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대한매일 주필)
일제가 만든 보안법
많은 사람이 보안법을 자유당 정권이 처음으로 제정하고 역대 정권이 악용해온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물론 현행 국가보안법의 원조(元祖)는 자유당 정권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왜 그런가. 진짜 원조는 일제시대에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일합병 이전인 1907년 7월 27일 통감부 법률 제2호로 제정되었다. 일제는 한국인에게만 적용하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치안법으로 중벌주의적인 치안형법으로 보안법을 만들었다. 이 법은 3·1운동때 항일 민중을 처벌하는 데 큰 효력을 발휘하였으며, 수많은 애국지사와 만세운동에 참여한 많은 국민이 악형을 당하게 되었다.
보안법 제1조는 “내부대신은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결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라고 규정하고, 제2조에서는 “경찰관은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집회 또는 대중의 운동 혹은 군중의 집회를 금지하고 제한하며 또 해산할 수 있다.” 라고 규정하여 한국인의 집회와 결사를 억압하는 악법으로써 식민통치 기간에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처럼 일제가 만들어 애국지사들을 탄압하는 올가미가 되었던 보안법이 해방된 조국에서 몇차례 개정과 ‘통폐합’(반공법과)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래심줄 같은 명줄을 유지하면서 애국자를 죽이고 민주인사들을 옭죄는 데 악용돼 왔다.
김대중대통령이 8·15경축사를 통해 국가보안법 개정 방침을 거듭 밝혔다. 그러나 공동여당인 자민련과 한나라당이 반대하고 특히 한나라당은 ‘색깔’시비를 벌이고 있어 보안법 개정이 과연 수구세력의 완강한 저항을 돌파하면서 개정될 것인지 귀취가 주목된다. 국민회의는 올 정기 국회에서 개정작업을 마친다는 목표 아래 △반국가단체 찬양고무죄(7조) △회합통신죄(8조) △불고지죄(10조) △포상금지급조항(21조) 등을 개정 또는 폐지하는 방안을 마련중이다. 유엔 인권위로부터 ‘인권규약위반’이란 지적까지 받은 반국가단체찬양, 고무죄에 대해 법 적용기준을 엄격히 제안하거나 폐지를 검토한 것은 진일보한 것이다.
애국자 조봉암을 죽인 법률
죽산 조봉암선생에 대해서는 긴 설명을 요(要)하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그는 “3·1운동에 가담하여 1년간 징역언도를 수(受)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그 형을 종료하고” “상해에서 왜경에 피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 징역언도를 수하고 만기출옥”(공소장)했다는 기록에서 죽산의 ‘항일투쟁’을 살피게 된다.
이러한 애국자를 일제가 만들고 이승만정권이 덧칠하여 강화시킨 보안법으로 처형한 것은 정의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자유당정권의 대법원은 조봉암피고에게 첫째로 형법 제 98조 제 11항의 간첩, 둘째로 군정법령 제5호 제2조의 무기불법소지, 셋째로 구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의 수괴취임, 넷째로 동법 제3조의 협의 선전의 죄를 인정하고 이에 사형을 선고하였다.(‘법적용에 착오는 없는가’, 한국일보 1959년 3월 6일자 사설)
죽산을 죽음으로 몰아간 국가보안법 (당시)의 제1조는 “정부를 잠칭하거나 변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조직한 자 또는 그 결사 또는 집단에 있어서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단한다” 고 규정, 죽산에 적용된 1항에서 “수괴, 간부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고 적시했다.
또 제3는 “전 2조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 2조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그 목적사항의 실행을 협의, 선동 또는 선전하거나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고 규정했다.
결국 죽산은 합법적으로 진보당을 결성하여 정치활동을 벌인 것이 ‘변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조직’한 ‘수괴’로 몰려 처형된 것이다. 후일 역사는 이를 두고 ‘사법살인’으로 규정하였다.
1958년 7월 2일 열린 1심 재판은 죽산에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평화통일론이나 간첩혐의는 모두 무죄였다. 판결 뒤 법원청사는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괴청년 수백명이 몰려들어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벌하라”고 외치며 난동을 부렸다.
이 소동을 겪고난 뒤의 항소심과 상고심은 1심과는 크게 다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으며, 59년 2월 27일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죽산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주심 김갑수는 사형을 선고하면서 혐의인 간첩·국가보안법위반·무기불법소지 등을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죽산은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정권의 음모는 비열했다. 구속된 진보당간부들에게 모진 고문을 자행하면서 살려줄 테니 죽산이 간첩이었다는 사실만을 진술하라는 등 사건조작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죽산은 잘못된 법률적용과 정치공작과 어용검찰, 법관의 합작품에 의한 희생양으로 삶을 접었고, 그 법은 지금도 맹휘를 떨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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