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시몬느 뻬트르망, 강경화 역, 1978, 까치) |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격렬한 저항
철학교사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공장과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시몬느 베이유. 34살의 젊은 나이에 죽기 까지 격렬하게 양심의 뜻대로 살다간 사람. 스페인 내전 땐 프랑코 쿠데타 세력에 대항에 총 들고 참전했던 여성. 시몬느 베이유는 낡은 보수주의에도 저항했지만 스탈린식 사회주의에도 격렬하게 맞섰다. 그래서 아나코-생디칼리즘을 가장 완벽하게 실천했다.
내가 지난해 <참세상> ‘낡은책’에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레스 토레즈의 평전 <인민의 아들>을 소개하자 모레스의 부정적 측면도 있는데 지나치게 ‘칭송’한 것 아니냐는 투로 댓글이 올라왔다. 댓글의 주인공은 평생 공산당이란 한 조직에 소속돼 활동했던 모레스 토레즈보다는 시몬느 베이뉴 같은 진정한 자유인을 더 높이 평가했다. 나 역시 이 책의 제목처럼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그녀를 존경한다.
시몬느 베이유는 자신의 논문 ‘전망’에서 “더 이상 맑시즘에 무조건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스탈린의 러시아를 파시즘의 또 다른 형태라고 비판했다. 그 비판은 옳다. 베이유는 “레닌의 사고방식에는 반박을 위한 사고 밖에 없다”며 레닌도 준엄하게 비판했다. 반면에 베이유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트로츠키에 대해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이유는 1909년 2월3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943년에 죽었다. 베이유는 그럭저럭 사는 집에서 태어난 인텔리였다. 엄격한 유태인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남동생과 묘한 경쟁심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고집불통 짓도 했다. 어릴 때 집엔 수잔느라는 예쁘고 명랑한 하녀가 있었다.(이 책 35쪽) 중학교 때 베이유는 “자기가 노동자를 좋아하는 건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가 부르주아 보다 훨씬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했다.(35쪽)
베이유는 신학자를 싫어했지만 종교를 배격하진 않았고 종교를 이해하려고 했다.(이 책 47쪽). 결국 베이유는 종교와 도덕을 일치시켰다(47쪽). 정당을 경멸했다(46쪽).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활동가
베이유는 망명중인 트로츠키를 만나 오랫동안 대회했다. 대화 주제는 ‘러시아가 과연 노동자 국가인가’였다.(이 책 210쪽) 베이유는 트로츠키와 대화한 걸 꽤 자랑스럽게 여겼다.(121쪽)
베이뉴는 철학교사 자리를 박차고 공장 노동자로 뛰어들었다. 베이유는 자신의 편지에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제 영혼과 살 속에 파고 들어왔다”고 적었다.(이 책 135쪽) 베이유는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 참된 형제애가 거의 없음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144쪽) 베이유는 1934년 12월 4일 공장 들어가서 1935년 1월말에 나왔다. 나온 직후 곧바로 스위스로 휴가 가서 2월말까지 보냈다. 공장 생활 중 크리스마스 휴가도 있었다.
베이유는 “내가 공장에서 일한 후로 한 번도 노동자들이 사회문제를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구내매점에서 신문 보는 걸 본 적이 몇 번 있지만 모두 부르주와 신문이었다”고 회상했다. 베이유는 “노동자들은 그저 불평할 뿐 저항을 생각하진 않았다”고 털어놨다.(이 책 146쪽)
베이유가 본 공장 노동자
그리하여 베이유는 현장의 이런 참담한 현실을 파타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를 꿈꿨다. 베이유는 다시 편지에서 “노동기구를 철저히 연구하려 합니다만 기술적인 면이 아니라 노동기구와 인간관계, 노동기구와 인간 사고의 관계 측면을 연구하렵니다”(이 책 150쪽)라고 말했다. 베이유는 CGT에 북부 공장 실태조사를 간청해 허락을 얻었다. 1936년 2월 27일 북부 리유로 갔다. 베이유는 ‘실태보고서’에서 노동자와 고용주의 두 입장에서 공평하게 문제를 파악했다. 베이유는 “고용주들의 불만이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보고서에 썼다.(175쪽)
다시 베이유는 동료였던 농장주 띠봉에게 부탁해 농장 노동을 시작했다. 몸이 성치 않았던 베이유는 띠봉의 농장에서 하루 2시간만 일했다. 베이유는 동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띠봉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오두막에서 살았다. 농장 노동자들은 “띠봉씨는 바로 곁에 정부(情婦)를 두고 삽니다. 저기 오두막에 사는 미친 여자요”라고 쑥덕거렸다.(이 책 251쪽)
2차 대전이 태평양 전쟁으로 격화돼 미국까지 참전하자 베이유는 미국에서 잠시 지냈다. 베이유는 1942년 미국에서 살면서 한 유일한 일이 편지쓰기였다.(이 책 278쪽) 병약했던 몸을 돌보지 않았던 베이유는 1943년에 와서는 세례의식을 흉내 내면서 주전자로 자기 머리에 물을 부었다.(304쪽) 의사는 1943년 8월27일 “환자는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며 식사를 거부한 끝에 굶어 죽었다”(311쪽)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