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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중 회장 환영 캐리커쳐, 자세히 보면 '경제'를 발로 밟고 오고 있다 [출처: 하이대우 홈페이지] |
115주년 노동절이던 지난 5월 1일, 서울 정동에 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일군의 386 운동권들이 모였다. 이들은 ‘세계 경영 포럼’ 이라는 새로운 모임을 발족시켰는데 당초 이 모임의 이름은 '김우중과 한국경제를 생각하는 대우인 모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상징적인 날에 상징적인 장소에서 그 상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모임을 발족시킨 이들은 “세계경영포럼은 과거 김우중 전 회장이 주창했던 ‘세계경영’의 정신을 이어받아 386 운동권 출신들이 대우그룹에서 체험했던 역동적 기업가 정신과 비전을 이 시대의 새로운 화두로 제기하기 위해 결성됐다”고 모임의 이유를 밝혔다.
95년, 운동권 100명 특채한 김우중
그런데 세계경영포럼이 결성되기 10년 전인 지난 1995년, 대우그룹은 특채로 100명에 가까운 운동권들을 뽑았다. 대우에 의해 선발된 운동권들은 노동운동가, 고시생, 학원강사 등의 다양한 신분을 지녔으나 선발 자중 90% 이상은 서울대 출신의 30대 초반(당시 나이) 남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었다. 또한 이들이 ‘운동권 출신’ 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우그룹 특채 당시 현장활동을 하고 있던 사람은 6명이라는 사실이 추후 알려지기도 했다.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과의 직접 면접을 거쳐 선발된 이들은 운동 경력까지 인정 받아 경력사원 대우를 받으며 입사했고 주력 계열사로 배치됐다. 특히 당시 대우그룹 전체가 사활을 걸다시피 한 대우자동차에 60여명이 집중 배치됐다.
‘운동권 선발’이 일단락 되어 계열사로 배치된 직후인 1995년 6월21일, 그 해 특채된 대우 신입사원 수십명이 해외 연수를 위해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당시로는 이례적으로 신입사원들에게 17개국을 돌아보는 35박 36일간의 장기 해외 연수를 실시한 대우그룹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고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운동권 출신 특채자들은 입을 모아 ‘사회주의 국가가 준 실망감이 너무 크다’ ‘대우그룹의 세계 경영에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특채 당시부터 ‘노사문제 해결을 위해 운동권들을 뽑은 것’ ‘김우중 회장이 정계로 뛰어들기 위한 사전포석’ ‘서울대 출신들을 골라 뽑은 것’이라는 해석들이 나왔으나 대우그룹 측은 “세계 경영과 그룹 개혁을 위해 도전적이고 희생정신이 강한 운동권을 선택한 것”이라고 특채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특채자 '중용‘보도 넘쳐났으나 실체는 아리송
이후 특채자들은 대우그룹으로부터 ‘중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6월 대우자동차 부평 본사에는 ‘세계경영기획팀’이라는 TFT(Task Force Team)이 꾸려졌다. 김태구 당시 대우자동차 회장의 지시로 구성된 이 팀은 전원 ‘운동권 특채자’로 구성됐고 이들은 김태구 회장에게 자신들의 활동 내역을 직접 보고 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이 밖에 남들이 근무를 기피하는 동구권이나 오지 국가의 현지 공장에 자원해 근무하며 ‘세계경영의 전사’가 되고 있다, 생산 현장에서도 생산직 직원과 융화를 잘하고 있다는 등의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96년 말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로 촉발된 97년 초의 총파업 정국에서 이들은 ‘날치기 통과는 정권이 저지른 불법이고 악법은 개정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중대한 시기에 있는 만큼 총파업 합류는 신중해야 한다’는 충정어린 유인물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운동권 특채’를 통해 기업문화를 바꾼다던 야심찬 공언과 별개로 대우는 부실과 분식을 통해 1998년 하반기부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분식, 부실, 워크아웃, 법정관리등 대우가 몰락해 가는 뉴스가 전해지는 동안 ‘운동권 특채자’들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진가는 대우 몰락 이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우 해체 이후 오히려 진가 발휘 시작한 특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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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게시판에는 김우중 전회장에 대한 칭송글이 넘쳐나고 있다 [출처: 하이대우 홈페이지] |
또한 과거의 특기를 살려 전방위적 이데올로기 공세에 나섰다. 지난 2001년, 특채자 출신 김대호 당시 대우자동차 선임과장은 ‘대우자동차 하나 못 살리는 나라’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출간해 해외 매각을 반대하던 노조와 대우에 금융지원을 더 많이 못한 정부를 싸잡아 비판하고 나섰다.
두 차례 징역을 살고 5년간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했다던 김대호 ‘대우자동차 과장’은 이후 ‘한 386의 사상혁명’ 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을 발표해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도 한 그는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월간조선등에 글을 기고하며 자유기고가라는 레테르를 달았다.
대우가 완전 공중 분해된 1999년 11월 이후 각계에 흩어져 있던 이들이 조직적으로 집결해 김우중 맞이 분위기 조성에 나선 것이 바로 ‘세계경영포럼’이라는 지적이다.
운동권 특채 그 후 십년, 김우중 입장으로서는 남는 장사
특채자 가운데 서울대 서양사학과 81학번으로 대우그룹 입사 후 대우자동차 우크라이나 주재원을 거쳐 핵심부서인 대우자동차 세계경영기획팀의 팀장을 맡았던 김윤 경영발전연구센터 대표는 세계경영포럼의 대표를 맡았다.
정인주라는 필명으로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라는 소설을 1992년 발표해 제3회 임수경 통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서울대 철학과 83학번 정필완은 대우 특채 직후 줄곧 구조조정본부에서 일하다 2000년 퇴직했다. 현재 인터넷 쇼핑몰의 대표이사를 지내고 있는 그는 세계경영포럼에서 실무를 총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의 전방위적 노력 탓인지 작년에는 김우중 전 회장을 모델로 한 ‘잃어버린 영웅’이라는 전기적 소설까지 출간되기도 했고 ‘한국인들에게 잃어버린 꿈을 찾아 주기 위해’ 이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5년 8개월 간의 해외 도피 이후 우여곡절 끝에 김우중 전 회장은 결국 귀국했고 실제 처벌을 받게 될 지는 미지수지만 최소한 법정에는 서게 되고 치열한 여론공방이 벌어질 것은 확실시 된다.
95년 특채한 운동권들이 대우그룹의 몰락을 늦추는데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우 해체 이후 김우중 방어 전선에서는 큰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이고 향후 여론전을 위한 이들의 준비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김우중 전 회장 입장에서는 이 정도 까지만 해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 않냐는 평가가 나올 법 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