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며칠전 일이다.

연신내 전철역에서 나와 기자촌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봄비가 제법 굵게 내린다.

비받이(우산)도 없으니 택시를 탈까? 아니다, 바로 조금 전에도 우리 연구소로 찾아온 젊은이들한테 “인내만이 희망으로 가는 열차”라고 하질 않았던가. 그런데 이까짓 비쯤이야 하고 기다리는데 금새 두루마기 자락이 흠뻑 젖으며 오한이 오고 재채기까지 나온다.

이때 어느 허름한 노점상 할머니 하나가 느닷없이 다가와 비닐봉지를 쥐어주며 하시는 말씀이다.

“아니, 점잖은 어르신네가 그렇게 비를 맞으면 쓰간디? 자, 이거나 가져다 자시우”

무엇일까 펼쳐보니 비에 젖은 날 오이 서 너 개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스치며 저만치 가고 있는 할머니를 향해 “뭘 이런걸 다 주십니까? 고맙습니다, 할머니”하고 인사를 했더니 힐끗 뒤돌아보시던 할머니가 뒤뚱뒤뚱 다시 다가와 마치 평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귀엣말을 한다.

“공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손자녀석이 늘 선생님 이야기를 하곤 했다우” 그러면서 빗속을 헤쳐 가신다. 이때 마침 버스가 와 얼결에 몸을 싣고 돌아오며 나는 공주? 하고 옛 추억을 더듬었다.

저 할머니가 공주근방 사람이라고 하면 혹시 그때 그 아주머니가 아닐까?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지난 70년대초 이른 겨울로 돌아간다. 그때 나는 몇 개월 동안 박정희 군사독재에 쫓기는 몸이 되어 충청도 마곡사로 숨어든 까닭이 있었다. 우선 돈이 떨어져 내려갔었다. 왜냐, 마곡사라고 하면 지난날 백범 김구선생이 왜군 중위 토전(土田)을 맨손으로 때려죽이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옥, 얼마동안 숨어 계시던 곳이므로 며칠동안 밥이야 못 얻어먹으랴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주지스님한테 지난날 백범 김구선생이 머물던 방안을 물어 들어가 앉는데 까지는 성공을 했다. 그런데 거기서 잠을 자는 것은 허락을 받지를 못했다. 이때 나는 백범 김구선생에 관해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 역사적 상상력을 더듬는데 필요하다고 간곡히 부탁을 했는데도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로 발길을 옮겨야 한단 말인가. 날은 저물고 마침 첫눈은 펄펄 나리고. 나를 도와 같이 온 방배추 한기찬군과 함께 어철어철 마곡사를 빠져 나왔건만 갈 데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마곡사에 밤이 내리면 도통 차편이라는 것이 없었다. 또 여관이라는 데도 없는 그야말로 한적한 산사라, 분위기는 좋았지만 도망자에겐 난처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마침 여인숙 비슷한 이응집(초가집)이 하나 있어 우리들은 무조건 눈을 털고 들어갔다.

방 값이야 어찌되었던 몸이나 풀고 보자고. 그러나 도망자에겐 반드시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여차하면 들고 튈 수 있는 통로를 미리 더듬어 두는 일이다. 그래서 뒷문을 열고 본즉 이게 웬 행운이던가. 김장을 하느라 무채를 썰다 남은 무쪼가리가 한 소쿠리 잔뜩 처마 밑에서 눈을 맞고 있질 않는가.

이에 우리들은 있는 대로 털어 막걸리 한 되를 사다 놓고선 그 많은 무를 와작와작 다 해치우고 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때문에 두 가지 묘한 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나는 그 많은 무로 뱃속을 꽉꽉 눌러 채웠건만 배는 더 고파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무로 채운 다음에 방귀는 밑으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입으로도 한없이 나오던 그 쓰라림.

이 때문에 우리들은 그 살란한 밤새 험한 꿈도 한 번 못 꿔보며 뒤채기만 했다.

하지만 날이 밝아오자 우리들의 아침은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시키지도 않은 아침상이 들어 온 것이다. 그 위엔 기름이 찰찰 흐르는 나까리밥(고봉밥)이 올라 있고 구수한 시래기국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침상. 그리고도 또 들어 왔다. 따끈한 숭늉을 들고 들어온 사십줄에 들어 선 듯한 그 집 아주머니가 빙그레 웃더니만

그냥 나가신다.

도대체 어쩐 일이었을까. 사태는 뻔한 것이었다. 우리들의 방과 그 집 안방 사이는 겨우 엷은 흙벽하나 사이라, 아마도 밤새 와작와작 무 씹는 소리에 그 아주머니도 잠을 설쳤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밥값도 없고 방 값도 없는지라 차고 있던 낡은 시계를 풀어 주었더니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선 “어디를 가는지는 몰라도 험한 길 살펴가라고”고 하던 그 아주머니. 그 뒤 박정희의 폭압 기구에 잡혀가 그 모진 닦달을 받으면서도 그 이름 모를 아주머니를 어찌 잊을 수가 있었으랴.

미안한 마음에 견디다 못한 나는 지난 82년 정호경 신부의 안내로 우리집사람과 함께 다시 십여년 만에 마곡사 근처의 그 집을 찾았다. 만나면 우선 힘껏 껴안아 주리라고. 하지만 그 집은 오간 데가 없어지고 낯모를 술집과 여관들만 가득해 그냥 돌아온 다음에도 그 아주머니의 평안을 빌어 오고 있는 처지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얼마전 비에 젖고 있는 나에게 오이 세 개를 쥐어 준 바로 그 할머니가 아닐까.

나는 조바심이 나 연신내 길바닥을 뒤졌다. 그렇건만 그 할머니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도 중단하질 않고 채알집(포장마차) 마다 찾아 다녔더니만 그 할머니는 벌써 얼마 전에 단속에 밀려났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독한 쐬주를 거퍼 마시며 생각했다.

그렇게도 마음씨 고운 할머니가 노점상을 할 한 뺨의 터도 용납되지 않는 거리라면 이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있는 공간이란 말인가.

아니 나라는 사람은 여태껏 도대체 무엇을 해온 사람이란 말인가.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는 깊어 가는 밤거리에서 독한 술을 거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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