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에 불만 있는 여성들을 위한 자료집

이가은<달나라딸세포>

음악을 들으며 침대에 누워 편안함 속에서 책을 읽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책이 있다.

‘세계화에 불만 있는 여성들을 위한 자료집’은 바로 그러한 책들 중 하나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짧지만 책을 읽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단번에 읽을 수가 없었다. 하나 하나의 글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여성의 현실과 그들의 투쟁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남미의 마낄라에서, 태국과 인도의 홍등가에서,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 정권 아래서, 필리핀의 사탕수수농장 위에서, 한국의 기업 구조조정 앞에서… 각기 다른 지역과 문화, 계급, 인종적 정체성을 지닌 여성들(women)이 여성(Woman)이라는 이름 하에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화가 몰고 온 억압과 착취이다. 현재 전 세계 빈곤층 인구 13억 중 70%가 여성이고, 매일 노동시간의 60%가 여성의 노동에 의해 이루어짐에도 여성의 수입은 전세계의 10%이다.

여성들이 공유하는 억압과 착취는 사실 너무도 다양하다. 우리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로 그 원인을 쉽게 돌려버리고 모든 여성은 다 같이 억압받고 있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세계와 3세계의 구분이 존재하고, 1세계의 여성들은 3세계의 여성들이 만든 것을 입고, 먹고, 쓴다. 언젠가는 1세계처럼 잘 살아보리라 했던 꿈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음이 판명되었고 3세계는 외채를 혹독한 수업료로 치르게 되었다. ‘다루기 쉽고, 임금이 낮고, 인내심 많고, 성실한’ 여성노동자와 1세계 남성들의 탐욕의 대상이 되는 성매매 여성들이 그 희생양이 되었다. ‘전지구적 노동착취공장’에서 베로니카 듀존은 외채로부터 아무 이익을 받지 못했던 남미의 여성들이 왜 그 대가를 치뤄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외국 기업과의 계약 하에 운영되는 마낄라라는 초착취 공장에서 젊은 여성노동자들은 장시간초과노동, 건강에 유해한 작업환경, 화장실이용 규제, 강제적인 임신테스트와 해고위협 속에서 삶을 송두리째 착취당하고 있다. 인도의 수출자유지대 여성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임신한 여성들은 고용되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은 빈민가의 돌팔이 의사에게 비위생적인 낙태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서구의 여성들에게 낙태는 ‘권리’로서 요구되어야 하지만 남미와 인도의 여성에게는 낙태를 ‘거부’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라마자노글루의 말처럼 이제 “우리는 캘커타에 사는 중산계급 여성의 흥미를 끌 수는 있지만, 헐벗고 버림받은 상태에서 아이들을 기르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에게는 아무것도 제공할 것이 없는 페미니즘 정치학을 발전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페미니즘 의식은 또한 그 버림받은 사람으로부터도 나와야 한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초착취 지대가 있다. 바로 국제적 성산업이다. 3세계는 ‘동양의 신비’로 포장되어 1세계 남성들을 위한 성적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벌고 있다. 홍콩, 타이, 대만, 인도 (한국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최근에는 동유럽과 구소련의 여성들이 성산업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인신매매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사회의 낙인, 고객의 폭력, 에이즈, 포주의 착취에 어떠한 보호장치도 없이 노출된 여성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선언하고 권리 찾기를 시작하였다. ‘성매매 노동자 선언문’에는 매매춘을 직업으로 인정하라는 다소 논쟁적인 요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기 이전에 그들이 이렇게 요구하게 된 구체적 현실과 맥락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국가의 주요 산업(?)으로서) 성매매는 엄연히 현존하고 있는데, 매매춘 여성들이 최소한의 자기방어로서 고객에게 콘돔사용조차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을 타계하고 인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라는 맥락 속에서 성매매 노동자 선언문이 읽혀져야할 것이다. 타이 ‘엠파워’의 찬타위파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매매춘)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노동 조건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고 자존심을 회복하도록 합니다’라고 말한다.

국가 자체가 반여성적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에 여성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과테말라에서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이유로 자행된 집단학살, 강간의 사례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또한 종교의 이름 아래 여성들이 일을 하거나, 교육을 받거나, 심지어 아플 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마저도 부정해 버린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여성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억압과 아프가니스탄 혁명적 여성연합(RAWA)’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여성들의 생존과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RAWA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파키스탄 민주여성연합(PDWA) 역시 파키스탄의 여성억압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흔히, 우리가 중동의 여성들을 베일 안에서 억압받는 타자로서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투쟁에 대해 관심도 없고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중동의 여성운동을 상상하

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용감하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새로운 힘과 영감이 되었다.

거대한 초국적 자본은 전통적으로 씨앗의 보관자였던 인도의 여성농민들을 소외시키고 기업으로부터 종자를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기업에서 파는 종자는 한 번의 발아로 끝나기 때문에 농민들은 매 경작기마다 종자를 새로 사야 한다. 수천년 동안 지역에 전해 내려오던 고유한 지식들이 초국적 기업에게 도용되어 지적재산권으로 탈바꿈한다.

인도에서 수세대 동안 살충제로 사용하던 님나무가 미국, 유럽의 살충제 특허로 더 이상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자원이 되었다. 필리핀에 몰아닥친 세계화는 필리핀의 농업을 환금작물 중심으로 바꾸고 있으며 그 속에서 여성들은 더욱 더 토지를 빼앗기고, 식량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농약 등의 유해 물질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토지를 잃은 많은 여성들이 관광산업의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게 되었고 성폭력과 성희롱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들 이야기가 나에게 세계화에 의한 여성착취의 사례로서만 이해되는 것을 계속 경계했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글을 읽는 나의 눈이 이미 제 3세계 여성들을 바라보는 서구 페미니스트의 눈과 닮아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도 제 3세계인이면서 서구의 페미니즘이 제시하는 해방의 전망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며 다른 여성들도 모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선험적으로 생각해 버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리하여 내가 읽고 싶은 것만 읽은 건 아닌지. 하지만, 이 책은 많은 부분 그들 스스로가 얘기하게 함으로써 그런 위험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글이나 글 쓴 이의 배경에 대한 설명이 좀더 풍부했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책에 실은 글들의 입장이 각각 상당히 다르고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글들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책에 실린 글들도 어느 측면이 옳고, 어느 측면이 그른지, 어디까지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지역에서 운동을 하는 활동가가 자신의 시각에서 세계화를 바라보고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고,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을 쓴 글이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내가 나의 입장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이 책에서 지구촌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성들의 투쟁을 소개하였다면, 이제는 이들 투쟁이 우리의 투쟁이 될 수 있기 위한 실천적 전략을 제시하는 2차 자료집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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