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교인 남강 이승훈과 남궁억을 논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김유정과 이상을 다루었다. 진보적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김수영과 신동엽의 생애를 비교했다.
여기까지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내공 있던 출판사 뿌리깊은나무가 32년 전에 내놓은 <이 땅의 이 사람들>에서 다루는 해방 전후사의 주요 인물들은 지금 와서 보면 별 주목을 끌지 못한다. 초등학생을 위한 위인전 수준을 맴돌 뿐이다. 그러나 전직(前職) 승려 고은 등 21명의 필자는 흥미롭다. 언론인 장지연과 이상재를 다룬 정진석 전 교수는 보수언론학자다. 최익현을 다룬 고 김의환 선생은 1974년 10년을 발로 뛰어다니며 현장취재해 쓴 <전봉준 전기>에서 동학을 최초로 ‘혁명’으로 명명했던 학자다. 재야 친일연구가였던 고 임종국 선생이 나혜석과 김일엽이란 두 여성을 다룬 점은 의외다. 향토사학자 이이화는 민영환과 송병준을 다루었다. 고은은 전직에 맞게 효봉과 동산 스님을 논했다.
송건호는 최남선을 다루면서 객관적 사실로만 비판한다. 최남선이 1920년 조선 동아와 함께 3대 민간지로 출발한 ‘시대일보’를 창간하면서 식민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회사(이하 동척)에서 3만원을 융자받았다. 최남선은 뇌물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동척에 자기 책을 맡겼지만 조선총독부는 책을 되돌려 주는 것은 물론이고 데리고 살 기생 한 명과 서울 우이동에 땅까지 내주었다. 언론인답게 최남선의 문학 보다는 언론인 최남선의 부조리를 되짚었다. 최남선이 1938년 만주 건국대 교수가 된 사실보다 만주의 친일신문 만몽일보 사장이 된 점을 지적했다.
32년 전 이 책이 나왔을 땐 신진에 가까웠던 21명의 젊은 지식인들이 지금에 와서 어떻게 서로 다른 길로 변해갔는지 살펴보고는 것도 재미있다.
고은이 쓴 고승 이효봉과 하동산
고은은 “이효봉(1888-1966) 스님은 평양 양덕서 태어나 일제 때 판사를 지내다가 사형언도를 한 뒤 그 사실이 괴로워 불교에 귀의했다. 금강산 온정리에서 지냈고 통영 미륵사를 창건했다. 1963년엔 대구 동화사로 옮겼다. 1966년 밀양 효충사에서 죽었다. 하동산(1890-1965)은 단양에서 태어나 약학을 공부하다가 범어사에서 주로 살았다”고 했다.
얼마 전 죽은 법정 스님이 처음 불교에 귀의한 곳이 효봉 스님이 만든 통영 미륵사이고, 공부한 곳이 동산 스님이 있던 범어사였다.
최정호가 쓴 서재필과 주시경
보수적 언론인 겸 교수 최정호는 서재필을 칭송하면서 “일본에서 10대의 서재필이 국가를 배웠다면, 미국에서 20대의 서재필은 ‘인민’을, ‘민중’을 발견하고 우리나라에 돌아왔다”고 말했다. 나는 최정호에게 묻는다. “그럼 서재필은 자기가 태어난 조선에서 배운 건 뭐지?”
염무웅이 말한 젊은 시인들
염무웅은 시인 김수영과 신동엽을 논한 글의 맨 끝에 “고은 신경림 조태일 김지하 등 젊은 시인들이 오늘날 이 시대가 부과한 문학적 사명을 이만큼이나마 수행하게 된 것은 오직 김수영과 신동엽 두 시인들의 선구적 작업 위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염무웅이 말한 ‘시대가 부과한 문학적 사명을 수행한다는 젊은 시인들’은 다 어디로 갔나. 고은은 민음사 등 출판사를 들락거린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4대문 안의 술집에서 난장을 까다가 대학교수와 결혼하고 호젓하게 전원생활을 꾸리고 있다. 김지하는 염무웅이 말한 문학적 사명을 역으로 수행하고 있다.
서광운 한국일보 과학부장이 쓴 우장춘
우장춘(1898-1959)은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 우범선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 중 한명이었다. 서광운 부장은 이 부분을 이렇게 썼다. “아버지 우범선은 한말에 훈련대 대대장을 지내다 민비 암살에 말려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서광운은 “암살에 ‘말려’”라는 매우 소극적인 언어로 우범선을 감싸고 있다. 그러나 우범선은 조선의 궁궐을 지키는 훈련대 소속이면서도 일본 낭인과 내통한 반역자로 시해에 적극 가담했다. 다시 서광운은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썼다. 우범선은 망명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뒤 국외로 도망간 거다. 우범선은 특별히 개화파도 아니었다. 따라서 심오한 철학 때문에 시해에 가담한 게 아니다. 특별히 우범선이 도망간 동경에서 신학문을 배웠다는 기록도 없다. 그저 동경에서 지내면서 개화파 망명객들과 어울리다 사카이라는 일본 여자와 혼인했다. 그래서 일본서 낳은 게 우장춘이다.
우범선은 아들 우장춘이 4살 때 죽었다. 서광운은 이 부분을 “조선에서 보낸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됐다. 일본인 어머니와 우장춘은 가시밭길을 걸었다”고 썼다. 여기서도 ‘암살’은 ‘처결’로 바꿔 써야 맞다. 다시 서광운은 “우장춘은 1950년 3월8일 환국했다. 뜻있는 사람들이 ‘우장춘 박사 환국 촉진회’를 결성해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그의 귀국을 진정했다”고 썼다. ‘뜻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