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순대국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있자니 두 눈을 차마 감지 못하고 떠나는, 박힌 듯 천장을 응시하던 그들이 자꾸 눈앞에 맴돌았다. 모르는 곳에서, 우리가 볼 수 없는 많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억울한 사연들이 떠올랐다. 지금의 각오가 퇴색하고 의지의 빛이 바랠 것 같을 때 오늘을 떠올리자,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하늘 아래 부끄럼 없는 기자가 되자고 나는 다짐했다. 소리 없이 스러져간 많은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냉정한 손과 그러나 따뜻한 눈매를 지닌 기자로 말이다.”
김은혜 청와대 대변인이 2001년에 낸 책 <나는 감동을 전하는 기자이고 싶다>에 쓴 말이다. 이 책은 기자직을 희망하는 여성들에게는 필독서로 유명하다.
그러나 청와대 부대변인 김은혜씨가 20일 뱉은 말은 그이를 존경해 왔던 많은 기자 지망생들을 실망시킨 건 물론 온 국민에게 실망을 안겼다. “이번 사고로 과격시위의 악순환이 끊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사람이 되고 싶다던 그이의 눈엔 철거민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약자로 살아가는 철거민이.
그이는 1993년에 MBC에 입사해 그해 말부터 사회부 기자로 2년이 넘게 경찰서에 출입했다. 여성 경찰기자로서는 당시 가장 오랜 경찰기자 경력이었다. 방송사 최초의 정당 출입 여기자가 됐다. 1999년 4월 뉴스데스크 메인 앵커로 발탁되면서 최초의 기자출신 여성앵커라는 호칭도 얻었다.
그이는 2000년대초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에 나와 경찰기자 초년생때를 회상하면서 살해된 한 여성의 시신 부검장 안에서 시신을 앞에 두고 “다시는 당신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하고 죽도록 뛰었다는 말했다. 그이는 부실시공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진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에, 대구지하철 가스폭발 사고현장에서도 민완 기자로 맹활약했다.
20일 새벽 살인진압에 쓰러진 주검 역시 그이가 지금도 경찰서를 뛰어 다녔다면 반드시 만났을 '억울한 죽음'이다. 용산 한강대로변 5층 건물 옥상, 망루까지 세워가며 살고 싶다고 울부짖다가 불 타 주검이 된 억울한 사람들이다.
김은혜 부대변인은 지난 19일 이명박 대통령이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경찰청장으로 내정하자 “법질서 확립의 적임자”라는 평가를 내놨다. 김은혜 부대변인의 예전 표현대로라면 지금의 법은 강한 자를 위한 법이다. 재개발조합 조합원의 절반만 찬성하면 언제든 강제철거를 가능케 하는 ‘도시및환경정비법’은 약한 자인 세입자를 위한 법이 아니다. 불법 집회라 규정하면 그냥 불법 집회가 되어버리는 ‘집회및시위에관한법’은 국가 폭력에 맞서 나선 약자인 시민들을 위한 법이 아니다.
그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1994년 한 주검 앞에서 스스로 다졌던 “의지의 빛이 바랠 것 같을 때 떠올렸다는 오늘”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 '오늘'이 오늘이다. 15년전 결심대로만 산다면 사업하는 부자 남편과 100억원대의 개인 재산쯤은 큰 문제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