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이 올 한해도 사람들의 부침에 따라 흘러왔다. 우리에게 벅찬 감동을 준 이야기와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씁쓰레한 기억으로 남는 사건과 인물도 있다. 국내외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1998년을 되돌아본다.
1. 정주영- 금강산 봤다!
올해는 재계의 거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통일 문제에서 큰일을 해낸 한해였다. 그는 두차례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훌쩍 넘은 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담판을 통해 분단 반세기만에 ‘금강산 유람선 관광길’을 열었다. 이는 그 특유의 뚝심의 결과였으며, 햇볕정책으로 표상되는 새 정부의 대북정책 및 현대의 금강산 프로젝트에 대한 전폭적 지원의 공도 컸다.
지난 11월18일부터 한달간 금강산 뱃길을 따라 북한을 다녀온 남쪽 관광객 수는 모두 6608명에 이르렀다. 이는 지난 89년 일반인 방북이 허용된 이후의 방북자 수 4388명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정 명예회장은 앞으로 2천여만평에 이르는 북한 서해안공단을 조성하고 남북 공동으로 유전개발도 하겠다는 등 야심찬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남북교류의 새 장을 여는 발걸음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2. 박세리- 한국 최고의 수출상품
지난해 우리 국민들에 힘을 준 이가 박찬호였다면 올해는 박세리가 있다. 20살의 앳띤 처녀 박세리는 미 여자프로골프(LPGA) 데뷔 첫해에 메이저 대회인 LPGA챔피언십에서 우승을 따내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박 선수는 특히 US여자오픈에서 불굴의 의지를 보여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 대회 4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공이 연못에 빠졌으나 양말과 신발을 벗어던지고 연못에 들어가 침착하게 공을 건져 올린 끝에 연장전에서 기적의 역전승을 일궈냈다. 그는 4개 메이저대회 중 2개 대회를 잇따라 제패한 것을 비롯해 올해 4개 대회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신인왕’을 따냈고, 애니카 소렌스탐과 함께 ‘다승왕’도 차지했다. 또 미 골프기자협회(GWAA)로부터 ‘올해 최우수여자선수’로 뽑혔고,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98년도 스포츠부문 10걸 중 5위로 뽑히기도 했다. 박세리는 골프를 즐기는 선진국에 어느 수출상품보다 강렬하게 ‘한국’을 인식시켰다.
3. 장하성- 소액주주는 ‘왕’이다
누가 소액주주를 ‘봉’이라 했는가.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인 장하성(45)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미스터 소액주주’로 통한다. 재벌그룹, 특히 총수들이 꼽는 경계대상 1호이다. ‘대마불사’로 버티던 재벌과 정경유착 장본인들도 그가 이끄는 소액주주운동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제일은행 소액주주 61명으로부터 주주 권리를 위임받아 한보철강에 거액의 부실대출을 해준 전직 이사 4명을 대상으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 판결에서 지난 8월 승소했다. 올 3월엔 SK텔레콤이 부당내부거래 사실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사외이사 선임 등 소액주주의 요구사항을 모두 받아들였다. 삼성전자·현대중공업·(주)대우 등도 그의 감시를 받고 있다. 부실경영을 한 경영진 퇴진 및 재산적 손해배상. 정부의 재벌개혁안에 부족한 이런 책임경영 확산이 99년 장 교수의 소액주주운동 목표이다.
4. 박대운- 한국 장애인의 신화
피레네 산맥을 오르는 휠체어. 98년 우리에게 가장 가슴뭉클한 감동을 준 드라마는 현실 속에 있었다. 연세대 장애학생 박대운(27·신문방송2)씨의 ‘40일간의 유럽일주’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5살 때 교통사고로 두다리를 잃은 그는 지난 7월25일 독일 뒤셀도르프를 출발해 유럽 5개국을 무동력 휠체어로 횡단했다. 바퀴자국은 2002km나 이어졌다. 그가 2002년 월드컵을 홍보하기 위해 이 여행을 계획했을 때 성공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9월2일 종착지인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한 그에게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 온 유럽이 경의를 표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향하는 길목, 해발 1천m가 넘는 피레네 산맥 300km 구간을 통과한 박씨는 탈진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비맞은 듯 흐르는 땀방울도 이젠 솜사탕처럼 친근하다”던 그의 한마디 말은 올해 얼마나 많은 ‘정상인’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던가.
5. 신창원- 과연 잡힐 것인가
올해 나이트클럽의 웨이터 이름을 석권한 이는 단연 신창원이었다. 지난 97년 1월 탈옥한 신은 지난해 말부터 올해 7월까지 다섯 차례나 경찰과 맞부닥쳤으면서도 도주에 성공해, 15만 경찰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 됐다. 경찰의 다섯번째 검거망을 뚫은 지난 7월15일 이후 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찰 검거망을 피해 신출귀몰하게 도망다니는 그에게는 ‘신길동’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의 끝없는 도주로 차적조회, 검문검색, 잠복, 모의검거훈련 등에 시달리는 경찰의 처지는 고달프다. 대통령까지 “신창원을 하루 빨리 잡아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라”고 주문할 정도다. 그는 도주차량에 남겨둔 수기에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그대로 드러내, “간교하다”는 비난과 “불쌍하다”는 동정을 동시에 받았다. 15살 때 절도죄로 범죄자의 길에 들어서 ‘희대의 탈주범’에까지 이른 그의 행적과 그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90년대 후반 우리 사회의 한 자화상임에 분명하다.
6. 이헌재- 재벌개혁 야전사령관
올해 우리 경제의 최대 화두는 금융·재벌개혁이었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그 야전사령관 역할을 맡아 경제체질 개혁의 기틀을 잡았다는 평을 듣는다. 그 과정에서 해당 금융기관과 기업종사자들의 저항, 유력인사의 로비 등 갖가지 난관을 단호한 자세로 버텨나갔다. 5개 부실은행을 폐쇄해 ‘은행불사’의 신화를 깬 것을 비롯해 증권·종금·투신 등 문제가 드러난 금융기관을 과감히 정리했다. 또 상업은행과 한일은행 등 대형은행의 합병을 통해 선도은행을 탄생시켰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금융계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맞았다.
시중자금을 독식하면서 구조조정 요구에 저항하던 5대 재벌에는 회사채와 기업어음에 대한 규제로 퇴로를 차단하고, 선단식 경영풍토의 쇄신을 촉구했다. 야생마 같았던 재벌을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섞어가며 길들이는 데 성과를 거둔 것이다.
7. 이광모- 98년 한국영화의 행운
이광모(38·중앙대 영화과 교수) 감독은 첫눈에도 아주 반듯한 사람으로 보인다. 매너는 지극히 신사적이고 말투는 부드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영화적인 소신에 관한 한 눈꼽만큼의 융통성도 없는 사람이다. 연기자를 모아놓고 몇개월 동안 연기연습만 시키더니, 현장에선 한장면 당 촬영횟수 최고 38회를 기록할 정도로 끝없이 재촬영을 시도했고, 다 찍은 필름을 들고 6개월 넘게 다듬고 또 다듬었다. ‘98년 한국영화계 최고의 발견’ <아름다운 시절>은 이렇게 감독의 쇠심줄 같은 고집으로 완성됐다. 도쿄영화제 금상 등 국제영화제 수상 소식이 줄을 잇고, 뜻밖에 관객도 웬만한 상업영화 못지 않게 들어 이 진귀한 데뷔작을 축복했다. 이광모 감독은 영화가 예술이라는 고색창연한 신념을 한줌의 의심없이 붙들고 있는 희귀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등장은 98년 한국영화의 행운이기도 했다.
8. 구성애- 아, 성풍의 아우성!
총풍, 세풍에 이어 98년을 휩쓴 바람이 있다면 바로 ‘성풍(性風)’이다. 그리고 성풍의 한가운데에는 구성애(43·여)씨가 있었다. 올해 전국은 ‘구성애의 아우성’으로 아우성쳤다. 10년 이상 성교육 강사를 해오던 구씨는 올여름 MBC의 <10시 임성훈입니다>에서 처음으로 공중파 매체를 통해 성 강의를 했다. 주부들의 호응이 크자 MBC는 구씨가 직접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구성애의 아우성>이라는 특집을 기획했고, 이것이 방송 3사를 통틀어 비드라마 부문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등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구씨는 노골적인 표현으로 살을 붙이면서도 ‘쾌락과 사랑, 그리고 생명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진정한 성’이라는 자신의 논리를 뼈대로 유지해, 호기심 만족은 물론 교육적 효과도 적절히 발휘했다. 음담패설과 따분한 성교육이라는 괴리를 접목시키려는 구씨의 노력은 성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얘기하려는 ‘열린 성’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9. 권영해- 한 기회주의자의 초상
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북풍 행각은 마치 한편의 첩보영화를 보는 듯했다. 권 전 부장의 북풍 드라마는 검찰에 소환된 지 하루 만인 3월21일 자해소동을 벌이면서 절정에 달했다. 검찰에 출두할 때 성경책에 숨겨온 문구용 칼로 자신의 복부를 그은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의 총수를 지냈던 사람치고는 너무 초라한 말로였다. 검찰조사에서 권 전 부장은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를 비방한 윤홍준씨 기자회견의 작전명을 ‘아말렉’으로 명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구약성서를 토대로 권 전 부장은 자신을 모세로, ‘친북세력’(김대중 후보)은 모세 일행을 공격한 아말렉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을 책임진 공직자의 도착된 인식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하는 것이었다. 입원치료 뒤 4월3일 구속수감된 권 전 부장은 윤홍준 기자회견, 오익제 편지사건 등의 북풍 공작 이외에도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의 배후로도 의심받고 있다.
10. 김국진- 그가 있어 즐겁다
김국진(34)은 뼈가 얇은 사람이다. 손목 두께는 웬만한 사람 대보기가 두려울 정도고 허리에서 바지는 술렁술렁 빠진다. 하지만 일주일 빼곡이 채워진 일정을 평크없이 뛰어다니는 걸 보면 그의 ‘뼛심’은 대단하다. 그가 맡고있는 고정 프로만 세개다. 그것도 모두 시청률 10위권을 오르내리는 MBC의 간판오락프로들. <테마게임>은 생길 때부터 단 1회도 빠지지 않고 출연해왔고, 여기서 소화해낸 현대인의 페이소스는 코미디언 김국진에게 ‘연기자’라는 보너스를 안겨주었다. <일요일 일요일밤에>에서는 천재소년과 대결을 펼치고 있다. ‘감동없인 볼 수 없는’ <21세기위원회> 또한 그의 텃밭이다. 그의 인기에는 광고도 한몫했다. PCS 등 광고전이 치열할 경우 그의 힘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과외활동 또한 만만치않다. 그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뽑혀 활동하고 있으며, 캐릭터 사업도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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