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Chamfjord, Unsplash

최근 인공지능이 만들어낼 ‘다가오는 풍요’와 그에 따라 인간 노동의 필요가 줄어드는 문제, 얼핏 보면 아름다운 미래에 관한 토론에서 나는 많은 사람이 그렇듯 케인스(Keynes)가 1930년에 쓴 다소 수수께끼 같고 여러 층위의 짧은 글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The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을 인용했다. 오늘의 맥락에서 이 글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케인스는 향후 100년 동안 선진국의 1인당 평균소득이 4배에서 8배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매우 낙관적으로 전망했는데, 이는 놀라울 만큼 정확했다. 둘째, 그는 이런 물질적 풍요가 노동의 필요를 크게 줄여 주당 노동시간이 약 15시간까지 내려갈 것이라고 봤다. 셋째, 인류가 마침내 ‘경제문제’를 해결한 뒤 이렇게 늘어난 자유시간과 여가를 과연 제대로 활용할 줄 알 것인가를 고민했다. 이 마지막 짧은 논의에서 「경제적 가능성」의 케인스와 《독일 이데올로기》의 마르크스 사이에는 뚜렷한 유사성이 있다. 둘 다 자유시간이 노동분업이 낳는 우둔화와 마비에서 벗어나 인간 본성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낙관했다. 마르크스의 예를 빌리면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며… 저녁 식사 뒤에는 [예술을] 비평하는” 삶이다. 케인스 역시 수천 년 동안 인류를 피해 다녔던 경제문제를 해결하면 우리를 제약에서 해방하고 모든 인간적 능력이 꽃피는 길로 이끌 것이라고 낙관했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와 케인스의 유사성은 매우 강하며, 더 깊이 살펴볼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오늘 우리가 믿는 것, 아마 훨씬 덜 낙관적인 전망과 대조된다.

하지만 이번에 「경제적 가능성」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예전에 놓쳤던 대목이다. 나는 케인스가 ‘정치적’ 이유 때문에 이를 언급만 하고 충분히 발전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경제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목적을 가진 활동이 인류에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 점, 그리고 풍요에 도달한 뒤에도 유일신 종교가 필요할지 의문을 제기한 점이다.

논리는 다음과 같다. 케인스에 따르면 ‘경제문제’를 해결하려면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낮은 인구증가율, 전쟁의 부재, 기술 진보, 그리고 무엇보다 저축과 자본축적이다. 자본을 축적하려면 흔치 않고 특이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반인간적인 능력, 즉 만족을 미루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람은 어떤 물건이나 활동 그 자체에서 지금 당장 즐거움을 얻는 대신, 수익이 불확실하고 먼 미래에나 돌아올 수도 있는 사업에 돈을 투자한다. 경제적으로 발전한 사회가 가능하려면 자원을 가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이런 만족 지연의 원칙을 내면화해야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인간에게 낯선 원칙이다. 우리는 맛있는 커피든, 멋진 신발이든, 훌륭한 휴가든 좋은 것을 바로 지금 원하며, 은행계좌에 쌓인 추상적인 돈의 형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원한다. 다시 말해 쾌락주의, 지금 즐기는 쾌락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인간의 특성이다. 반면 ‘절제’, 즉 미래의 쾌락을 추상적으로 즐기는 태도는 특이하며, 어떤 점에서는 심지어 ‘병적인’ 관습이다. 마르크스가 ‘추상적 쾌락주의’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것이다. 활동 자체를 즐기기보다 그 결실이 미래에 나타나는 활동에 참여하려는 성향은 미래의 쾌락을 할인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뒤집혔고, 우리는 경제성장을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핵심은 그다음이다. 우리가 ‘자유의 왕국’에 도달해 더 이상 축적할 필요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희소성의 시대에는 필수적이었던 그 능력은 갑자기 본래 모습 그대로 드러난다. 거의 “정신질환 전문가들에게 몸서리치며 넘겨야 할 반범죄적이고 반병리적인 성향”으로 보이게 된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계속 그런 행동을 한다면 오히려 개인적 결함을 드러낸다. 모든 요가 교사가 말하듯 현재를 살지 못하는 능력 부족, 활동을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하고 먼 미래의 보상을 위해 목적 있는 활동을 계속하는 결함이다.

그런 특이한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기서 케인스는 매우 흥미로운 ‘우회’를 한다. 그는 쾌락의 연기를 유일신 종교와 연결한다. 유일신 종교 역시 정의되지 않았고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도 없는 미래에 행복한 삶의 보상을 약속한다. 다음은 케인스의 매우 중요한 문단이다. 직접적으로는 유대교만 가리키지만, 그 함의는 다른 두 아브라함계 종교에도 분명히 이어진다.
“불멸의 약속을 우리 종교의 심장과 본질 속으로 가장 많이 끌어들인 민족이 복리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데도 가장 큰 역할을 했으며, 인간이 만든 제도 가운데 가장 목적지향적인 이 제도를 특히 사랑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브라함계 종교는 사람들이 결과가 먼 미래에 나타나는 활동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데 매우 유용했다. 보상을 미루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누구도 저축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본도 축적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지연의 습관과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칭송하는 태도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내장된 연기에서 나왔다. 케인스는 그중 유대교만 암묵적으로 언급하지만, 이 종교들은 지상의 쾌락을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쾌락을 약속했다. 한편에는 종교적 자기부정과 구원의 약속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경제적 만족의 연기가 있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했고 손을 맞잡고 작동했다. 물론 여기에는 막스 베버의 메아리도 들린다.

그러나 일단 ‘경제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우리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쾌락의 연기를 버릴 수 있다. 활동이 미래에 무엇을 가져다줄지가 아니라 활동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 그와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는 불필요해지고 심지어 해로워진다. 케인스는 이 함의를 끝까지 끌고 가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벽돌을 하나씩 쌓듯 매우 신중하게 구축한 논리에 단 한 걸음만 더 보태면 된다고 생각한다. 풍요의 세계에서는 유일신 종교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쾌락을 미룰 필요가 없고, 저축과 투자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소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매일의 쾌락이 될 것이다.*
1930년대 영국의 이념적 상황, 정부 내에서 맡고 있던 준공식적 역할, 그리고 이미 다소 이단적인 인물로 여겨졌던 자신의 위치를 고려하면 케인스가 이런 함의를 우리에게 명시적으로 끌어내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그의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단순한 다음 단계를 놓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단계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케인스가 이미 훌륭하고 분명하게 제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 나이얼 퍼거슨(Niall Ferguson)이 이 문제를 두고 케인스를 비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그 비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출처] Against purposeful activity and Abrahamic religion in a world of abundance

[번역] 하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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