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대열에 합류한 귄터 그라스
「가디언」 10/1
{양철북}으로 유명한 논쟁적인 좌파 작가, 1972년 이래 27년만에 독일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다
베를린에서 토니 패터슨
어떤 이들에게는 앙팡테리블로 평가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후(戰後) 독일 문학계의 몇 안되는 거장 중 한 명으로 간주되는 귄터 그라스는 치과를 가기 위해 뤼벡의 집을 나서는 순간 라디오에서 자신의 노벨상 수상소식을 들었다.
71세의 소설가는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함부르크의 치과의사와의 약속을 위해 차에 오르기 전에 그는 덧붙였다. “독일인으로서 저보다 먼저 노벨상을 탄 하인리히 뵐이 [살아있다면] 무어라고 말했을지 자문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도 저의 수상에 동의했을 거라고 느낍니다.”
그라스는 자신이 세계 최고의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대해 그토록 겸손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지난 수십년 간 그는 항상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고 독일에서는 종종 “영원한 노벨상 후보”라는 말을 들어왔다. 뵐은 197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오래 지체된’
마르틴 발저 같은 그라스의 동시대인들이 어제 그의 수상을 처음으로 축하하였다. “그건 오래 지체된 일이지요. 그의 소설 {양철북}만 하더라도 그의 노벨상 수상은 너무 오래 걸린 거지요.”
노벨상 심사위원단이 어제 스톡홀름에서 수상작을 발표하면서 특별히 찬미한 작품은 바로 기념비적인 소설인 {양철북}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의 호레이스 엥달 사무총장은, 2차대전 전전(戰前)에 성장을 거부한 단치히의 소년 오스카 마체라트의 서사시적 이야기를 통해 그라스가 “생생하게 묘사된 암담한 우화라는 형태로 역사의 잊혀진 얼굴을 그려내었다”고 말하였다. “{양철북}은 20세기의 불후의 작품으로 남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1959년 출간된 이 소설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고 그는 곧바로 전후 독일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라는 국제적인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이 책은 4백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양철북}의 출간 이전에 그는 무명의 시인에 불과했다. 한 평론가는 1955년 한 회의석상에서 본 그가 “고개를 푹 숙이거
나 두리번거리는, 절망적인, 마치 집시 거지 같은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콧수염과 파이프 담배로 유명한 이 작가는 항상 헐렁한 골덴바지와 트위드를 입은 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독일 문학계의 위대한 스승이자 솔직한 인권 투사가 되었다. 지난 십년간 그는 터키계 이민자에 대한 처우와 망명처를 찾는 사람들을 추방하는 이른바 “비인도적” 관행을 둘러싸고 독일의 보수적 기성사회와 싸워왔다.
정치적 논쟁을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은 그가 목적 달성에 실패한, 동독에 대한 서독의 식민지화 과정이라고 본 독일 통일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승리와 더불어 그 어느때보다도 야만적이고 야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그는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살만 루시디의 주장을 옹호했으며 코소보를 둘러싼 나토의 전쟁에 독일이 참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항상 정치적으로 왼쪽에 서있는 작가로 간주되어온 그는 1953년 동독이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를 분쇄시키는 것을 목격하고 {반란을 시도한 평민들}이라는 소설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동독 정권은 1987년까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단치히 3부작
서독에서 그라스는 1960년대 선거운동 기간 동안 전 사민당 수상 빌리 브란트를 몸소 지원하였다. 그러나 당이 헬무트 콜의 보수적 정부와 함께 독일의 자유로운 망명법을 엄격히 강화하는 데 표를 던진 1992년 이후 그는 사민당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가 단치히에서 지낸 어린 시절은 혹독했다. 적군(赤軍)의 전진이 있기 전 1945년에 단치히로부터 쫓겨난 후, 그라스는 독일인 망명자였고 그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 “저는 한 번도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지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양철북}의 성공은 그라스의 단치히 3부작을 완성하는 두 개의 작품을 낳았다. {고양이와 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하는 것이고 {개들의 세윌}은 1963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 그는 십여 편의 소설과 단편을 저술했지만 어떤 것도 전과 같은 비평계의 갈채를 받지는 못했다.
{어느 달팽이의 일기에서}나 {넙치} 등과 같은 보다 동시대적인 주제를 다루는 이후의 작품들은 비평가들로부터 미온적인 반응을 얻었다. 비평가들은 그라스가 현재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약하다고 언급하곤 했다.
그의 최근 소설 중 하나인, 독일 통일이 가지는 문제들을 다룬 {광야}는 실패작이라는 호된 공격을 받았다.
비평가들을 앞지르려 노력하면서 그라스는 최근작 {나의 세기}(이 작품은 100개의 단편과 작가 자신의 그림을 담고 있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작품은 세기의 소설이 아닙니다. 그건 이룰 수 없는 기대겠지요. 제가 의도한 것은 일종의 과거청산입니다.”
히틀러 소년단에서 민족의 양심으로
* 독일의 위대한 현존하는 소설가는 히틀러 소년단(유겐트)에 들어갔고 독일제국의 마지막 몇 시간까지 전투에 참여했다. 그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미국의 포로가 된 것과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된 것이었다.
* 그라스의 데뷔작이자 최고의 작품인 {양철북}의 주인공은 세 번째 생일날 성장을 멈추기로 결심한 한 소년이다. 히틀러 치하 독일 운명의 상징이자 조국의 양심이라는 자신들의 역할을 책임지는 데 실패한 예술가들을 극명히 드러내는 이 작품은 살만 루시디를 비롯한 한 세대의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 그라스는 빌리 브란트가 베를린 시장을 역임한 당시 그를 위한 연설문 작성자로 활동하였다.
* 그라스는 1990년 거의 혼자서만 독일 통일을 비판하며, 독일은 포로수용소의 참사로 인해 통일에 필요한 도덕적 권리를 잃었다고 선언하였다.
* 독일과 프러시아 역사에 대한 서사시인 그의 최근작 {광야}는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일부에서는 조국의 양심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순진하기만한 논객으로 평가받는 그는 치열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의 유명한 평화상이 한 터키 작가에게 돌아간 것을 계기로, 쿠르드족을 말살하는 데 터키당국과 협력하고 있는 독일을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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