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언론들이 역사를 통해 반면교사로 삼을 것들

[낡은책 17] 변혁과 민중언론 (존 다우닝, 김종철 역, 창비, 1988.12.25, 394쪽)

진보매체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서유럽, 동유럽, 북미, 남미의 진보적 대안언론이 1950-80년대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내부 구조는 어떠했는지,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당사자들은 직접 만나 꼼꼼하게 취재하듯이 분석한 책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대안언론과도 밀접히 연결돼 있다. 미국의 몇몇 대안매체는 한국의 역사와도 밀접히 연결돼 있다.

저자 존 다우닝(John Downing)은 1940년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과 런던대 정경학부를 나와 1988년 현재 뉴욕 헌터대 교수로 사회학과커뮤니케이션 경제학 등을 연구하고 소련매체 연구논문이 많다.


대안언론의 제1덕목 : 내부 민주주의

저자는 “대안매체를 지배하는 원칙과 자주관리 매체의 역사적 경험에 관해 면밀히 검토하는 건 사회주의자들, 여성운동가들, 급진론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존 다우닝은 이 책에서 주류 언론을 극복하고, 정치적 해방, 경제적 평등, 문화적 자주를 위해 복무하는 언론을 희망했다. 다우닝은 이 책을 쓰면서 철저히 계급적 관점을 유지했다. 다우닝은 1980년대 전세계적으로 전개중인 급진적 언론운동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 설명한다. 프랑스의 <리베라시옹>이 계속 살아 있고, 1979년 서독에서 <타게스 차이퉁>이 출현했고 미국에서 민주 커뮤니케이션 연맹과 매체동맹이 결성됐다는 거다.

다우닝은 매체를 소유형태에 따라 구분한다. 독점자본가들이 주식의 대부분을 장악한 언론, 국가나 공공기관이 소유권을 장악한 언론,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매체의 이상적 운영방식은 자주관리라는 거다. 자부관리는 언론노동자들 또는 매체노동자들이 매체를 완전히 소유하거나 부분적으로 소유하고서 민주적 방식으로 편집하고 제작 편성하고 영업하는 걸 말한다.

미국식 통치에서 언론은 통치 도구(수단)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미국언론은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에서 급성장한 좌파운동을 정보기관들이 탄압할 때 미리 분위기를 조성하고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뉴욕 타임즈>도 이런 캠페인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쟁의가 일어날 때 미국의 매스미디어는 일방으로 자본가를 지지하고 응원했다.

대안매체운동은 운동의 순수성과 도덕성을 지킨다는 면에서는 성공했지만 대중성 확보에는 실패했다. 미국의 <내셔널 가디언>이 전성기에 발행한 부수가 4만5천부에 불과하고, 이탈리아의 <일 마니페스트>가 창간 직후 20만부에서 3만부로 떨어졌다. 다우닝이 강조하는 건 ‘매체 내부의 민주주의’다. 구성원의 평등한 급료체계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업, 종사자들의 전문성이다.

번역서가 나온 1988년과 오늘의 한국언론 상황

역자 김종철은 서울대 국문과를 나와 1967-75년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1988년 현재 한겨레 논설위원이었고, 지금은 <녹색평론> 발행인이다. 동아투위 출신들이 대부분 기업의 하수인으로 들어가거나 지난 10년의 자유주의 정권시절 전문성 없이 지상파 방송사 주변에서 이사와 사장 등으로 행세한데 비하면 김종철은 맑은 길을 걸었다. 김종철은 1975년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야인시절 밥벌이를 위한 번역작업에서도 <제국주의론>(공역), <산업혁명사>(공역), <프랑스혁명사> 등 래디컬한 책을 주로 내놨다.

번역자 김종철이 이 책을 번역한 계기는 1988년의 한국 언론이 처했던 상황에서 기인한다. 1980년대 말 한국에서도 언론사 노동조합이 속속 들어서고 대안언론운동의 일환으로 출발한 <한겨레신문>이 창간하는 등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연관성 있다. 1988년 초겨울 한국의 권력과 독점자본의 유착과 더불어 언론의 행적이 국회 청문회 심판대에 올라 온 국민의 폭발적 관심을 불렀다. 한국에서 언론과 언론사 경영주들이 알몸을 드러내 보인 적은 없었다. 언론기업주들을 신문할 때 고양이 앞의 쥐처럼 행동한 의원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언론의 위력을 명백히 확인했다.

22년이 지난 지금은 <한겨레>를 대안언론으로 보기 어렵고 언론사 노조도 마찬가지다. 대신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는 인터넷 기반의 민중언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이들 대안언론들이 역사의 교훈을 통해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찾아보라는 의미로 소개한다. 번역서의 순서대로 꼼꼼하게 축약해 소개한다.

그러나 400쪽 가까운 이 방대한 보고서 수준의 번역서는 몇 가지 아쉬움이 있다. 이 번역서 어디에도 원전의 정확한 이름이 없다. 동시에 원전의 정확한 발행연도도 없다. 다만 본문을 더듬어 보면 이 책의 원문은 1982년에 작성된 것이다. 또 평생 신문쟁이로 살아온 번역자의 한계 때문에 진보적 대안‘방송’사의 전문 용어를 제대로 옮기지 못했다. 예로 ‘액세스 프로그램’ 또는 ‘시청자 참여(제작) 프로그램’으로 번역할 것을 ‘공개적 접근의 사례들’이라고 번역해 놓고 있다. 잦은 오탈자도 흠이다.

자주관리 대안언론의 종합분석 보고서

이 책은 자주관리 언론의 조직에 관한 정치적 경험을 최초로 세부적으로 비교 연구했다. 이 부문에선 프랑스의 자주관리 일간지 리베라시옹(Liberation)을 연구한 F. M. 사뮤엘슨의 'Il Etait Une Fois Liberation'(파리, 1978)란 책이 거의 유일하다. 민중매체 조직에서 제3세계의 경험은 풍부한데도 이 책은 푸에르토리코를 다룬 몇 페이지를 제외하면 그런 경험에 관한 자료는 전혀 없어 아쉽다.

세계인은 매체가 제공하는 여흥과 정보의 질펀한 향연에 탐닉하고 있다. 이 연구는 서구와 동구의 매체양식에 대해 진정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불협화음을 내는 일군의 매체의 경험들에 관한 보고다.

법인, 국가, 교회, 정당의 소유도 아니고 노조의 소유도 아닌 ‘자주관리’ 매체 안에서 일상의 상황을 통해 경험해온 바로 그 권력을 초점으로 삼고 있다. 선택된 사례들은 자유민주주의 미국, 파시즘 붕괴직후의 포르투갈, 1969년 뜨거운 가을 이후 이탈리아,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동유럽의 것이다.

모순덩어리 수정헌법 1조

모순은 미국의 수정헌법 1조에서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미국의 매체평론가들은 언론자유가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주제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여성,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메리카 원주민은 처음부터 공적 영역에서는 제외한 이 헌법은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다. ‘균형’ ‘객관성’ ‘다원론’은 일단 적용되면 혼란에 빠지는 구호들이다.

베리건이 검토한 서유럽 사례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녀가 인용하는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액세스 프로그램)에는 영국의 <열린 문>, 네덜란드의 <반 온데렌>이 있다. <열린 문>은 중상층 이미지를 갖고 있는 BBC-2TV의 프로그램으로 주말 심야에 방영하고 일요일 오후에 재방송하는데 주요 시간대엔 방영하지 않는다. 이 프로 방영 때는 시청률이 떨어진다. 특정 이익집단을 주로 다룬다. 해당 집단은 원하면 필름의 편집에 참여해 논평할 수 있다.

그러나 BBC는 “인종주의적 감정을 부추기는 시도”를 하면 안 된다는 편성지침에도 가끔씩 압력집단의 프로그램 제작을 도왔다. ‘이민 방지 캠페인’이란 이름의 한 집단은 명백한 反흑인단체로 이 프로에서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런 프로에도 인종주의의 힘이 작용했다.

네덜란드 액세스 프로그램 <반 온데렌>

네덜란드어로 ‘민중으로부터’와 ‘아래 쪽을 주의하라’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 <반 온데렌>은 매우 흥미 있다. 매주 방영하려고 프리랜서 전문가들(전문 리서처)이 필름을 제작했는데 평범한 노동자의 임노동 경험과 그 느낌이 내용이었다. 공적 인물, 심지어 노조간부의 발언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참여자들이 프로그램 내용을 결정하고 편집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프로는 시청률이 높은 두 연속물 사이에 방영해 90만 명 이상 시청한다. 이는 네덜란드에선 상당한 시청률이다. 이 프로는 네덜란드 TV에서 상당히 외로운 위치인데도 베리건의 연구에서 인용한 모든 사례 가운데 진정한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에 가장 가까이 갔다.

서구의 매체정책에서 대중의 공개적 참여라는 비전을 향해 움직이는 듯 보이는 프로그램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우리는 이런 참여는 지역적 관심사를 보다 광범한 전국적 정치운동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역사회는 상대적으로 고립돼 여러 단위로 분할돼 있기 때문이다. 민중이 자본, 국가, 교회, 다른 억압적 권력기관들에서 독립해 ‘자신의’ 매체를 건설할 가능성은 얼마나 클까?

동구매체의 수사법 : 전통벨트에서의 생활

1966년 동독에서 발간한 사회주의 저널리즘에 관한 공식 텍스트를 살펴보자. 여기엔 부질라브스키의 저널리즘에 관한 텍스트도 있다. “언론인의 역할은 국가의 정책을 설득력 있고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고 상부로부터 내려오는 경제적 명령의 앙상한 뼈에 매력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살을 붙이는 것이다.” “사회주의 언론인은 혁명 정신에서 모든 인민의 교사이며 대중을 교육시키는 사람이다.” 매체 커뮤니케이션은 서구에서 민주적 매체가 그렇듯 소비에트 진영 국가들 안에서도 위기상태에 있다.

실질적 대안 라디오

70년대 새로운 발전은 라디오의 이용이었다. 1970-73년 칠레 ‘인민의 단결’기에 나온 두 라디오 방송국이 있다. 하나는 노조연합이, 다른 하나는 혁명좌파운동이 운영했다.

그리스에서 1973년 11월 파시스트 대령들에 맞선 봉기기간에 아테네 공예대학 학생들이 라디오 송신기를 가동했다. 내용은 봉기의 정보와 저항의 호소, 군대와 경찰의 동향 뉴스를 방송했다. 1974-75년 포르투갈 노동자들은 두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해 75년 11월 강제 폐쇄 때까지 운영했다.

이탈리아에선 1975년 좌파의 자주 라디오 방송국들이 국가의 방송독점에 맞서 방송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1년 뒤 지방방송의 규제를 풀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이 혁명적이지 않은 수많은 자주 방송국들이 이탈리아에 있다. 1968년 체코에서 자주관리하던 라디오와 매체의 역할도 잊지 말자.

프랑스 게릴라 라디오 방송국에는 미테랑 정권이 1981년 법을 개정하기 전까지 운영했던 라디오 ‘꾀르 다씨에르’(강철 심장)이 대표적이다. 이 방송국은 1979년 철강 노동자의 장기 파업동안에 로렌 주의 롱위에서 여러 달 방송했다. 프랑스 독립라디오에는 라디오 껭껭, 카날 75, 모엥, 멜렁, 프레깽스 노르, 블뢰, 7, 코르시카 엥떼르나쇼날, 리유 80, 질다 등이 있었다. 1981년에도 파리에서 방송하는 ‘이씨 에 멩떠넝’, 아네씨의 공산당 연합노조의 방송국인 라디오 ‘옹드 쀠르’ 등이 있다. 이탈리아 산 레모에서 프랑스까지 전파가 도달해 하루 24시간 방송하던 시설 좋고 전문적인 라디오 K도 있었다. 프랑스 인구의 약 2/3이 자유방송을 지지한다. 프랑스 정부가 방송국들을 부단히 폐쇄했는데도 법은 계속 농락당했다. 이탈리아가 자유지역방송을 허용한 사실은 다른 서유럽에 분명한 선례였다.

서독과 영국은 프랑스보다 자유방송의 사례가 적다. 주목할 만한 서독의 방송국은 라디오 ‘페르테 페쎈하임’인데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 삼각지에 위치해 공통의 방언은 물론 라인강 핵발전소 저지라는 공통의 요구를 갖고 있었다. 주민들은 국경이 무의미했다. 보통 하루 12-40분 동안 송출하는 방송을 1977년에 시작했다. 서독과 프랑스 경찰은 설비를 압수하고 제작자를 체포하려고 거듭 시도했지만 지역민의 지지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제작자는 경찰을 피해 방송국을 철저히 분산시켰다. 16마일 정도 가는 낮은 주파를 사용하는 6개의 송신기를 서로 다른 지역에 설치하고 36개의 중계안테나를 세웠다. ‘페르테 페쎈하임’의 방송내용은 순수한 생태학적 관심부터 다양한 노동계 갈등과 문화적 주제까지 확대하고 ‘RVF 드레예클란트의 친구들’이란 공개운동집단을 만들었다. 1980년대에도 RVF는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 방송허가를 받았다.

실질적 대안 신문

민중적 커뮤니케이션 욕구는 언론경영주나 거대기업을 위해 일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신문을 운영하기 위해 자주관리집단을 조직하고 싶다는 인쇄매체 언론인들의 욕구와 함께 했다. 프랑스신문 <르 몽드>가 대표적 사례다. 르 몽드는 여러 해 걸쳐 조직됐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 기자들은 1980년대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인수를 시도할 때 독립 대안매체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굳이 혁명조직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다. 대중에게 말하고 감정을 직접 표현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배려하면 된다. 이런 방식은 좌파에겐 쉽지 않다. 자주관리는 <스코티쉬 데일리 익스프레스>나 매디슨 위스콘신의 <프레스 거텍션>처럼 파업에서 태어난 신문도 포함된다.

1980년대에는 매체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이 세계적으로 커졌다. 프랑스의 <리베라시옹>이 살아있고, 1979년 서독에서 <타게스 짜이퉁>이 생겼고, 미국에서 민주커뮤니케이션연맹과 매체동맹이 결성됐다. 대안매체를 지배하는 원칙과 자주관리 매체의 역사적 경험에 관해 면밀히 검토하는 건 사회주의자들, 여성운동가들, 급진론자들 전체에겐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한 연구서인 존 다우닝의 책 <매체 기계>(The Media Machine, 런던, Piuto 출판사, 1980)도 참고할 만하다.

미국의 급진적 대안매체

대안매체는 공식매체가 미처 보지 못하고 비워둔 황무지에서 번성한다. 때로는 <롤링 스톤>이나 <빌리지 보이스>처럼 상업적 독자층을 발견해 기성매체에 특별히 편입하는 경우도 있다. 큰 제도권 매체도 조금씩은 비판적 목소리를 위한 공간을 두고 급진적 칼럼니스트를 일부 이용한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이들은 주요한 흐름의 한 단면만을 대표하는 데 불과하다. 기성매체들은 미국의 대중에게 엄청난 애국적 거짓말을 거듭 팔았다. 그들은 언제나 여성운동을 조롱하고 잘못 대변했다.

주요 매체들의 소유와 통제 유형은 언론이 미국에서 독립적 ‘제4계급’이 되기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입증한다. 광고는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을 지탱하는 기본 원천이다. 신문들은 수입의 60-80%를 광고에 의존한다. 매체 세계에서 권력의 집중과 중앙화는 심각하다. 1978년 신문을 제작하는 회사의 5%가 일간지 부수의 48%를 차지했다. 1923년엔 5%의 신문사가 부수의 50%를 차지했다. 텔레비전은 1972년 네트워크에 가입한 방송국이 전체 시간의 60%를 네트워크 프로그램으로 채웠다. 1972년 영화사의 0.2%가 수익의 53%를 차지했다.

<뉴욕 타임즈> 경영진 말대로 “인쇄하기 적합한 모든 뉴스”를 보도한다는 공식적 윤리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 언론은 민중의 통제를 크게 벗어나 있다.

대안매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격

19세기 초 토크빌(1805-59)은 미국의 장점으로 “작은 매체들의 번성”을 들었다. 그러나 FBI가 대안매체를 쫓아내라고 건물 주인들을 협박하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매카시는 다수파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반대의 자유는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감정은 미국의 지배계급에게 아주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매카시의 득세 3년 전 조지 케넌은 <포린 어페어즈>(Forein Affairs)에 “소련을 봉쇄해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했다. 미국 내 비판적 매체를 직접 겨냥한 말이다.

에마 골드먼의 자서전 <나의 삶을 살다>(Living My Life, 뉴욕, 1970, 전 2권)에 잘 나오듯이 이런 문화는 사회주의 소련 탄생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미국에서 에마 골드먼의 혁명적 생애는 1890년대에 시작돼 1919-20년에 파머(Palmer) 습격과 더불어 끝났다. 급진적 언론에 대한 국가의 억압이 시작된 건 바로 이 때부터다. 1906년 발간한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은 큰 반향을 얻었다.

1919년에 윌슨 대통령이 파머(Palmer, Alexander Mitchell, 1872~1936)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는데, 2년 동안 법무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그는 정치적 과격론자, 혐의가 있는 반정부주의자, 좌익조직, 거류 외국인 등에 반감을 표출하는 전례 없는 운동을 벌였다. 에마 골드만과 정부전복 활동의 혐의가 있는 여러 사람들을 추방했다. '파머의 일제 검거' 기간 동안 기본적인 시민의 자유를 무시한 일이 알려지면서 파머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었고 결국은 그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무너졌다. 파머는 죽을 때까지 민주당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대통령후보인 앨 스미스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미국도 모든 정치운동과 매체를 체제 안에 두려고 세심하게 계획을 세웠다. 파머 습격 이래 에드가 후버의 장기적 지배로 FBI가 강화 확대하면서 국내문제에 대한 CIA의 개입이 커지고 국가안보위원회의 탄생, 도시에서 경찰의 ‘붉은 특별반’ 유지, 군사정보부와 국방성의 국내문제 개입 등으로 전국의 정치생활을 통제했다. 작은 대안매체 탄압은 이런 역사에 근원을 두고 있다.

데이비드 암스트롱이 1960년대의 대안매체를 연구한 <무장을 알리는 나팔>(A Trumpet to Arms, 보스턴, 사우스 앤드 출판사, 1984)은 통찰력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기성질서에 근본적으로 대항하는 대안매체를 조직하는 데 나타나는 문제들을 검토하고 있다.

민중의 투쟁에 침묵했던 미국의 기성언론

미국은 1975년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같은 해 포드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뉴욕시는 파산했다. 노조로 조직된 디트로이트 등 북부와 동북부에서, 거의 노조가 없는 휴스턴 같은 남부로 고용이 이동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대규모 흑인반란 등 사회운동이 확산했다. 60년대, 70년대 버클리의 ‘자유언론운동’의 뿌리는 50년대와 60년대 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대대적으로 벌인 징집반대와 반전운동과 같은 남부의 민권투쟁에 있었다.

주요 매체는 서남부의 기록에 없는 노동자들, 아이티의 피난민들, 사우스다코다주와 노스다코타주의 인디안 공동체들, 켄터키주의 실직 광부들의 투쟁을 외면했다. 이런 사정을 개선하려는 저항매체는 많지 않았다. 산업별 노동조합회의가 1930년대와 40년대 흑인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고 오늘날 노조원 사이의 인종적 다양성이 높아졌지만 이것이 작업장을 넘어선 정치적 연대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60년대 미국 민권운동의 성과와 한계

절정에 이르렀던 60년대의 비상한 확산에서 운동이 침체하기 시작함에 따라 매체의 대다수가 급속히 사라졌다. 그러나 <내셔널 가디언>과 버클리의 KPFA는 60년대가 아니라 1940년대부터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가디언>은 영국에서 현재에도 나오는 <가디언>과는 아무 관련 없다. 60년대 운동은 맑은 날에 반짝한 번개가 아니었다. 많은 대안매체들이 70년대에 사라졌으나 다수가 남아 있다. 그리고 다수는 70년대에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60년대의 사회운동은 두 얼굴을 가졌다. 긍정 : 흑인운동은 흑인의 지도력을 요구하고 그것을 쟁취했다. 많은 대안신문이 미국의 군사활동에 맞섰다. 부정 : 얼어붙은 50년대 냉전시기에 대한 반동이라는 특징이 각인돼 있다. 매카시 시대의 기구들은 여전히 민중을 위협하고 침묵시키기에 충분했다. 소련의 첩자라는 거짓말을 안 했다고 로젠버그 부부는 처형당했다. 50년대의 또다른 억압인 ‘성적 청교도주의’는 규제가 이완되면서 운동권 내 남성우월주의가 도처에 나타났다. 탈영한 군인들은 여성운동가에게 ‘위안’ 받아야 하고, 전투적 남성운동가들은 여성운동가와 동침할 권리가 있고, 여성들은 정치적 지도자나 사상가로 부적합하다는 생각들이 60년대 운동사회의 한 풍조였다.

내셔널 가디언과 가디언

<내셔널 가디언> 뉴욕, 1948년, 상근직 10명, 주간, 1948년 3만5천부, 1949년 7만5천부, 1953년 4만5천부, 판매, 구독, 기부
<가디언> 뉴욕, 1967년, 상근직 23명, 주간, 2만부, 판매, 구독, 약간의 광고, 기부

<가디언>은 1967년 큰 분열에도 미국 좌파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운영하는 독립신문이다. <가디언>은 매카시즘, 침묵의 50년대, 60-70년대 사회운동을 겪어내고, 1980년대 신우파와 신냉전 시기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가디언은 일관성 있고 주목할 만한 위치를 유지했다.

공동창간자 3명 애런슨과 벨프레이지, 잭 맥매너스(1961년 사망)는 1948년 <내셔널 가디언, 지켜야 할 그 무엇>을 창간했다. 가디언은 플랭크린 루즈벨트의 죽음 이후 1940년대 말 미국의 정책이 급속히 보수화된 충격 때문에 생겨났다. 2차 대전 결과 여성의 지위는 올랐고 노조도 어느 정도 안정된 권력을 갖춰 종전 직후 15개월 동안 전국에 걸쳐 전투적 파업을 벌였다. 진보는 무적은 아니라도 적어도 웬만큼 유지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애런스와 벨프레이지는 미국이 점령한 전후 독일에서 제2의 나치가 급속히 재건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이 그리스 공산주의 인민봉기를 진압하려고 의회에 대규모 원조를 요청했다. 노동자 파업권을 억제할 목적으로 1947년 나온 태프트-하틀러 법도 생겼다. 소련은 1948년 유고의 독자적 사회주의를 공개 규탄했다. <내셔널 가디언>의 모스크바 특파원인 애너 루이스 스트롱은 미국의 첩자라고 비난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은 급진적 독립주간지를 창간했다.

애런스와 벨프레이지는 군국주의와 냉전 세력은 물론 사회주의 조국 소련도 거부했다. 미국공산당에 종속되기도 거부했다. 그러나 공산당 활동의 자유를 탄압하거나 봉쇄하는 어떤 기도에도 단호히 반대했다. 노동자,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평화집단을 적극 지지했다. 당시 <뉴욕 타임즈> 같은 신문들이 덜레스 형제나 매카시 상원의원의 가락에 맞춰 자체 검열하던 때에 가디언은 국내외 특파원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듀보이스와 윌프레드 버쳇 두 특파원을 활용해 정통한 정치언론의 진수를 <내셔널 가디언> 보여주었다.

가디언은 헨리 월러스(1941-45년 미국 부통령)의 진보당을 지지했다. 로젠버그 부부를 지원한 유일한 신문이었다. 부부의 처형을 반대하는 국제적 캠페인을 벌였다. 하원의 외롭고 단호한 급진주의자 ‘비토 마칸토니오’의 선거유세에 신문의 모든 것을 투입했다. 1940년대 말 비토 마칸토니오 등 일부 진보적 정치인들은 공산당간부의 기소를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의 침해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비토 마칸토니오 하원의원은 공산당지도자의 기소는 “모든 미국인의 기본권과 헌법을 파괴하려는 조잡하고 잔인한 술책”이라고 비난하였다.

매카시에 정면으로 맞섰던 <가디언>

가디언은 기사 본문에 ‘만약(if)과 그러나(but)’를 전혀 쓰지 않고 직접 매카시를 공격했다. 동시에 가디언은 소련의 반유태주의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쿠바의 바티스타의 전복과 새로운 피델리스타(카스트로) 정부를 지지했다. 비토 마칸토니오는 이후 정치적으로 변절했다. <피터 드러커 평전>(이재규, 한국경제신문사, 2001)에는 “대공황 시기 뉴욕에서 가장 뛰어난 두 명의 정치가를 ‘반권위적’이고 ‘급진적’으로 만들었는데 그들은 피어렐로 러과디아와 비토 마칸토니오였다. 그러나 그들 역시 민주당원이 되면서 백인 개신교들에 기반을 둔 중산층으로 변했다”고 기록한다.

매카시 상원 정부활동위원회는 애런슨과 벨프레이지를 출두시켜 제5수정조항을 택하거나 구독자 명단과 주소를 위원회에 제출하라고 강요했다. 매카시는 벨프레이지를 추방시키기로 했다. 1953년 빨갱이 마녀사냥이 시작되다. 당시 미국인들은 FBI가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신문 판매점에서 신문을 살 때 주위를 살핀 뒤 <데일리 워커(공산당 기관지)>와 <내셔널 가디언(좌파 주간지)>을 <뉴욕 타임스>나 <헤럴드 트리뷴>속에 감추어야 했다. 어떤 사람을 해고하고 싶은데 적당한 이유가 없으면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로 ‘의심스럽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가수가 참가한 모임에서 박수를 친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볼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난무했다. 살벌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마녀 사냥이 벌어지는 1953년에도 미국 수정 헌법 제 1조는 “모든 사람은 신념에 따라 행동할 권리가 있고 어떤 법률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한국과 내셔널 가디언의 밀접한 연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포들은 <국민보>라는 이름의 한글 신문을 자체 제작했다. <국민보> 1951년 8월29일자에는 한국전쟁의 상황을 담은 <내셔널 가디언>를 옮겨 실었다. 이 기사의 제목은 “국제여성연맹 조사단 보고 「내셔널가디언」에 게재”였다. <국민보>는 이 기사에서 “한국에서 미 제국주의가 감행하는 만행을 조사한 국제여성연맹 조사단의 보고는 뉴욕에서 발행하는 ‘내셔널가디언’에 실렸는데 참혹한 시체와 무덤, 파괴와 잿더미 사진까지 첨부했다”고 소개한다. <내셔널 가디언>은 전쟁 당사자였던 제나라 미국 도심 뉴욕 한복판에서 용기 있게도 미군의 전쟁범죄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아래 사진의 당시 <국민보> 1951년 8월29일자 2면에 실린 <내셔널 가디언>의 기사는 매우 길지만 일부를 요약하면 이렇다. “국제여성연맹 조사단 보고를 <내셔널 가디언>이 1951년 8월15일자 뉴욕판에 게재했다. 보고서는 “미군이 평양국립예술극장을 유곽으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평양의 수많은 시민들이 다 같이 미군의 야수적 만행에 대해 말하였다. (중략) 미군들은 평양 인근 송산리 여맹 위원장의 옷을 벗기고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불에 붉게 달군 쇠뭉치로 그녀의 국부를 쑤셔 무참히 죽이고 그의 어린 아들까지 생매장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 <국민보> 1952년 8월6일자에는 <내셔널 가디언> 주필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우리 교포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는 기사도 있다. 이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미국 국민의 총의를 대표한 자유신문 <내셔널 가디언>의 주필 씨드릭 벨프레이지 씨는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이래 열렬한 진보 인민층의 대환영을 받았다. 벨프레이지 씨는 미국의 제3당인 진보당 조직 이래에 전 미국의 진보적 인사를 총망라하는 진보적 주간신문인 <내셔널 가디언>을 창간해 50만명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는 바 금년 11월 전으로 백만 명의 구독자를 얻으려는 운동을 성취하기 위하여 로스앤젤레스에 체류 중이다. 로스앤젤레스 각 단체는 동씨를 후원키 위하여 저녁마다 민중을 대소집회를 개최하는 중이다. 미국 정치동향에 대하여 그는 소견을 발표하되 ‘미국이 파쇼화한 것을 이제 구원하기 불가능할 만큼 한심하다’고 밝혔다. ‘다른 파쇼국가들이 당한 운명을 미국도 그대로 당할 것인데 우리 진보 계급은 최선을 다해 이 재난을 속히 지나가게 하는데 노력할 것뿐’이라고 말했다. 유럽에선 정치인이라면 적어도 정치, 경제, 각 방면에 기초적 지식을 가지고야 나서는데 미국은 단지 돈만 있으면 정치인으로 나서니 그 위험성을 재론해 무엇 하느냐고 연설하였다 한다.”

이 정도라면 <내셔널 가디언>이 남의 나라 캐캐묵은 주간신문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기간에 우리는 이런 언론을 한국에서 본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노빠가 진보언론으로 둔갑하거나 셋만 모이는 따로 정치그룹 차리는 한 줌도 안되는 좌파언론이 사오분열하는 한국 땅에도 <내셔널 가디언> 같은 언론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가디언의 간결한 문장

FBI 요원들이 <내셔널 가디언> 구독자의 집을 방문해 구독중지를 압력했다. 뉴욕타임즈 등 위대한 거대 신문들은 매카시가 벨프레이지를 심문하고 이민 귀화국이 그를 추방할 때 한마디의 항의도 없었다. 사람들은 대안매체를 좌파의 대대적 정치적 부상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는 1955년에 <내셔널 가디언>, <먼슬리 리뷰>, 스톤의 <위클리>, KPFA 같은 매체들의 끈질긴 노력이 없었다면 상황은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1948-1967년 사이 <내셔널 가디언>의 내부엔 세 가지 주요원칙이 있었다. 민주적 내부논의, 명문화된 최종 편집권, 기사작성과 표현에서 전문가적 완벽성이 그것이다. 모든 직원이 매주 전체회의에 참가했다. 전무인 맥매너스는 많은 논설을 썼다. 진보적 인쇄공 관리인(노동조합부)과 맥매너스는 긴밀히 협조했다. 듀보이스, 스트롱, 버쳇 등 비상근기자들을 광범하게 활용했다. 여성과 흑인 특파원을 보도에 참여시키려는 의식적 노력이 있었는데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 처음부터 상근직원엔 몇 명의 여성과 한두 명의 유색인이 있었다. 애런스과 벨프레이지가 서로 편집을 맡았다. 급료는 모든 사람이 동등했지만 안정적이진 못했다.

애런스와 벨프레이지가 전문가의 자질과 간결함을 강조한 건 기성언론의 규범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간결하지 못한 문장이 주장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좌파의 파벌적인 전문 용어들이 미국문화나 어떤 곳에서도 전적으로 비생산적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인터넷 대안매체들은 이런 지적에 얼마나 동의할까.

1967년 대격변까지 세 창간자 가운데 두 사람의 죽음과 추방, 매카시와 그 앞잡이들의 침입, 간헐적 재정위기를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전무가 1965년 내부 권력을 장악하려고 해 빚어진 분열로 손상을 입었다. 벨프레이지가 추방돼 떠난 직후 일부 직원이 애런슨과 맥매너스를 대립시키려고 했다.

가슴 아프지만 필요했던 1967년의 분열

1967년의 내분 : 60년대 들어온 젊은 직원들이 신문의 내용과 노선에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벨프레이지가 떠나고 맥매너스가 죽은 뒤 애런슨은 절반 남은 소유권을 직원들에게 양도하고 신문을 완전히 떠났다.

1967년 이래 <가디언> : 1970년대 내부의 모순이 무르익어 상근직원 중심의 선거파와 훨씬 더 개방을 요구하는 파로 양분됐다. 전자가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문서철과 시설을 파괴하고 반대파의 사무실 출입을 막았다. 반대파는 단념하고 나가 잠깐 동안 <해방된 가디언>을 만들었다. 이 때부터 <가디언>은 초민주주의적 구성원들을 버리고 중국을 철저히 지지하고 소련을 사회제국주의 세력으로 규정해 반대했다. 많은 신문 내용이 ‘모택동주의’ 주장을 실었다. 신문은 당시 모택동주의 파벌 중 10월 동맹과 긴밀히 관계 맺었다.

그러나 1975년 많은 직원이 중국의 외교정책에 의문을 느끼게 됐다. 내부 투표에서 10월 동맹 후보들은 근소한 차로 패했다. 그들은 신문을 나갔다. 이 때부터 <가디언>은 다시 특정 정치집단에서 독립했다. 1982년 새 편집이 된 빌 라이언(Bill Ryan)도 그런 사람이었다.

가디언의 내부조직 : 수정된 민주집중제

1982년 신문의 구조는 수정된 민주집중제였다. 신문은 해마다 ‘5인 조정위원회’를 선출했다. 그러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전체 직원이었다. 모든 직원이 주급 120달러를 받고 주마다 약 50시간 일했다. 자주관리는 일반적 자본주의 경영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1974년엔 여성이 한 명밖에 없었는데 1982년엔 남녀 비율이 반반이 됐고 편집부장과 외신부장은 여성이었다. 1982년 사무실에 유아들을 공동으로 돌볼 시설을 마련했다. 그러나 신문 내부에 제3세계인들의 지위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내분 이래 신문은 전적으로 백인으로 운영했다. 신문 내부의 4명의 ‘흑인회의’는 신문의 영업 관습이 제3세계 민중을 불쾌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더 큰 문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계약 작업도 처리하려고 자체 조판시설을 갖추려고 한 1979년에 생겼다. 이때 조판공들에게 봉급의 약 3배를 주었다. 그러나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시간제근무의 조판공 7명을 감원하고 윤전시설을 폐쇄했다. 언론인과 인쇄공의 분업은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다. 가디언에서 ‘영업’이란 말은 금기어였다. ‘영업’은 대안매체의 효율에 엄청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영업직은 편집직원들이 자기 공헌을 무시한다고 불만이었다. 그래서 영업직도 약간의 기사를 썼다. 그러나 실패였다. 영업의 극심한 스트레스는 줄지 않았다. 신문이 처음부터 비상근기자들을 이용해 외부의 목소리와 의견을 신문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런 관행은 재평가해야 한다.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KPFA

KPFA는 청취자들이 직접 후원하는 미국의 첫 번째 라디오 방송국으로, 1949년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이며 평화운동가인 루이스 힐(Lewis Hill)이 만들었다. 1980년대 KPFA는 FM94.1의 KPFA 버클리와 KPFK 로스앤젤레스 (90.7), WBAI 뉴욕 (99.5), KPFT 휴스톤 (90.1), WPFW 워싱톤 (89.3) 및 기타 27개 주에 약 60개의 지부를 가지고 있다. KPFA의 프로그램은 지역적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독창적이면서도 포괄적이다. 뉴스,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심층 취재, 연속극, 문학과 공연, 인터뷰와 리뷰 등 다양한 형식의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라이브 음악 방송과 시위 및 문화적 이벤트 취재,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직접 참여 방송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KPFA는 개방형 액세스 방송국은 아니지만, 지역 공동체에 대한 교육과 제작 참여를 조직하는데 애써왔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가 높았다. 일부 이사진이 방송국의 성격을 변질시키자 수많은 대중들이 항의 시위와 직접 행동에 나선 것에서도 보듯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참조 : http://www.kpfa.org)

독립영화페스티벌인 2005년 제9회 서울국제노동영화제에 나온 (KPFA on the Air, 2002, USA, 55 min, Veronica Selver)는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며 정치적 이견이 자유롭게 소통되는 공간을 라디오를 통해서 만들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시작한 KPFA의 정신을 드러낸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캠프에서 시작된 이 소박한 꿈은 평화운동가인 루이스 힐에 의해 KPFA의 기획으로 구체화된다. 는 50년이라는 격동의 역사를 거쳐 온, 청취자가 직접 후원하는 세계 최초의 진보적 라디오 방송국의 역사와 현실을 차분하게 조망하는 다큐멘터리이다.

미국 공영방송 PBS의 독립다큐멘터리 전문 프로그램 POV를 통해서 방영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최근 소출력 공동체 라디오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활동가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 KPFA의 전략, 딜레마, 위기, 그리고 그 강력한 대중적 토대를 보여주는 참고서와도 같다.(http://www.itvs.org/kpfaontheair/index.html)

KPFA는 1980년대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었고 FM으로 하루 24시간 방송했다. 직원은 약 20명이다. 무급직원(자원봉사)이 백 명이 이상 있다. KPFA는 1949년 4월 개국해 51%는 음악, 1주일에 37시간은 시사와 뉴스프로를 방송한다. 광고는 없고, 청취자의 지원을 받지만 법인의 지원은 거부한다. 방송허가 보유자인 퍼시피카 재단(Pacifica)과 연결돼 있다.

KPFA와 퍼시파카(Pacifica) 재단의 관계는 계속 변해왔다. 1982년 현재 재단은 어려움에 처한 방송국들을 위한 해결사이자 설립과 다른 허가를 위한 중심적 회계대리인으로 활동한다. 1949년 캘리포니아의 루이스 힐(Lewis Hill)을 중심으로 한 평화 운동가들이 FM 면허 취득해 재단을 설립했다.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는 독립방송국

KPFA는 미국에서 청취자의 지원을 받는 독립방송국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1950년 8월부터 51년 5월까지 한 번 중단된 적을 빼면 1949년 4월15일부터 매일 방송하고 있다. 매카시즘이 조여 오던 KPFA 초창기에 이들은 방송국을 시대상황과 반대로 밀고갔다. 방송국을 창설한 6명의 소집단은 자유주의자와 퀘이커교적 평화주의 심취한 철학을 가졌다. 창설자인 루이스 힐은 2차대전 때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다. 그러나 특별히 급진적이진 않았다. 이들은 초기엔 광고를 받을 준비를 하기도 했다. 모든 직원은 같은 월급을 받고 모든 주요한 결정은 집단으로 내렸다. 방송규정은 좌파의 특정 정치노선과 결합하지 않았다. KPFA의 입장은 의연히 자유주의 그 자체였다. 당시 이런 생각조차 공산주의 동조라고 해석했다. 당시 매카시즘의 신경질적 분위기에서 정치적 건전성을 표방하는 작은 횃불일 뿐이었다.

1949년 KPFA 임시방송국으로 방송했을 때 7천 달러 이상의 체불임금을 안고 있었다. 16개월 동안 운영하면서 지방에서 2백 명 이상의 개인을 참여시켰다. 9개월 뒤 방송을 재개했을 때 지원자들은 탄탄한 기부금으로 도움을 주었다. ‘포드 재단’의 성인교육부가 약간 지원하기도 했다. FM 라디오 수신기 전국 제작량은 1947년 연간 1백만 대 이상에서 1954년 연간 13만1천대로 뚝 떨어졌다. KPFA도 어려움에 처했다. 루이스 힐은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문학잡지를 만드는 등 여러 사업을 벌였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루이스 힐은 1957년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었다.

루이스 힐이 죽은 뒤 1959년 최초의 자매방송국인 ‘로스앤젤레스 KPFA’가 생겼고 1960년엔 뉴욕의 WBAI가 가담했다. 1970년 3월엔 휴스턴의 KPFT가 방송했으나 KKK단의 송신기 폭파를 경험했다. KPFA는 미국공산당 대변자들에게 정규방송을 허용했다. 그러나 KPFA에서 방송에 출연한 사람의 대부분은 미국공산당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KPFA는 당시 중부캘리포니아 공화당위원회 의장이고 나중에 레이건 행정부의 국방장관이 된 캐스퍼 와인버거에게도 마이크를 주었다. KPFA는 민권운동과 반전운동, 1964년 할렘 흑인반란, 1965년 와츠 흑인반란, 여성운동과 동성애운동에도 마이크를 할애했다.

1951-1953년 힐과 가까운 두 동료로 이루어진 3인 체제에 대한 반발로 간간히 사직자가 생겨 공동체에 구멍이 났다. 1957년 4월 예산 위기에 몰린 힐은 직원 3명을 해고하려고 했다. 대상자 가운데 2명은 캘리포니아주 교사연맹 소속이었다. 교사연맹은 파업으로 위협했다. 이사회가 힐의 해고 결정을 거부했다.

방송국은 꽉 짜여진 공동창설자 집단에서 각각 개인으로 구성된 더 큰 구조로 바뀌었다. 무급근무자들에게 보기드문 양보를 했음에도 내부 분쟁의 가능성은 여전히 컸다. 수요일 저녁회의는 모든 근무자에게 개방했다. 부장들은 무급근무자들과 함께 정기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조화롭지는 못했다. 엔지니어들과 기술자도 제작기획에 참여하는 기회가 있었다.

노조를 만드는 건 KPFA 안에서 뜨거운 쟁점이었다. 1964년 KPFA 창립직원 한 사람을 결국 해고했다. 이에 전국방송노동자및기술자협회(지금의 UE)가 파업에 들어가 7주간 계속됐다. 이때 근무자 절반이 떠났다. 노조는 정식으로 KPFA의 일부가 됐다. 오늘날 노조는 훌륭히 움직이고 있다. 노조는 위원장 1명과 감사 4명을 두고 있다. 1982년 평균 임금수준은 월 1200달러였다.

KPFA와 외부 정치세력

제3세계부와 여성부 신설도 있었다. 뉴스부는 가장 많은 유급직원, 많은 예산, 가장 많은 청취자를 확보해 가장 유명하고 잘 조직된 부서다. 1973년부터 74년까지 계속 방송국에서 파업이 일어났는데 대체로 원인은 방송국장에 대한 불만이었다. 라틴계 남매가 1975년 제3세계부 공동창설자가 됐다. 남매팀은 자원봉사자 조직에 실패한 이유로 나중에 해고당했다. 해고는 분쟁에 불을 붙였다. 퍼시피카 재단도 분쟁에 깊이 말려들었다. 경험 많은 제3세계 직원들 가운데 7, 8명을 방송국에서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여성부는 훨씬 최근인 1981년에 생겼다. 여성들과 제3세계인들 간의 상호대립도 있었다. 제3세계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소수라서 제3세계부는 얼마동안 여성부 신설에 반대했다. 초대 여성부장은 제3세계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갈등은 풀어졌다.

1982년에 일어난 내부 분쟁사건은 훨씬 더 심각하다. 1982년 2년 남짓 뉴스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로 비판 받아왔다. 뉴스부는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시온주의 관점을 갖고 팔레스타인 투쟁보다는 이스라엘의 평화운동에 훨씬 더 초점을 두었다.

1982년 6월 보수단체인 ‘미국법률재단’의 의장은 워싱턴의 KPFA 자매방송국에 대한 연방커뮤니케이션위원회(FCC)의 허가갱신 거부를 청원했다. 미국법률재단은 KPFA와 퍼시피카 재단의 연결구조 안에 있는 4개 방송국의 허가를 자기들이 따내려고 했다. KPFA는 안팎의 어려움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은 <유니언 웨이지>

유니언 웨이지(Union Wage)는 노동소식, 특히 여성노동자 투쟁을 강조한다. 샌프란시스코 미션지역에 있다. 1971-1982년까지 발행했다. 유급 사무실 연락담당자, 반상근자를 두었다. 재정은 한 해 2차례 기부와 회비로 운영했다. 격월간으로 나왔다. 여성노동의 역사 등 소책자와 유인물도 만들었다.

유니언 웨이지(Union Wage)는 <평등을 얻기 위한 노동조합원 여성연맹(Union Women's Alliance to Gain Equality)>의 약자다. 1982년에 재정 때문에 문을 닫았다. 그런데도 이 대안매체의 경험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소개한다. 여성 임금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운영한 유일한 대안매체다.

유니언 웨이지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여성 임금노동자들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었다. 평등권 수정조항이 통과된다면 노동하는 여성과 어린이 보호입법이 유린당할 수 있다는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우려가 매체 창립의 이유다. 유니언 웨이지는 이런 입장을 여성권 보호에만 국한하지 않고 남성에게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드문 사례다.

유니언 웨이지는 여성 임금노동자들의 주요조직인 노동조합여성연합(CLUW, Coalition of Union Woman)과 다르다. CLUW는 노동운동의 위계질서에 너무 갇혀 있었다. CLUW는 조합원증이 있는 여성만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노조 조직율이 10%에 불과해 노조가 없는 저임금 여성노동자가 대다수였다. 유니언 웨이지는 모든 여성에게 개방했다.

이 신문이 가장 긴밀히 개입한 노조는 샌프란시스코의 최대 단일노조인 ‘호텔 및 식당 노동조합’이었다. 두 번이나 좌파 노조 간부가 일시적 연합전선을 형성해 제2지부를 장악했다. 유니언 웨이지가 관계를 맺은 또다른 집단은 노조에 가입한 사람이 전무한 ‘가사노동자’였다. 이들 다수는 라틴계였다. 이처럼 유니언 웨이지는 노조원뿐만 아니라 일반노동자와도 긴밀했다.

어떤 정파에도 휩쓸리지 않았던 웨이지

유니언 웨이지의 내부조직은 대단히 민주적이었다. 조이스 모핀은 “파벌 집단이 신문을 장악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말했다. 특정 정파의 기관지로 변한 한국의 진보언론과는 달랐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사례에서 특정 정파가 장악한 언론이 성공한 경우는 없었다. 1, 2년 마다 우편투표로 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 서해안 전역에서 수백 명의 회원이 있었다. 만장일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토론하는 제도였으나 너무 힘들어, 이후 다수결로 바뀌었다. 회의는 열띠기도 했지만 대체로 격렬했다. 특히 연대노조 시기에 폴란드의 한 여성활동가를 초청하는 일 때문에 유니언 웨이지에서 5년 동안 일한 미국공산당원 여성은 항의의 뜻으로 사직했다.

정부가 제도를 개악해 비영리기관들의 우편보조금을 없애는 바람에 우편 비용이 3배로 늘었고 취업구독자가 실업자로 바뀌어 구독료가 15달러->7.5달러로 줄어드는 경우가 4배로 늘었다. 1982년 사무실 임대료가 25% 올랐고 1983년에 다시 10% 인상을 앞두고 있었다. 기부금은 예측하기 어려웠고 작았다. 노조들은 유니언 웨이지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문을 닫았다.

아크웨싸스네 노츠와 에린 불리틴

<아크웨싸스네 노츠>(Akwesasne Notes)는 1968년에 창간해 1982년 약 2만부가 나가는 격월간지다. 뉴욕주 루즈벨트타운 경유 모호크족 주거지역에 있다. 상근직은 9명이고 재정은 구독과 기부금, 약간의 책과 토산품 판매로 메운다. <에린 불리틴>(Erin Bulletin)은 1979년에 창간해 1979년 2천부 나가는 월간지로 직원은 3명이고 구독료로 재정을 메운다.

<아크웨싸스네 노츠>(Akwesasne Notes)와 <에린 블리틴>은 모호크족(Mohawk) 안에서 제작하는데 사회주의 정치에 바탕을 두지 않고, 버클리의 KPFA처럼 자유주의에도 바탕을 두지 않은 신문이다. <아크웨싸스네 노츠>(Akwesasne Notes)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통과 유럽인들에게 당한 만행 등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왔다. 1980년을 기점으로 마르크스주의와 대화하고 있지만 마르크스주의라는 호칭은 명백히 거부한다.

미국과 개나다 국경으로 인해 단절된 모호크족에게 1968년 국경수비대는 자유통행을 어렵게 만들었다. 인디언들은 항의의 뜻으로 양국을 연결하는 다리를 봉쇄해 50명이 구속됐다. 바로 이때 <아크웨싸스네 노츠>(Akwesasne Notes)는 이들의 투쟁을 실은 지방신문의 기사를 오려서 재구성한 낱장으로 된 복사판 신문으로 태어났다.

신문기사를 오려붙여 출발한 인디언의 희망

모호크족은 미국 전지역의 여러 인디언부족들의 상황과 종교적 전망까지 연대하기 위해 캐러반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결국 1969년 알카트라즈 섬을 장악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 때 <아크웨싸스네 노츠>(Akwesasne Notes)는 부수 600 미만에서 약 1만부로 뛰어올랐다. 신문은 수족, 나바호족 등 많은 인디언족의 정보도 제공했다. 신문은 1년에 5-10번 불규칙하게 나왔으나 점차 격월간으로 정착했다.

1972년 아메리카 인디언 운동은 다코타주의 소도시에서 인종주의자의 살인에 맞서 조직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엘로 선더라는 인디언이 백인의 권총 위협 때문에 겨울 눈 속에서 벌거벗은 채 위스키 한 병을 모조리 마시고 술집에서 춤을 추고는 밖으로 끌려나가 두 백인에게 찔려 죽었다. 인디언들은 1972년 ‘조약위반사건 추적’ 캐러반을 벌였다. 이들은 20개 항의 요구를 워싱턴의 인디언사무국에 제출했지만 대답 없자, 사무국을 점령했다. <아크웨싸스네 노츠>(Akwesasne Notes)는 이 때 2만부로 올랐다. 신문은 인디언 사무국 점령에서 빼앗은 많은 문서를 실었다. 광물과 다른 목적을 위해 인디언 영토를 개발하려는 정부와 기업의 계획을 자세히 폭로했다.

1890년 미국 기병대가 비무장의 인디언 남자, 여자, 어린이 수백명을 죽인 악명높은 학살현장인 운디드니(Wounded Kneep)를 점령한 1973년에도 신문은 크게 히트쳤다. 인디언들은 운디드니가 자리잡은 파인리지 보호구역을 다스리는 극도로 잔인하고 부패한 ‘신식민적’ 부족행정당국에 항의했다. 수석행정관 리차드 윌슨은 소모사나 이란의 샤를 연상시키는 태도로 보호구역을 운영했다. 마을 점령은 워싱턴의 이중성과 일반매체에 대한 통제를 폭로했다. 점령은 눈보라, 음식과 의약품 공급 봉쇄, 저격수의 총격으로 인디언 2명 사살을 겪으면서 1973년 2월 27일부터 5월8일까지 계속됐다. 이 투쟁 과정에서 <아크웨싸스네 노츠>(Akwesasne Notes)는 사상 최고인 5만3천부를 팔았다.

인디언 운동이 확대되자 신문은 정기적이고 전략적 관심과 철학적 쟁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국제법에서 인디언의 주권을 재규정하려는 노력도 하고 전세계에 걸쳐 토지에 바탕을 둔 원주민 운동과 연계하고자 했다. 중미, 남미, 호주의 여러 원주민과 연계했다. 서반구의 인디언 차별에 항의하는 1977년 제네바 회의는 그 절정이었다.

1982년 늦여름의 쟁점들은 자주적 공동체 건설에 보다 면밀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래의 실제적이고 근본적인 소재를 찾기 위해 사회적으로 참여하면서 신문의 기조는 조금 혼란을 일으켰다. 요점은 <아크웨싸스네 노츠>(Akwesasne Notes)가 유럽좌파의 이론적 지도자들처럼 ‘이론에 빠져’ 지낼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현실에 뿌리깊이 내리고 나아갈 것인가의 논쟁이었다.

혼란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여성이 1980년대에 노츠에 들어간 것은 뒷자리에 밀려나 있던 건강과 교육 같은 주제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아크웨싸스네 노츠>(Akwesasne Notes) 내부조직

노츠도 공동체다. 1982년 모든 직원은 생계비 만큼의 월급을 받았다. 월급은 1980년 무상배포에서 유료판매로 바뀌면서 지급됐다. 1977년부터 모호크족 추장협의회가 신문의 주필을 임명했다. 자치적 육아기구를 만들었다. 영업과 편집의 분업도 이루어졌다. 1982년 노츠는 판매영업이 허약함을 깨달았다.

니카라과의 미스키토 인디언에 대한 친산디니스타파와 반산디니스타파의 설명을 신중하게 모두 실었다. 모호크 문화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권리가 높았다. 미국 정부는 신문의 전화를 도청, 감청하고 전화선을 두 번이나 잘랐다. 자선재단은 <아크웨싸스네 노츠>(Akwesasne Notes)에 보조금을 주지 말라는 압력을 받았다.

우리의 항의전화 투쟁의 첫 모델 <에린 불리틴>

에린
사우스다코타주 소도시의 인종주의 보안관이 뉴욕 취리히 파리 런던 로마 함부르크에서 “당신 무슨 짓을 하느냐”는 전화를 받은 식이다. 경찰이 1979년 8월말 아크웨싸스네의 한 인디언 캠프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이게 <에린 불리틴>의 시발점이었다. 국제적 압력이 가해지도록 하자는 취지의 운동이다.

미주에 관한 NACLA의 보고서

<미주에 관한 NACLA의 보고서(NACLA Report on The Americas)>는 언론의 날카로운 안목과 명확성이 정치적 추진력과 철저한 논리성과 결합된 차원이 다른 새로운 잡지 언론의 으뜸이다. 미국 안팎에서 이론보다는 정보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잡지는 정기구독자 말고 강의실용과 지난호의 판매로 아주 광범위한 독자를 지녔다. 니카라과, 자메이카, 그라나다, 엘살바도르가 70년대말 뉴스의 초점이었다.

<보고서>는 미국의 많은 언론인들의 필독서가 됐다. 잡지가 ‘엉클 샘의 뒷마당’(중남미)에서 한 특별한 역할은 미국의 대안매체 연구에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일종의 탐사보도 전문 언론이었다. NACLA는 뉴욕시에 있고 1967년에 창간해 격월간으로 발행한다. 1982년 5천5백명의 구독자가 있다. 1982년 현재 상근직 10명에 약간의 자원봉사자가 있다. 급료는 모두 동등하다.

NACLA의 창립은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뉴스레터>라 부르는 등사판 창간호는 1967년 2월에 나왔다. 때는 베트남 전쟁 확산과 도미니카 공화국에 미해병 2만명을 투입한 존슨대통령에 대한 반대시위로 시끄러웠다. 초기 독자는 반전운동가였다.

NACLA는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북아메리카회의(North American Congress on Latin America)의 약자다. 미국 기업과 라틴아메리카 여려 정권과 관계, 미국 기업과 라틴아메리카 군부, 미국정부간 연결을 폭로하는 일을 했다. 잘 조직된 좌파가 있었던 세 나라 우루과이(1972년), 칠레(1973년), 아르헨티나(1976년)에서 미국의 지원으로 반동쿠데타가 일어나자 NACLA는 이들과 맺었던 연대의 고리가 많이 깨졌다.

미국 정경 유착에 대한 정교한 경제분석

보고서는 이제 노동계급의 공동이익을 국제적으로 이해한다는 2차 목표를 가지고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 개입의 정치, 경제적 원인을 분석했다. 의료 철강 자동차 등 다수의 산업연구 기사를 실었다. 대표 사례는 노동자 몰래 공장을 이전하는 ‘탈주기업’(runaway shop)이다. 이는 ‘캘리포니아 뉴스영화’의 <이익의 관리>라는 영화와 비교할 가치가 있다. 보고서는 분석에서 철저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이용했기 때문에 초기에 대중이 쉽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후 잡지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 보다 분명한 문체로 다시 태어났다. 이는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잡지언론사에서 중요한 진전이었다. 잡지는 70년대말 미국경제와 남미의 관계,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에 바탕을 둔 분석을 결합시켰다. 보고서는 소모사 독재에 대한 산디니스타의 조직적 저항을 최초로 자세히 밝혔다. 나중엔 잡지의 ‘모양’과 판촉도 진지하게 관심을 보였다.

NACLA의 내부조직

발송을 위해 우표를 붙이는 일까지 모두 공동으로 했다. 임금도 동등했다. 결정은 다수결이 아니라 만장일치로 했다. 1980년 분업을 처음 도입했다. 영업부서와 조사연구부를 나누었다. 인쇄는 하청이라서 별개였다. 영업부서가 고립되지 않도록 적절히 배려했다. 자원봉사자의 역할은 버클리의 KPFA의 무급직원과는 달랐다.

1971-78년까지 캘리포니아주와 뉴욕 두 곳에 NACLA 사무실을 두었다. 다수의 멕시코인이 서해안에 있고 구독자 상당수도 그쪽에 있어 캘리포니아주에 사무실을 하나 더 둔 건 옳았다. 그러나 1978년 캘리포니아주 사무실을 폐쇄하고 뉴욕에 집중했다. 1982년 일반 독자와 학생, 활동가를 이용하려고 보다 효과적인 접촉과 대화를 자극하고자 앴다. 따라서 독자대응부를 신설했다.

미국 정부의 위협

60년대말 FBI가 전화를 도청하고 개인 은행구좌를 조사했다. 1981년엔 국세청이 감사를 실시했다. 1981년 NACLA는 <마더 존스> 등 몇몇 다른 출판물과 함께 상원의 안보와 테러리즘 관련 소위원회의 조사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NACLA는 살아있고 영업을 확대하고 있다.

제3세계 뉴스영화

<제3세계 뉴스영화>(Third World Newsreal)는 뉴욕에 있고 제3세계 공동체와 노동계급에 특별히 초점을 맞춘 독립영화를 제작 배급하고 있다. 유급 상근직은 3명이다. 1967년 ‘뉴욕 뉴스영화’로 출발했다. ‘뉴스영화’ 창립은 기성매체, 특히 TV가 1967년말 국방성 앞에서 벌어진 반전시위를 경찰이 잔인한 폭력으로 진압한 것을 보도하지 않은데서 출발한다. 2000년 대우자동차 폭력진압으로 태어난 진보넷과 이후 참세상의 출발과 흡사하다. ‘뉴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우리의 <노동자‘뉴스’제작단>도 이 모델을 벤치마킹 한 것으로 보일 정도다.

반전운동에 참여한 백인남성들이 영화공동체를 구성한다. 약 50명의 백인이 참여했다. 대부분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연합(SDS) 회원이었고 문화적 급진주의와 참여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한 주의 정치적 뉴스영화를 아주 빠르게 제작해 보급했다. 초기엔 대형 유개트럭을 몰고 뉴욕시 거리로 나가 행인들에게 상영했다.

5인 조정위원회는 결정을 내리는 데 구성원 전체의 판단을 따라야 했다. 조정위원회는 다소 부유한 백인남자로 구성했다. 조정위원회의 어떤 위원들은 신탁자금을 갖고 있었고, 다른 어떤 위원은 부유한 기부자들을 갖고 있었다. 한 조정위원의 아내는 유력한 양조업 집안 출신이었다. 필름은 대학가에서 수요가 많았다. 우리의 초기 진보 영화판에도 대부분 이런 강남족들이 들어와 행세했다.

60년대 운동에서 남성제일주의에 대한 반성이 나왔다. 여성은 ‘남성혁명가’에게 성적으로 자신을 바침으로써 해방을 입증하라고 부추겼다. 자유로운 성행위도 이런 시각에서 나왔다. 1966년쯤부터 여성운동을 놓고 감정이 격해진 회의들이 있었다. 다수의 지도적 백인남성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디트로이트의 혁명적 흑인노동자 동맹’을 다룬 다큐영화 <마침내 뉴스를 얻다>를 제작했다.

보수의 사대주의, 진보의 사대주의

  크리스틴 초이
비백인 여성인 크리스틴 초이는 1971년 ‘뉴스영화’에 들어왔다. 크리스틴 초이는 대부분의 동료가 자기에게 적대적임을 알았다. 아무도 영사기 조작법을 그녀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1949년 혁명에 성공한 사회주의 중국의 상해에서 자란 경험 때문에 뉴스영화 안에서 초고속 승진했다. 당시 뉴스영화는 준레닌주의적 중앙위원회가 운영했는데 초이를 계속 승진시켰다.

사회주의 세계가 ‘수정주의 논쟁’에 휩싸였을 때 대부분 자본주의 국가내 사회주의 세력들은 소련보다는 중국을 지지했다. 물론 이들도 나중엔 중국의 본질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지만. 아무튼 1950년대 중반에 사회주의 중국에서 태어나고 어렸을 때 생활했다는 이유만으로 초이를 초고속 승진시킨 <뉴스영화>의 지도자들은 참 한심한 사람들이었다.

크리스틴 초이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2008년 교육방송 EBS가 주최하는 제5회 EIDF(국제다큐멘터리영화페스티벌)의 심사위원장을 맡았고, 미국 뉴욕대 영화과 교수다. 크리스틴 초이는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는가>로 1989년 아카데미상 최우수 다큐멘터리 후보에 올랐으며, 한국의 전업주부 이야기를 다룬 <주부의 얼음땡>은 2004년 제1회 EIDF의 개막작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1954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계 아버지와 중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크리스틴 초이는 대다수의 작품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편견을 다뤘고, 아카데미상 노미네이션을 비롯해, 존 사이먼 구겐하임 재단, 록펠러 재단, 아시아 문화원 등 60개가 넘는 국제상을 수상했다.

우리는 자기 조직 안에서 실력 이상으로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그녀의 이력도 모른채 열광했다. 미국 것이라면 무조건 좋다는 한국의 우익이나 중국 것이라면 무조건 좋다고 했던 68세대 사이엔 이런 동질성도 엿보인다. 우리 운동 안에는 지금도 이런 사대주의 문화가 뿌리 깊다. 뻑하면 OECD 투왁이나 ILO에 매달리고, 뻑하면 ITUC(국제노총)에 손을 내미는 문화 말이다. 도대체 ITUC가 어떤 조직인지 몰라서 그러는지. 이 조직은 얼마전까지 ITFCU(국제자유노련)란 이름이었다. 이 조직은 세계대전기간에 늘 세계반공노련이었다. 나는 독립영화제작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기나 할까.

보따리를 싼 부유한 백인

1969년 다수의 뉴스영화인들이 UAW(미국 자동차항공기농기구노조) 밖에서 노조를 조직하던 ‘닷지(Dodge) 혁명노조운동’의 진정한 자주적 흑인 혁명운동을 취재하려고 뉴욕에서 디트로이트를 방문했다. 지도자 일부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닷지 혁명노조운동은 흑인 룸펜프롤레타리아트를 중심으로 보는 표범그룹과 달리 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마침내 뉴스를 얻다>를 둘러싸고 ‘뉴스영화’ 안에서는 충돌이 일어났다. 크리스틴 초이가 중앙위원으로 초고속 승진할 때로 충돌이 있었다.

뉴스영화는 경찰이 덮쳐 필름을 빼앗길지 모른다고 보스턴에 비밀 필름처리실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의 노선을 따라 혁명당의 출현이 이상적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에선 그런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1972년 제3세계 직원회의가 출현해 제3세계 집단, 가난한 백인, 부유한 백인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앞의 두 집단은 연대했다. 부유한 여성 일부가 제3세계 남성의 일부와 동침하기 시작했을 때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제3세계 여성들은 이들을 반대했다. 민족주의 갈등도 나타났고 분열과 혼란이 절정에 달했다. 그 결과 부유한 백인들이 장비를 가지고 떠났다.

남은 가난한 그룹은 ‘10월동맹’이나 ‘혁명연맹’, ‘하퍼즈 페리’(존 브라운이 1859년 노예반란을 일으킨 지명을 딴 단체) 같은 파벌에 가입했다. 제3세계 집단의 3명만이 필름과 문서철을 새로운 작업장으로 옮기려고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마저 곧 도난당했다. 끝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뉴욕주 예술협의회에 신청한 영화제작 보조금이 뉴스영화를 살렸다. 3편의 영화제작에 1만 달러를 보조했다.

내부 말썽이 한 번 더 일어났다. 말썽많은 시기 내내 꾸준히 충실하게 선선히 도움을 줬던 몇 사람 가운데 하나가 내부자금에서 소액을 천천히 빼돌리고 있었다. 뉴스영화는 상처로부터 정치를 건설적으로 혼란을 극복했다.

1974년 이후 <뉴스영화>

1974년 이후 ‘제3세계 뉴스영화’는 레닌의 <국가와 혁명>, 모택동의 <문학과 예술에 관한 연안 강화>, 마르크스의 <고타강령 비판>을 본격 연구했다. 그러나 헛된 희망이었다.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이후 발터 벤야민이나 빌헤름 라이히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70년대 중반 아프리카계 미국여성인 펄 바우저가 들어왔다. 그녀는 재고 필름의 상영을 촉진하고 관객을 개발하는 등의 일을 했다. 관객들은 참여영화 제작에서 필수다. 뉴스영화는 고통스런 오랜 논쟁과 경험 때문에 ‘진보적’ 영화들의 표준적 악덕인 ‘교훈주의’를 보다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영화문화운동가들은 ‘교훈주의’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캘리포니아 뉴스영화

캘리포니아 뉴스영화는 1968년에 출발해 1982년 현재 샌프란시스코 번화가에 있다. 남아공과 1980년대 미국 노동운동 관련 영화를 제작 배급한다. 1982년 현재 상근직원은 4명이다. 1981년까지는 상근직원이 3명이었다. 이 3명이 서로 인간적인 연대로 조직을 꾸려나갔다. 임금수준은 1982년에 시간당 5.85달러였다. 새로 들어온 4번째 사람이 아프리카계 미국남성이었다. 오래 근무한 3명은 백인남성이다.

1968년 뉴욕의 뉴스영화와 1982년 캘리포니아의 뉴스영화 모두 남성 지도부만들 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샌프란시스코 뉴스영화가 1975년 3명의 백인남자에게 넘어왔을 때 베트남 북한 중국에서 오거나 이들 나라를 다룬 다큐와 반전영화, 수감자 지원영화를 배급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3명의 남자는 제3세계에서 미국 다국적 기업이 활약상을 영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1978년 <이익의 관리>(Controlling Interest)가 대표작이다. 흑백 비디오 영화였다. 1976년엔 남아공의 소웨토가 폭발했다. 남아공을 다룬 다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즉각 성공을 거두었고 처음으로 자신들의 임금을 줄 수 있었다. 이전엔 실업수당으로 살았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영화배급의 역학구조를 훨씬 더 정확히 이해했다.

<현장의 매체>라는 프로젝트에도 집중했다. 1982년 공장폐쇄 위협에 부딪친 피츠버그 철강노동자에 관한 영화를 제작해 레이거노믹스를 비판했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서 가장 공들인 인터뷰는 여성과 흑인남자인 철강노동자였다. 캘리포니아 뉴스영화의 경험은 대학의 노동문제 연구센터부터 지역사회의 단과대학까지 교육기관이 독립영화 상영의 중요한 통로임을 인식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서유럽의 변혁운동과 민중언론

70년대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에서 정치적 운동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려면, 지중해에서 미국과 소련의 싸움을 이해해야 한다. 지중해에서 미국의 이익은 1947년 3월12일 ‘트루먼 독트린’으로 표현됐다. 1947년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은 나라의 약 90%를 통제했고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트루먼 독트린 결과 그리스는 ‘독립국’이 되기는커녕 1974년까지 미국의 종속국이 됐다. 1966년 프랑스의 나토 탈퇴, 그리스에서 80년대 초 다시 나타난 민중운동, 이란의 샤 몰락, 영국이 3백 년 동안 유지한 몰타의 해군기지에서 1978년 추방당함, 70년대 포르투갈에 이어 스페인의 파시스트 독재의 붕괴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분법으로만 이해할 순 없다.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공산당은 나토의 회원국 자격에 찬성한다고 선언했다. 1974년 포르투갈이 파시즘 전복에 직면하고 잇따라 스페인에선 프랑코가 사라지자 스페인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는 1970-75년에 비해 1975-80년 4배로 늘었다. 1976년 이탈리아 공산당이 총선거에서 의회의 주요 당으로 부상하자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미국은 이런 사태발전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74년 포르투갈의 폭발

1926년 5월28일부터 1974년 4월25일까지 포르투갈은 역사상 가장 안정된 파시스트 정권이 통치했다. 독재자인 안토니오 살라자르가 1968년 죽을 때까지 마르셀로 까에따노는 꼭 6년 동안 후계자로 있었다. 빈곤과 문맹률이 유럽 최고였다. 포르투갈은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지배하고 동티모르와 마카오, 북대서양의 마데이라와 아조레스까지 지배하는 세계적 식민세력이기도 했다. 아조레스는 1973년 아스라엘-아랍 전쟁 때 미국 비행기의 주요 연료 재공급기지였다.

포르투갈은 1971년까지 예산의 49%를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해방운동과 싸우는 데 투입했다. 군복무 의무기간은 4년으로 엄청난 지출이었다. 포르투갈 임금은 낮았고 노동시간은 극도로 길었다. 보건과 주거는 유럽에서 최악이었다. 1천명 당 58명의 유아가 출생과 동시에 죽었다. 리스본 교외엔 20만 명이 판자촌에 살았다. 노조는 국가가 관리했고 검열은 일상이었다. 탄압 주요도구인 PIDE(국내외 방위경찰)는 자국민을 고문하고 암살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자기 식민지인 아프리카인만큼이나 가난했다. 이는 식민주의 역사에 매우 특이한 경우다.

두 독립라디오 방송국이 알지에에서 포르투갈로 방송했다. 노동자들과 농민은 비밀형태의 노동조직을 유지했다. 교회는 압도적으로 지배체제에 붙었다. 스페인보다 민중적 기반이 없었다. 이런 때 1974년 4월25일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킨 무장군사운동(MFA)는 중간장교와 하급장교였다. 쉽게 까에따노를 실각시킨 반란은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잔인하게 짓밟은 노장 스삐놀라 장군을 혁명정부 수반에 올렸다. 이후 스삐놀라는 브라질로 망명 가 까에따노와 합세했다. 1975년 3월11일 2번째 쿠데타 기도 뒤에 정부도 급진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우파가 기도한 3번째 쿠데타 문서가 1975년 10월1일 언론에 나돌았다. 그 내용은 좌파를 숙청하고 라디오와 TV를 군대가 점령하라는 것이다. 라디오 ‘르네상스’와 ‘르퍼블리카’도 거론됐다. 실제 1975년 11월25일 우익 쿠데타가 일어났다. 더 이상 지주들은 땅을, 자본가들은 공장을 몰수당하지 않아도 됐다.

계속되는 군사쿠데타와 자주관리언론

1974년 4월25일까지 기성 대중매체는 국가 검열국의 다양한 감독을 받았다. 가톨릭계 질서가 살라자르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깊이 관여했다.

포르투갈의 천문학적인 문맹률 때문에 포르투갈에선 신문보다 방송이 더 중요했다. 1971년 인구의 1/3 이상이 읽을 줄 몰랐다. 국영방송은 명목만 가톨릭계인 라디오 ‘르네상스’와 프랑코파의 라디오 ‘끌루브(그룹) 포르투갈스’가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1974년 4월25일 쿠데타 이후 검열이 사라졌지만 국가는 여전히 대부분의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신문을 소유했다.

1975년 여름까지 포르투갈 공산당이 미디어 장악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공산당은 <디아리오 드 노띠시아스>를 포함해 리스본의 4개 일간지를 지배했다. 리스본 중심가의 벽은 온통 메시지와 구호로 덮였다. 격변 초기 일단의 창녀들이 몇몇 신문에 소위 이하 계급의 군인들에게 몸값을 절반만 받겠다고 엄숙히 광고했다. 사회당은 <르퍼블리카>와 라디오 르네상스에 대한 검열을 비난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자주관리 매체들을 옹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974년 이후 포르투갈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거대한 민중운동이 정당정치 때문에 변질되는 것이었다. 노조 지도권을 둘러싼 사회당과 공산당 간 격렬한 줄다리기도 벌어졌다. 정당들은 운동을 지도하거나(좌파) 목 조르려고(우파) 서로 야만적으로 싸웠다.

여성집단이 1975년 1월 리스본의 소규모 시위에서 가정폭력, 남녀 역할구분 반대 구호를 외쳤을 때 언론은 그들을 농담으로 다루었고, 공산당의 여성조직은 그들을 규탄했다. 포루투갈의 대격변은 모순되고 부정적이다. 이 격렬하고 소란스런 혁명기에 자주관리의 <르퍼블리카>, 라디오 르네상스, 라디오 끌루브 포르투갈스가 출현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라디오 르네상스의 19개월

라디오 르네상스는 74년 4월 혁명 이전엔 명목상 카톨릭계가 소유한 리스본의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1974년 4월부터 1975년 11월까지 딱 19개월만 자주관리했다. 75년 11월 군부대가 송신기를 폭파한 뒤 다시 종전의 소유주에게 되돌아갔다. 방송국 경영의 목적은 온통 극우적이었다. 오직 기술적으로만 가톨릭 기관이었다.

혁명기 19개월 동안 라디오 공동체가 관리권을 장악했다. 이런 자주관리는 리스본에만 발전했다. 다른 지역의 주요 방송국은 한순간도 중단 없이 구체제에 있었다.

혁명기가 되자 망명을 떠났던 사회당의 쏘아레스, 공산당의 꾸날 등 정치 지도자들이 돌아왔다. 라디오 르네상스의 유일한 공산당원인 기자가 꾸날과 인터뷰했다. 인터뷰 방송을 둘러싼 갈등으로 라디오 노동자들은 몇 시간 파업했다. 파업 직후 자발적으로 노동자위원회를 구성했다.

갈등 속에서 중재자로 무장군사운동(MFA)가 추천하는 새 인물이 들어왔다. 라디오 르네상스가 부딪친 주요 논쟁은 가톨릭 성직자단과 관계문제였다. 교회의 묵인하게 전기, 수도, 로이터 통신 텔렉스까지 설비중단 시도가 있었다. 트로츠키파인 제4인터내셔날의 프랑스 지부가 대체품을 정확하기 구해 르네상스에 전달해 위기를 극복했다. 라디오 노동자들이 자주관리를 조직하자마자 사회당과 대중민주당은 맹비난했다. 두 정당은 노동자들이 가톨릭교회에 적대적이고 그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방송권을 방해한다고 비난했다. 두 정당은 르네상스가 공산당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르네상스엔 공산당원이 한 명밖에 없었다.

민중이 지켜낸 방송국

방송국은 자금부족과 광고수입 고갈로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성차별이나 정당의 정치광고를 시종일관 거부했다. 1975년 6월 중년여성과 여학생들이 추기경 집 앞에서 우익시위를 벌여 르네상스를 가톨릭에 복귀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렇다고 라디오 르네상스가 공산당과 좋은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다. 르네상스가 물리적 공격에 직면하자 1975년 국민들이 즉각 방송국을 지키려고 주위로 몰려들었다. 공산당과 관계가 파국에 이를 정도였지만 많은 현장의 공산당원은 르네상스를 대단히 좋아했다.

르네상스는 74년 4월25일 직후 몇 주일 만에 8명으로 노동자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모든 봉급을 동일하게 했다. 특별위는 MFA, 가톨릭 교회, 정당들, 외국을 상대로 교섭했다. 르네상스는 좌우파 정당과 카톨릭교회로부터 반대에 부딪쳤다. 포르투갈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결코 르네상스를 공격하지 않았다. 르네상스와 함께 한 좌파 집단은 ‘인민민주동맹’이었다.

사회당 기관지로 출발한 <르 퍼블리카>

일간신문 <르 퍼블리카>는 사회당의 통제 아래 창간해 어떤 정당과도 제휴하지 않는 자주관리로 마감했다. 신문이 1974년 혁명기에 자주관리로 전환하자 보수주의자는 물론 사회당,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산당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74년 4월 이전 <르 퍼블리카>는 포르투갈에서 나오는 유일한 야당 일간지였다.

사회당 지도자 마리우 쏘아레스는 끌렝 데스떼뉴라는 가명으로 파리에서 이 신문에 정규 논설을 썼다. 혁명이 일어나던 해 신문 안에서 일어난 투쟁은 혁명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경쟁이었다. 사회당은 <르퍼블리카>의 대주주였기 때문에 대규모 시위를 밀어내고 사회당의 작은 시위를 사진과 함께 1면에 보도했다. <르퍼블리카>의 공산당원 기자들은 1975년 4월 일괄 사직했다. 1975년 노동절 다음날 인쇄공들이 파업했다. 사회당은 오만한 <르퍼블리카> 인쇄공들이 사회당에서 <르퍼블리카>의 지배권을 탈취하려는 음모라고 해석했다. 파업은 여러 날 계속됐다. 5월19일 대부분의 기자들은 경영진의 변명을 보도하는 것을 노동자조정위원회가 거부하자 기사작성을 거부했다. 사회당은 신문사 밖에서 데모를 벌였다. 군대의 정예부대인 COPCON은 재빨리 이 상황에 개입했다. 인쇄공 파업은 신문이 사회당과 파벌적으로 밀착한 데 대한 저항이었다.

<르퍼블리카>의 자주관리 기관은 극히 짧아서 1975년 7월10일부터 11월25일까지 다섯 달 가량 지속됐을 뿐이다. 75년 11월 <르퍼블리카>는 다른 모든 매체들처럼 정부 포고령으로 강제 폐간됐다. 5개월은 포르투갈 운동에서 중요했다. <르퍼블리카>는 노포르투갈 노동자들의 마음에 뚜렷이 자리 잡았다.

5달 동안 <르퍼블리카>는 기층의 신문으로 신속히 바뀌었다. 기본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조정위원회를 소집했고 그 위원회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총회를 소집했다. 신문의 성공 열쇠는 포르투갈에서 진행하는 정치운동과 맺은 살아있는 관계에 있었다. 포르투갈 공산당은 모든 파업에 극도로 적대적이었다. 1975년 말 <르퍼블리카>의 한 여성기자는 리스본 지하철 노동자파업을 동안 노동자가 대화의 상대로 삼은 유일한 신문기자였다.

라디오 클럽 포르투갈스(Radio Clube portugues, RCP)

라디오 클럽 포르투갈스(Radio Clube portugues, RCP)는 1974년 포르투갈의 세 자주관리 매체 가운데 재정적으로 가장 성공했다. 그리고 75년 11월 우익의 3번째 쿠데타 이후 <라디오 르네상스>가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되고 <르퍼블리카>가 포고령으로 폐간된 반면 RCP는 국유화됐다.

RCP는 1974년 4월25일 이전까지 43년 동안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과 직접 연결된 회사가 소유했다. ‘르네상스’처럼 RCP는 극히 반동적이었다. 혁명기간 동안 내부에서 4명, 국가가 1명을 파견해 관리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혁명적 자주관리는 18개월 내내 완전하게 유지됐다. 정부가 특별위원회에 파견한 대표는 레고처럼 사회당원이었으나 재정적으로 성공을 거두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내부 반대로 사임했다. 정부가 파견한 후임은 조용히 지냈다.

광고주는 계속 광고를 보냈고 광고량이 오히려 늘어났다. 재정적 성공은 아마도 제작내용이 르네상스나 <르퍼블리카>보다 덜 선동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8개월 내내 뉴스와 시사프로들은 정확히 말해 ‘균형을 이루었다.’ 분쟁의 모든 당사자를 포괄했다.

격동의 이탈리아, 이상한 공산당

1870년 이탈리아 통일은 남부에서 볼 때 북부의 쿠데타였다. 1920-45년 파시즘 경험, 서유럽에서 최대인 공산당이 있었다. 북부에 비해 남부는 아직도 극심한 경제적 불리함을 안고 있다.

공산당의 지도자 빨미로 똘리아띠의 1965년 장례 행렬에 몇 사람의 추기경과 주교가 참석했다. 1982년 현재 공산당의 지도자 베를링거의 아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70년대 중반 공산당과 기독민주당 사이의 ‘역사적 타협’도 있었다. 1974-75년 국제적 경기후퇴 때 이탈리아와 영국이 가장 심각히 타격을 입었다. 정부 안에 반쯤 발을 들여놓은 공산당은 다시 한 번 기독교민주당과 굳건히 손잡고 정부의 지출삭감과 노동자의 임금삭감을 요구했다. 공산당은 이탈리아의 세 노조연합 가운데 하나인 CGIL을 직접 통제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1인당 상업신문 구독량이 아주 적은 나라다. 반면 1인당 잡지 구독량은 매우 많은 나라다. 70년대에 ‘고급’신문인 <르퍼블리카>는 일반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방송은 파시즘의 몰락 이후 이탈리아에서 계속 국가가 독점하고 있었다. 기독교민주당은 국가를 지배했고 자신이 지명한 사람들을 RAI(Radio Recetion Italy)라는 방송법인의 주요부서에 넣었다.

100개의 독립라디오 방송국

이탈리아의 방송에서 일어난 주요한 변화들은 RAI ‘밖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독립사회주의 방송국 수가 늘어나 실제로 국가는 자신의 통제 밖으로 길을 열어주었다. 1978년 중반 2278개로 보이는 비국영 라디오방송국과 5백 개 이상의 비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이 나타났다. 자주관리하는 혁명적 라디오 방송국들이 북부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1978-79년 이탈리아에는 이런 방송국이 약 100개 있었고 민주방송국연합(FRED)을 구성하기까지 했다.

경찰은 1969년 밀라노의 한 은행에서 폭탄투척이 일어나 30명 이상 죽고 90명이 부상한 책임을 밀라노의 두 무정부주의자인 ‘삐넬리’와 ‘발쁘레다’에게 덮어씌우는데 거의 성공했다. 몇 해 뒤 테러는 파쇼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삐넬리를 창문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그래놓고 경찰은 삐넬리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다가 뛰어내렸다고 주장했다. 당시 매체들은 경찰 입장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격월간 신문이었던 <로따 꼰티누아>(Lotta Contiuna, 영원한 투쟁)만 의문을 제기했다. 1972년에 사회당 신문인 <아반띠>(Avanti)가 침묵을 깨고 경찰이 삐넬리를 살해하고 은폐했다고 고발했다. 이 일화는 공산당의 <루니따>를 등 이탈리아 기성매체들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로따 꼰티누아>와 <일 마니페스또>

테러 혐의로 극좌파 사람들을 대량 투옥한 1979년 4월 7일, 12월 21일, 1980년 1월24일, 3월11일 정치적 대량체포 때도 언론은 이런 침묵을 되풀이했다. 이번엔 <일 마니페스또>가 1980년 가을에 사건을 파헤치는 영예를 누렸다.

1968년 이탈리아도 다른 유럽처럼 대대적인 사회운동이 벌어졌다. 1969년 뜨거운 가을도 겪었다. 토리노 남부에서 몰려온 피아트 자동차공장 이주노동자들이 노동강도 강화와 저임금에 분노를 터뜨려 공장점거 형태의 자주관리를 시도하기도 했다. 노조 지도자와 사회당, 공산당은 예고 없이 타올랐다가 가라앉는 파업과 공장점거를 통제하는 데 경영진만큼이나 무력했다. 1976년 총선거에서 좌파정당은 떴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좌파의 일부 집단만 이 투쟁을 기존 노조의 타협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새로운 노동계급의 출현이라고 정확히 해석했을 뿐이다. 학생 지지자를 중심으로, 특히 <로따 꼰티누아>(Lotta Contiuna)가 1973년 피아트의 미라피오리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적 파업들에서 노동자 투쟁에 즉각 결합해 연대했다.

1977년 볼로냐 봉기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은 ‘로루쏘’라는 대학생을 냉혈하게 저격한 일이었다. 공산당 기관지 <루니따>는 이 사건을 묵살했다. 공산당의 월간지 <쏘치에따>(Societa)도 마찬가지였다. 쏘치에따는 볼로냐 사태를 CIA에서 훈련받은 존스 홉킨스 대학 출신의 교환학생들이 자치주의자들과 사악하게 제휴해 일으킨 국제적 음모라고 엉터리 주장했다. 루니따는 1980년에조차 여러 봉기를 호되게 비난했다. 공산당 매체는 1977년 봉기에 적대적이었다.

새로운 사회주의 라디오 방송국들, 특히 볼로냐의 라디오 ‘알리체’와 로마의 라디오 ‘치따 푸뚜라’는 봉기기간에 대중토론을 증폭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정치운동으로 시작한 <일 마니페스또>

원래 일 마니페스또(Il Manifesto) 그룹은 2차대전 후에 이탈리아의 기성정치와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크게 불화를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공산당이 갈수록 기민당을 수용하는데 반대해 1969년 뜨거운 가을에 공산당에서 추방당했다. 이들은 소련보다는 중국에 훨씬 더 호의적이었다. 구성원 5, 6명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기자로 상당히 경험을 쌓은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1971년 4월28일 <일 마니페스또>라는 4면 짜리 일간지를 창간해 50리라라는 터무니없이 싼 값으로 팔았다. 본격 마르크스주의 언론으로써 타협하지 않는 이 신문의 전통을 세웠다. 처음엔 하루 20만부가 팔렸다. 첫 해에 꾸준히 3, 4만부가 팔렸다.

1972년 전국선거에서 <일 마니페스또>그룹의 대표들은 의회에 진출하지 못해 신문도 판매부수가 떨어졌다. 1974년 이혼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이혼의 합법화’를 지지하는 단호한 입장을 보여 서서히 되살아났다. <일 마니페스또>는 1974-76 정치적 토론과 투쟁의 중심이었다. 이 때 하루 3만부를 팔았다. <일 마니페스또>와 PdUP(프롤레타리아 단결당) 사이에 조직적 유대가 긴밀해졌다.

<일 마니페스또>는 붉은 여단과 협상을 지지했다. PdUP는 오랜 논의 끝에 협상을 거부하는 공산당의 견해를 지지했다. 이로써 PdUP 패거리가 <일 마니페스또>를 떠났다. 그러나 판매부수는 즉각 증가했다.

초기 10년 동안 <일 마니페스또>는 읽히는 신문을 만들지 않았다. 어려웠다. <일 마니페스또>가 일상 투쟁과는 거리가 먼 엘리트주의라는 비난도 받았다. 1981년 가을 신문의 체제를 변화시켰다. 마르크스주의 바깥의 일상적 범죄, 마약, 청년, 장애자, 셋방구하기, 노동자의 휴일여가방식 등 일상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대중예술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사회주의 운동이 당대의 가장 복잡한 쟁점들에 관해 기지에 넘친 설전을 전개할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한 <일 마니페스또> 같은 신문은 정당하고 가치있는 역할을 했다.

<일 마니페스또>의 내부구조는 1980년에 국내정치, 외신, 노조와 노동, 대중문화, 마르크스주의 등의 부서를 두었다. 초기부터 <일 마니페스또>를 이끌어온 전직 공산당 대의원인 여성 로싸나 로싼띠와 루이지 삔또르 두 사람의 공동편집인이다. 1981년 보다 젊은 기자들을 대표하려고 마우로 빠이싼이 제3편집인으로 합류했다. 전화교환원과 관리봉사부는 다소 소외 받았다. 그러나 모든 직원은 1981년 한 달에 50만 리라를 받았다. 월급을 더 받는 사람은 부양가족이 있는 35세 이상이었다. 부양가족 1명 당 만 리라를 더 받았다. 부르조아 신문의 1/2-1/10 수준의 월급이었다. 루이지 삔또르는 한 달에 기사를 4건만 쓰는 조건으로 ‘한 달에’ 4백만 리라를 준다는 <르퍼블리카>의 제안을 거부했다.

권력구조는 위계적이지만 민주적이었다. 매주 6회 제작하는데 매일 12시30분에 일일회의를 열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했다. 수석 부편집인중 한 명인 쟈니 리오따는 자기가 쓴 테러리즘에 관한 기사가 회의에서 혹평을 받고 전체를 다시 썼다고 소개했다. 부르조아 신문에서 수석 부편집인이 부하 직원에게 위압당하는 일은 결코 없다.

비전문가의 참여가 독립언론에 미치는 영향

로싸나 로싼띠는 공적 권위보다 개인적 권위를 더 누렸다. 그녀가 정규 언론인 출신이 아닌 점이 이 신문내부에선 더 의미 있었다. 그녀와 같은 사례는 <아크웨싸스네 노츠>에선 긍정적으로, <유니언 웨이지>에선 부정적으로 작동했다. 내부 민주주의를 살펴보면 <일 마니페스또>의 구조가 다른 통상적 신문과 얼마나 다른지 쉽게 알 수 있다. 상충하는 입장이 같은 지면에 실릴 정도였다. 여느 신문의 숨막히는 획일주의는 아예 없다.

인쇄공장은 아래층에 있는데 <일 마니페스또>와 <꾸오띠디아노 도나>라는 여성신문 인쇄가 주업인 독립공동체였다. 편집과 인쇄의 관계는 아주 우호적이다. 인쇄공들이 대체로 공산당 소속이지만. 재정은 신문에서 중요하다. 1980년 8월 다른 모든 일간지 값이 300리라 일 때 <일 마니페스또>는 500 리라로 인상했다. 1980년 여름 두 달 동안 아무도 월급을 받지 못했다. 인쇄용지 구입, 광고수입, 배포비용, 취재비용 등이 늘 부족했다. 1981년 3월에 파산이 불가피해 보였다. 루이지 삔또르는 대규모 회견을 열었다. 인쇄용지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일 마니페스또>는 창간 10주년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발표했다. 법안은 마침내 1981년 7월 통과돼 <일 마니페스또>는 정부로부터 약 10억 리라를 지원받았다.

<일 마니페스또>는 창간부터 여성편집인은 물론이고 직원 40%가 여성이었다. 그러나 <일 마니페스또>는 전통적 인습에서 벗어난 여성들을 위한 공간은 제공했지만 억압된 대부분의 여성을 위해 노력하진 않았다. 이탈리에는 언론 전문대학이 거의 없다. 상당수 사람들이 <일 마니페스또>나 <로따 꼰띠누아>를 거쳐가면서 기자 훈련을 받았다.

<로따 꼰티누아>(Lotta Contiuna, 영원한 투쟁)

<로따 꼰티누아>(Lotta Contiuna, 영원한 투쟁)는 <일 마니페스또>와 유사점과 대조점을 모두 보여준다. 정치조직인 로따 꼰띠누아는 삐사대학의 학생과 토리노의 피아트공장에 있는 남부 출신의 젊은 이주노동자라는 상이한 두 집단을 기반에 두고 1969년에 격주간지로 출발했다. 창간호는 대학생과 당국의 충돌에 초점을 두었다.

로따 꼰티누아는 이탈리아 좌파정치와 유럽 좌파주의 일반의 많은 전통과 날카롭게 결별했다. 로따 꼰티누아는 60년대 중국 문화혁명의 원칙을 이탈리아에 맞게 재구성해 성취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친중국그룹 마르크스-레닌주의연맹과는 달랐다. 이 연맹은 중국을 그대로 이탈리아에 심으려고 했다. 로따 꼰티누아는 중국의 정책들을 비판하기를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공산당과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으로 조직한 그룹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로따 꼰티누아는 대중에 기반을 둔 정치, 혁명적 전투성, 당의 내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했다. 공식 노조들의 밖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벌이는 공장투쟁을 늘상 강력히 지지했다.

완전히 개방한 편집국

1972년 로따 꼰티누아는 일간지로 바꿔 4년 동안 약 1만부를 팔았다. 1976년 로따 꼰티누아의 리미니 대회를 열어 정치기구로서 자신을 청산했다. 신문에 있던 약 50명은 독립적 혁명사업으로 신문을 계속 제작했다. 신문이 로따 꼰티누아의 조직노선을 명백히 밝히던 종전 방식과 결별했다.

1977-78년 운동이 폭발했다. 정절의 시기에 로따 꼰티누아는 전국에서 하루 3-3만5천부가 나갔다. 로따 꼰티누아는 사회당과 <일 마니페스또>에 가세해 붉은 여단과 협상을 주장했다. 당시는 신문이 아주 혼란에 빠졌던 때다. 이는 신문의 지나친 개방 때문이었다. 1978년 약 110명이 매일 신문제작회의에 참가해 편집회의는 시장통이었다. 1979년 심한 재정압박과 급속도로 구독자가 줄었다. 결국 7명의 편집위원회의 절대적 통제로 운영을 바꾸었다. 이는 내부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려고 고안한 것은 아니었고 그런 결과를 낳지도 않았다.

1980년 로따 꼰티누아의 구조는 외신, 노조, 법원, 여성 등에 집중했다. 제작자들이 위층에서 일하는 동안 아래층에서 일하는 인쇄공과 관계는 아주 좋았다. 인쇄공은 훨씬 많은 급료를 노조의 엄격한 등급에 따라 지급받았다. 그러나 1980년 로따 꼰티누아의 재정은 절망적이었다. 로따 꼰티누아와 공식 노동운동의 관계는 약했다. 로따 꼰티누아는 일 마니페스또처럼 지적인 차원으로까지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밀라노의 라디오 포퓰라레(Popolare, 민중의 라디오)

이름만 들으면 우리의 <민중의 소리>와 흡사하다. 라디오 포퓰라레(Popolare, 민중의 라디오)는 1980년대 이탈리아의 독립적인 좌파의 모든 라디오 방송국 가운데 가장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탈리아 북부도시 밀라노 시의회는 대체로 사회당과 공산이 지배했다. 공산당이 의회를 지배했지만 시장은 사회당 출신이었다.

라디오 포퓰라레는 라디오 밀라노 첸뜨랄레에서 일하던 5명이 1976년에 시작했다. 좌파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RAI처럼 이 방송국을 ‘경쟁적으로 식민화’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직원들은 월급을 정기적으로 받을 수준으로 안정을 누렸다.

초기 설립자 5명은 1980년에 모두 떠났지만 1980년 여름 상근직원 11명 가운데 9명이 이 방송국 시작부터 함께한 이들이다. 1980년 방송국은 한 해에 1억2천만 리라가 필요했다. 약 5천만 리라는 광고에서, 2천2백만 리라는 개별적 청취에서, 1천만-122백만 리라는 조직적 기부, 1천5백만 리라는 모금, 8백만 리라는 복권추첨으로 모았다. 약간의 적자다. 포퓰라레는 1980년까지 재정위기보다 정치적 위기를 두 번이나 겪었다. 처음엔 젊은 층에 집중할지, 노동계급에게 더 집중할지를 둘러싸고 충돌했다. 두 번째 충돌은 1979년에 주요 정당과 관계에서 벌어졌다.

동유럽의 저항매체

1968년 8월까지 소련에 대한 체코의 태도는 동유럽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긍정적이었다. 체코엔 1948년 이래 소련군대가 전혀 없었다. 소비에트 진영 안에서 경제적 시범국 같은 역할을 해왔다. 체코공산당이 1946년 공개선거에서 투표의 35% 이상을 얻고 사회민주당과 더불어 의회에서 절대다수를 확보했다.

프라하의 봄

저항의 초점이 된 인쇄매체는 체코어 주간지 <리테라르니 노비니>(Literani Noviny)와 슬로바키아어 주간지 <쿨투르니 지보트>(Kulturny zivot)였다. <리테라르니 노비니>는 공산당 지도부와 작가동맹 사이에 벌어진 분쟁의 결과로 1967년 실질적으로 자주관리였다. 당시 권력은 <리테라르니 노비니>를 폐간시키고 작가동맹을 해산시키려 했다. 정부는 같은 제호의 새 주간지를 군대의 대령이 담당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무도 속지 않았다. 신문은 아주 무미건조해졌다. 커뮤니케이션 종사자와 권력 사이의 이런 극적인 대결은 1968년 1월 공산당 중앙위가 50년대 중반 이래 당의 제1서기였던 안토닌 노보트니를 해임하는 데 찬성투표하기로 한 결정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외국어에 관한 출판물을 내는 아르티아의 사장으로 임명된 그의 아들은 그 직위를 차지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널리 불신을 받았다. 방송국은 1940년대와 50년대에 고문을 당한 사람과 고문한 사람들을 실제로 한 자리에 모았다.

기자들은 스스로를 나라의 당연한 지도자라고 여기는 기존의 오만함을 버렸다. 대부분의 인민은 시민으로 행동할 권리를 지녔음을 처음 깨달았다. 매체의 지도적 인물 중 대부분은 이런저런 이유로 떠났다. 권력의 진공 상태로 빈자리는 상당기간 그대로였다. 이 때문에 매체는 놀랄 정도의 자주관리로 바뀌었다. 기자들이 상부에서 받은 지시와 정반대로 글을 쓰기도 했다. 1968년 4월 유명무실했던 기자협회를 개혁해 프라하 시지부를 만들었다. 기자들이 자신의 제작을 자주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인민이 공적 의사결정에 능동적으로 역할 하도록 도왔다.

비밀경찰의 자동차번호를 알린 방송

매체는 소련의 침공이 명백해졌을 때 정부와 ‘비판적 협력’관계로 바뀌었다. 운동은 처음엔 학생과 지식인이 했고 노동자들은 늑장을 부렸다. 그러나 몇 주일이 지나자 노동계는 정치의식과 조합의식을 되살렸다.

방송국들은 소련의 점령 소식을 보도하고 소련의 주장을 반박하고 비밀경찰의 자동차 번호판을 발표하고, 농민들에게 일기예보했다. 점령세력의 분리통치 전술에 대비해 체코 민족과 슬로바키아 민족의 단결을 촉구했다. 방송 프로는 소수민족의 언어로도 방송했다.

늙은 부인들이 방송 노동자들에게 꽃과 쿠키를 가져다주었다. 움직이는 방송국도 있었다. 매체들은 혼란 속에서 정당한 통치구의 역할을 담당했다. 최후의 주요한 라디오 방송국이 마지막으로 내보낸 방송은 “인민 여러분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렸고 우리는 밤낮으로 그것을 수행했습니다”였다.

폴란드 1976-1980년

KOR(노동자들의 자기방어 위원회)의 공동설립자이며 자유노조(연대노조)의 자문인 야체크 쿠론은 1981년 7월25일 “자주관리 투쟁이 우리의 일차적 투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6-81년 폴란드는 프라하의 봄과 달랐다. 폴란드 매체들은 정부와 당과는 독립적이었다. 매체를 깨려는 권력의 지속적 노력에도 살아남았다. 신중하게 반응하는 대항운동을 발전시켰다.

영화 부가지스키의 <심문>은 지금쯤은 파손됐을 것이다. 그 영화는 스탈린주의 시기에 폴란드 비밀경찰이 가한 고문에 초점을 맞추었다. 잡지 <가제타 크라코브스카>는 가격이 1즐로티였지만 바르샤바에서 비공식 가격은 3백 즐로티였다. 50만부를 인쇄했지만 용지난이 없었다면 3백만부는 팔렸을 것이다. 1980년대에도 폴란드에서 독립매체는 여전히 번창하고 있다.

폴란드에서 가톨릭 교회의 위치는 상당했다. 그러나 늘 보수적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폴란드 독립운동에 참여한 적도 없다. 다만 나치 점령기엔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KOR은 1976년 라돔과 우르수스 공장에서 파업한 노동자들 가운데 다수가 체포된 뒤 매 맞고 투옥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하지 못한 지식인 그룹이 창설했다. 권력은 KOR 회원 다수를 투옥했다. 자유노조의 모태인 ‘공장간 연대파업 위원회’가 1980년 8월 내건 세 번째 요구는 ‘검열 중단’이었다.

자유노조는 1980년에 약속받은 전파에 대한 접근을 끈질기게 거부당하자 1981년 8월 19-20일 신문파업을 요청하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으로 요구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 정부는 요구를 거부했다. 파업은 성공했다.

이름마저 노동자인 노동자신문 <로보트니크>

<로보트니크>(노동자)는 8×11인치짜리 종이 한 면에 여백 없이 타자 쳐서 신중히 배포하기 위해 4겹으로 접은 창간호 4백부를 발행했다. 내용은 엄청 매력적이었다. 초기 실크스크린 인쇄는 3명이 필요했다. 한 명은 인쇄기를 끌어내리고 한 사람은 인쇄기를 들어 올리고 세 번째 사람은 종이를 꺼내고 백지를 넣었다. 팬티에서 꺼낸 짧은 고무줄을 이용해 작업 효율을 높였다. 9호 제작은 3천부로 치솟았다. 16호부터 3단으로 편집을 바꾸었다. 1980년 8월 파업이 실린 60호는 7만부를 돌파했다.

레흐 바웬사는 그다니스크 조선소 노동자에게 전기기술자보다는 <로보트니크> 배포자로 더 잘 알려졌다. 배포 노동자들은 체포되고 매 맞고 계속 시달렸다. 광부는 보너스를 뺏겼고 여성노동자는 딸의 유치원을 뺏겼다. 창문에 페인트가 칠해지고 정문에 쇠똥이 버려졌다. 이것은 고속으로 돌아가는 ‘사회주의’였다. 훗날 권력을 잡은 바웬사도 같은 전법을 구사해 언론을 탄압했고 결국 나라를 거덜냈다.

신문 편집진이 하나의 ‘노선’을 정한 건 아니었다. 그들이 노동자와 쉽게 커뮤니케이션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초기 편집은 세 여성이 담당했다. 제작진은 차비 정도를 받고 대부분 여가시간에 일했다. 1980년에야 비로소 신문 구독료를 받았다.

<쏠리다르노치비(연대) 즈 그다니스키엠>

<쏠리다르노치비(연대) 즈 그다니스키엠>은 1980년 8월 ‘로즈’에서 나온 주간지였다. 정부와 당, 자유노조로부터도 완전 독립한 신문이었다. <쏠리다르노치비(연대) 즈 그다니스키엠>는 두 번이나 크게 자유노조를 비판했다. <로보트니크>보다 조금 컸다. 작은 활자로 찍어 분량은 16면짜리 신문과 맞먹었다. 최대인구 1백만의 로즈에서 일주일에 2만부가 나갔다. 광범위한 계층의 의견을 대변하려고 많은 편지를 실었다.

경찰이 복사기를 압수하러 왔다. 이 때문에 지방의 세 공장이 파업에 들어가고 경찰은 기계를 반환하고 텔레비전에서 사과하고서야 작업장 복귀를 이루었다.

<노바(NOWA)>

노바는 자주적 매체들의 심장이었다. 편집위원회는 전직 핵화학자인 미로슬라브 초예츠키가 이끄는 4명이었다. 파업노동자를 지지해 1976년 핵연구소에서 해고됐다. 1977년부터 17번 집을 수색당했다. 자유노조가 태어났을 때 노바는 실제로 그 출판부서가 됐다. 자유노조의 출판사로 전환했다.

소비에트 진영의 정권들이 노동자의 국가라는 주장은 일부만 진실이었다. 체코와 폴란드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원칙에 대한 요구는 정당했고 끈질기게 거듭 나타났다.

일반적 결론

한스 마그누스 엔쩬스버거(H. M. Enzensberger)의 <미디어 이론 구조>(뉴욕, Seabury 출판사, 1974)는 이탈리아 서독 프랑스 등의 대안매체 운동가들 가운데 젊은 층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엔쩬스버거는 19세기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웠듯이 20세기에 와서는 전파 해방을 위해 투쟁하라고 호소했다. 엔쩬스버거는 발터 벤야민과 브레톨트 브레히트의 전망에 크게 의존했다.

페이지 위에 책을 ‘흘리는’ 그래픽 기술은 미국의 지하신문이 개발했다. 지금은 거의 모든 라디오가 사용하는 청취자 전화걸기는 이탈리아 자주관리 방송국이 처음 개발했다. 엔쩬스버거는 급진적 매체작업의 미학적 구성요소와 대중적 구성요소 간의 관계를 강조했다. 이처럼 민중언론은 역동적이고 동시에 창의적이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창의력을 개발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