지회 노동자 51일 총파업 투쟁기록팀 △공권력감시대응팀 △노조법2·3조개정운동본부 △다른 세계로 길을 내는 활동가 모임 △다른 세상을 만드는 4·30봄바람 조직위원회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네트워크 △반월시화공단노동조합 월담 △변희수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보고서 분석TF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와 성평등 정책 강화를 위한 범시민사회전국행동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체제전환을 위한 기후정의동맹 △코로나19 인권대응네트워크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공동행동 △평등과 연대로! 인권운동더하기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등에 엮이고, 엮었다.
시대를 엮는다는 표현을 했다. 요즘에는 ‘변혁’이라는 말이 낯설고 어쩌면 잊힌 말인 것 같다. ‘변혁’이 질적으로 다른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 사랑방이 하는 활동은 변혁과 어떻게 연결돼 있나.
▲ 사랑방 상임활동가 몽 |
한국 사회에서 반차별 운동, 특히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은 약자나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특정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이라는 사회적 위상을 갖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은 그런 위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이다. 불평등이 심각한 사회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차별은 현상을 나타내는 것처럼 이야기된다. 그러나 노동 시장을 보기만 해도 성차별, 장애 차별, 인종 차별과 같은 차별의 구조 없이는 사실 이윤이라는 게, 자본이 작동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나.
차별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 체제를 굴러가게 하는 중요한 하나의 축이라는 걸 계속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반차별 운동이다.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함께 하면서 각각의 운동이 폭넓어 지고 두터워지는 과정이 있었다. 그리고 이 운동을 연결하는 것이 굉장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랑방이 더 애써서 해보려고 한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여러 사회적 위치에 놓인 운동이 서로 연결되고 엮일 때 이 체제의 모순이라고 하는 게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거기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모이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했고, 이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다.(몽)
저는 코로나19 대응을 한 동안 담당했고 올해 정리를 앞두고 있다. 2020년 초 급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모여서 3년 정도 활동을 했다. 긴급 대응을 위해 모였는데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확진자 개개인에 대한 동선 공개나 방역 당국이 감염의 책임을 개인에게 넘기는 흐름에 급박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이 활동에 결합하게 됐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을 땐 뭐라도 해보자고 모였다. 세월호참사 관련된 활동을 했었는데 안전을 해치는 문제로서 재난, 그리고 재난에서 피해자들이 겪게 되는 공격, 혐오 비난 등은 모든 재난·참사에서 비슷했던 것 같다. 코로나19는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난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 요인만으로 재난이 되지는 않는다. 배가 아무리 침몰하더라도 304명이나 죽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존에 존재하던 사회구조의 모순과 특정한 위험 요소가 만나서 재난이 된다는 점에서 저는 재난이 어쨌든 사회 구조의 바닥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건이 있을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거 뭔가 좀 잘못됐다’. ‘지금 이 사회가 이렇게 가면 안 된다’는 감각을 얻게 되는 것 같다.(어쓰)
사랑방에서 와서 변혁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여전히 나에게 딱 붙지는 않는다. 기후정의 운동을 하면서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전통적으로 환경단체의 의제였던 기후 문제가 사실은 성장 시스템의 문제이고, 근본적으로 바꿔내야 할 문제라는 인식,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같이 동맹을 이뤄서 바꿔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면서 큰 사회운동이 되어가고 있다. 의제별로 운동이 따로 있고, 기후 운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하는 자기 운동의 언어로 기후 정의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사회 변혁을 요구안을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 것 같다.(가원)
▲ 사랑방 상임활동가 가원
사랑방이 초석을 둔 감옥/시설 인권운동, 그에 엮인 사람들이 오늘도 탈시설 운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대책위 꾸릴 때마다 함께한 사랑방, 자본과 혐오의 결합을 포착한 것도 사랑방과 엮인 덕분입니다.
-권미란 전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
뉴타운 개발의 시대...주거권선언 만드는 과정에서의 연대와 활동은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
노동운동이 공장을 넘어 다른 운동과 만나고 서로 엮이는 가교였습니다.
-이김춘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사무장
세상이 망해가는 절망감, 개입할 여지가 적다는 패배감에 빠질 때마다...‘분노할 힘’을 얻습니다.
-출판편집자 이하림
- '사랑방 후원인들이 건네는 이야기' 중에서-
이번 30주년의 키워드는 ‘엮이다’다. 사랑방 30년을 준비하면서 새롭게 엮일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것 같다. 사랑방 활동가들은 누구와 어떻게 엮이고 싶은지 궁금하다.
‘30주년 함께 위원회’ 하림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세상이 망해가는데 그 세상에 내가 개입할 여지가 너무 적다는 패배감, 이런 생각에 되게 휩싸일 때가 많은데, 그 때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엮이고 싶을 때, 분노의 힘을 주는 사랑방에 늘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절망이나 패배감도 굉장히 깊지만 ‘우리가 같이 싸워보자, 싸울 수 있어’라고 하는 전망을 밝혀주는 운동에 대한 간절함도 정말 높은 것 같다.
1990년대 90년대 이후에 운동이 확장된 만큼 개별 의제들이 분화되면서 사실 전문화된 단체들이 등장한 지는 굉장히 오래됐고, 전문화된 단체는 보편화됐다. 그럴수록 사랑방 같은 단체가 하는 역할을 더 잘 알아봐주는 것 같다. 그리고 개별 의제로 활동하는 단체들의 활동가들도 나름대로 뚫고 나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에 그런 갈망이 다들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영역에서 싸우기도 너무 바쁘다. 이때 판을 열어주거나 같이 고민하는 장을 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야 ‘교차성’이라는 말이 많이 보편화되었지만,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할 때만 하더라도 생소했다. 여전히 운동을 연결하려는 운동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몽)
최근 사회운동의 특징 중 하나가 개인 활동가의 증가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어떤 조직으로 자기를 대표하지 않아도 자기의 의제나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고, 일정한 사회 변화를 만들어 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넷 페미니스트들이 그렇다. 그런데 조직으로 모이지 않은 개인 활동가들이 증가할수록 파편화되는 느낌도 있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자리의 필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장들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누구와 엮이고 싶냐’라고 질문에 답하자면, 사회에 뭔가 지금 문제가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결국에는 사랑방 운동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이지 않을까.(어쓰)
▲ 사랑방 상임활동가 어쓰
기후 문제에 진심인 사람들이 이미 많이 있다. 지난해 924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했던 평범하면서도 기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예전에는 플라스틱을 덜 써야 한다거나 등의 개인적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기후를 이야기하면서 ‘자본주의가 잘못됐고, 체제를 변혁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기 구호로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제 이런 요구를 조금 더 구체화해야 하는 것이 기후정의 운동의 과제일 것 같다. 그 과제 안에서 사랑방의 역할이 있을 것 같다.(가원)
사랑방이 40, 50년을 맞이할지 모르지만, 사랑방의 이런 (엮는) 매력을 느꼈던 사람이 사랑방에 들어왔던 것 같다. 단체들은 점점 성장하고 있는데 우리 운동의 힘이랄까 이런 것을 서로 확인하는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분투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힘으로 확인되는 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이 들고, 그런 맥락에서 사회운동의 힘으로 어떻게 모아낼지를 고민하는 ‘길 내는 모임’도 함께 하고 있다.(민선)
31일이면 인권운동사랑방 30년 후원의 밤 ‘기꺼이 엮인 우리'가 열린다. 후원의 밤에 초대하는 한 마디를 해달라.
30년 역사가 대부분 내 것이 아니어서 그 긴 역사를 이야기하는 부담이 당연히 있다. 그런데 그게 든든할 때도 있다. 이제 ‘기꺼이 엮인 우리가 만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만나서 엮이었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엮일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몽)
30주년 후원의 밤으로 연락을 돌리면서 그 긴 역사의 무게가 확 와 닿았다. 이 공간에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갔고 수많은 운동이 엮이면서 사랑방이 이 30년을 유지해왔다. 나도 이제 그 무게를 느끼면서 활동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가원)
전 좀 거꾸로. 그동안 무게에 짓눌리는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이젠 좀 안 그러려고 한다. 우리가 그 30년 다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저는 막 짓눌렸던 사람이라. 30주년을 준비하면서 사랑받는 단체라는 걸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사랑방 활동가 여덟 명, 작은 인원 같고 때로 막막하지만 30주년을 준비하고 엮는 과정이 서로 애정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