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산 조봉암 (이영석, 원음출판사, 1983.8.30, 294쪽) |
죽산은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사회주의 사상으로 흘러 조선공산당 창당의 산파 역할을 했다. 조봉암은 1920년대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이자 지도자였다. 그 때문에 7년의 옥고도 치렀다. 죽산은 8.15와 함께 공산주의를 청산했다. 그는 공산당과 대결해 싸웠고 건국에 헌신했다. 그는 초대 농림장관이었고 2대 국회부의장이었다. 50년대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박사와 대결했다. 죽산은 50년대 이 나라 진보세력을 대표했다. 따라서 보수진영에겐 위협이었다.
변절한 지식인 조봉암
죽산의 옛 동료들은 그의 1948년 제헌의회 당선을 배신으로 해석했다. 이승만 첫 정부에 가장 중요한 직책 중 하나였던 농림부장관이 되면서 조봉암은 본격적으로 변절의 길을 걸었다. 1958년과 1959년 국회의원 조봉암이 당시 국회내 양심적 보수주의자들이 내건 평화통일안과 미군철수안(외군철수안) 파동 때 보여준 반동적 언사는 익히 알려져 있다.
워낙 당시 정세가 어두웠기에 이승만의 정치적 숙청에 불과했던 그의 사형을 민주투사의 죽음으로 미화, 찬양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저자 이영석이 쓴 이 책은 전적으로 죽산 조봉암에게 유리하게 기록된 일종의 전기문이다.
비극의 뿌리, 조선공산당
이 책은 1950년대 말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재판 기록과 함께 1920년대 조선공산당 창당의 뒷얘기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 결합돼 있다. 전자는 이 책 1부 ‘정치공작 그 수수께끼’와 3부 ‘사신의 그림자’, 4부 ‘형장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에 해당한다.
후자 조선공산당의 창당 전후 얘기는 이 책 2부 ‘비극의 뿌리 조선공산당’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1920년대 조선공산당을 바로 보기란 쉽지 않다. 결국엔 여러 책을 섭렵할 수밖에 없다. 이 책 2부는 조봉암의 시각에서 본 조선공산당 초기 역사다. 여러분은 일제 때 기생집에서 즐겨 요리 파티를 벌이던 공산주의 세력을 여기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조선공산당 창당 전후를 다룬 제2부 ‘비극의 뿌리, 조선공산당’만 따로 떼 내 소개한다. 나머지 50년대말 조봉암을 죽음으로 이끈 진보당 얘기는 1주일 뒤 소개하기로 한다.
신사조의 물결
죽산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왜 공산당을 했는가는 질문에 “일제 때 독립운동하는데 공산당과 같은 강력한 조직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소련의 원조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답했다.
죽산은 1898년 경기 강화의 농가에서 태어나 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나와 잠시 강화군청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신학문을 동경해 서울 와서 YMCA중학부에 들어갔다가 1919년 3.1운동때 고향에서 농민봉기를 시도했다. 이때 서대문감옥살이를 했다. 출옥 뒤 일본에 가서 1920년 일본 중앙대 정경학부에서 ML주의로 기울어갔다. 첫 죽산의 사회주의 서클은 흑도회다. 흑도회보다 먼저 김찬 김약수 박열 등이 만든 조선고학생동우회도 있었다. 1921년 1월 조선일보엔 조선고학생동우회가 <전국 노동자에 고함>이란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에선 “노동대학을 설립하고 잡지 ‘노동’을 발행, 노동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했다. 선언에 서명자는 김약수 김사국 박열 원종린 등 12명이다.
1921년 11월 29일 조선고학생동우회가 중심이 돼 흑도회를 만들었다. 조봉암도 원종린 김약수 등과 함께 흑도회 중심이 됐다. 흑도회는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 연합단체였다. 그러나 한 달만에 분열했다.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는 흑도회를 조직해 나갔고 사회주의는 흑도회를 해체한 뒤 고학생동우회로 돌아왔다.
주의자 단체의 홍수시대
조봉암은 김약수 정재달과 함께 고학생동우회의 무대를 서울로 옮겼다. 22년 1월 김윤식의 장례를 둘러싸고 양파는 충돌했다. 김윤식은 일본 병합 뒤 원로대신으로 일본 자직을 받고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다. 그러나 김윤식은 3.1운동때 독립청원을 내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일본은 자직을 몰수했다. 김윤식이 죽자 송진우 김성수 등은 사회장을 준비했다. 청년연합회 장덕수 등 우파는 호응했다. 동아일보 주필이던 장덕수는 22년 1월 동아일보 지면에 김윤식의 사회장을 역설했다. 김사국 이영 등 좌파는 김윤식이 국적이라고 비판했다.
‘사기공산당’ 사건이 터졌다. 상해파 공산당 이동휘가 코민테른에서 받은 공작금 40만원 중 일부를 조선청년연합회 간부에게 전했다. 4만원 넘는 돈이었다. 받은 장덕수는 공산당 조직은 물론 연합회 조직에도 쓰지 않고 자기네 그룹의 문화사업에 써버렸다. 김사국 등 좌파는 22년 4월 조선청년연합회 집회에서 이 사건을 폭로하고 장덕수 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좌파는 소수였다. 좌파는 18개 단체를 이끌고 연합회를 탈퇴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를 장악했다. 뒷날 경성콤의 모체였다.
경성콤그룹의 리더 김사국은 여성운동가 박원희와 결혼했다. 조봉암도 일본 중앙대를 중퇴하고 서울로 와 22년 11월 쉐르헤네우진스크에서 열린 해외파 고려공산당 대회에 국내파를 대표해 참가했다.
600명의 독립운동가를 죽인 파벌 싸움
일제 때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파쟁에서 시작돼 파쟁으로 침몰했다. 최초의 조직은 1918년 1월 김철훈이 이르쿠츠크에서 조직한 이르쿠츠크 공산당 조선지부와 1918년 6월 이동휘 박진순 등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직한 한인사회당 두 갈래였다. 이동휘는 소련 지원때문이지 사회주의 이념이 투철해서가 아니었다. 코민테른은 한인사회당을 조선의 유일한 사회당으로 승인했다. 한인사회당의 이동휘는 상해 임정 국무총리직을 맡았다. 한인사회당의 박진순이 상해로 가려고 이르쿠츠크를 경유할 때 코민테른 지원금을 이르쿠츠크파에게 빼앗겼다.
1921년 1월 이동휘는 한인사회당 대회를 상해에서 소집하고 고려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결당이다. 이 당에는 이동휘 여운형 박진순 김만겸이 참여했다. 특히 일찍부터 볼세비키와 연결됐던 김만겸이 참여해 공산당 색깔이 강해졌다. 박진순은 40만 루불을 되찾아 그해 7월 치타를 거쳐 상해로 돌아왔다.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선 이 돈을 놓고 독립운동자금이니, 공산당 조직자금이나 하면서 싸웠다. 이동휘 계열은 폭넓게 사용했다. 국내 활동을 도우려 조선청년연합회 장덕수에게 8만원을 보냈다. 이르쿠츠크파의 또 하나의 횡포에 마주쳤다. 이동휘의 부대가 간도의 훈춘에 있다가 일본군에 밀려 3천명이 무장으로 소련령 이반으로 이동했다. 이르쿠츠크파는 이들 독립군을 자기들 무장조직인 군정의회 산하에 두려했다. 말을 안 듣자 강제로 무장해제 시켰다.
이때 6백여명의 독립군이 살해당했다. 1400명은 구금됐다가 러시아 적군에 편입됐다. 탈출에 성공한 다른 1000명은 이동휘파에 재집결했다. 이동휘는 대노했다. 고려공산당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의 화합할 수 없는 대결이 됐다. 이동휘는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임정 총리직을 내놓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험한 육로를 거쳐 들어갔다. 이동휘는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만났다. 이동휘는 40만 루블, 독립군 살해사건을 얘기하면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을 고발했다. 코민테른은 중재안을 냈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 대회를 열었다.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이탈한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이탈한 여운형 안병찬 김만겸 등이 참여했다. 새로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고 유일한 정통 고려공산당임을 선언했다.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재출발이면서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들은 상해지부에 김만겸 여운형을 보냈다. 김만겸은 볼세비키 집단의 조직훈련도 받은 공산주의자였다. 김만겸은 당시 상해에 사회과학연구소란 간판을 내걸고 상해 망명객들을 포섭했다.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 최창식 등 젊은이가 공산당과 연결된 것도 바로 김만겸의 사회과학연구소였다.
지노비예프, 레닌, 트로츠키와 함께 했지만
1921년 가을 코민테른은 극동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실제 1922년 1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참가국은 한국 중국 일본 몽고 자바 등이었다. 여운형을 단장으로 한 공산당계로 이동휘 박진순 장건상 최창식 장덕수, 공산청년단체로 박헌영 김단야 김원근, 민족진영에서 김규식 등, 여성대표로 김지도 권애라 김덕영 등 모두 52명이었다. 전체 140명 가운데 1/3 넘게 한국대표단이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물거품 된 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약소민족해방을 내건 코민테른에 기대를 걸었다. 한국대표단은 1921년 12월 열차로 이르쿠츠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대회는 1922년 1월 21일 열려 2월 23일 폐막됐다. 최종 회의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12일동안 계속됐다. 코민테른 중집위원장 지노비에프가 주재했다. 레닌도 축하연설했다. 트로츠키, 부하린, 카메네프도 왔다.
코민테른은 이 회의에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불화를 조정하려 했다. 상해파 이동휘, 이르쿠츠크파 김만경 장건상, 국내파 정재달 조봉암이 나왔다. 처음부터 국내에서 온 대의원 자격으로 분쟁했다. 국내에서 온 정재달은 이르쿠츠크파에 붙어 국내파의 무자격을 역설하는 등 뒤죽박죽이었다. 이르쿠츠크파 대표는 대회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상해파만 남아 대회를 강행했다. 코민테른은 이동휘와 김만겸 조봉암 정재달을 모스크바로 불러 최후 조정했지만 실패했다. 조봉암은 중립적이었다. 대회를 일방 강행한 상해파 승인도 옳지않다고 증언했다.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국의 공산주의>)
누구도 사회주의를 몰랐다.
부하린은 “당신들 모두 똑 같소. 당신들 누구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진실을 알지 못하오. 당신들은 그저 독립운동에 종사할 뿐이오. 당신들 차이를 스스로 조종해 통합하시오”라고 말했다. 코민테른은 ‘1국1당 원칙’을 적용해 두 고려공산당 모두를 해산하고 새 조선공산당 조직을 지시했다. 이때 조봉암은 모스크바에 머물며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에 들어가 공산당 요원으로 훈련받았다.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 건설을 위해 극동총국 안에 코리아뷰로를 설치했다. 일본이나 중국국이 없는데 비해 유독 고려국이 있는 건 조선공산당의 논쟁 때문이다. 고려국 집행위원은 상해파 이동휘와 이르쿠츠크파의 김만겸 장건상이었고 의장은 보이친스키, 고문은 정재달이었다. 파쟁하는 두 그룹의 혼합이었다.
고려국은 조선공산당 준비에 정재달을 파견했다. 정재달은 23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23년 6월 서울에 들어와 북성회의 김약수, 서울청년회의 김사국, 신사상연구회의 조봉암 등을 널리 만나 조선공산당 창당방침을 전했다. 국내파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서울은 북서오히, 서울청년회, 신사상연구회 3조직이 공산주의 주도권을 싸고 치열하게 싸웠다. 정재달은 스파이라는 인식공격도 받고 조선노동공제회 간부 차금봉(車今奉)에게 테러도 당한 뒤 23년 10월 철수해버린다.
고려국은 다시 이르쿠츠크파의 김재봉 신철을 국내로 파견했다. 둘은 23년 4월 서울에 들어와 신사상연구회 김찬과 만나 23년 6월 서울청년회만 따돌린 코리아뷰로 국내부를 조직한다. 이들은 집행부서를 만들고 시대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에 세포를 만든다. 코리아 뷰로가 또 파쟁에 빠졌다. 상해파는 반발했다. 서울청년회도 반발했다. 코민테른은 이 분쟁에서 이르쿠츠크파가 더 충성스럽다고 해 두둔하고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이동휘를 경계했다. 코민테른은 말썽많은 코리아뷰로를 해체하고 새 조직국을 설치했다. 조직국은 24년 6월 다시 정재달을 서울에 밀파했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체포되는 바람에 조직국도 해체됐다.
코민테른을 향한 질주
조봉암이 모스크바에서 서울로 돌아온 건 김재봉이 서울로 파견 가던 시기였다. 조봉암의 국내 잠입도 공산당 창당이었다.
국내에서 맨 처음 사회주의 계열은 세칭 ①‘서울그룹’이다. 조선청년연합회 산하 서울청년회가 김윤식의 장례문제로 대립해 장덕수파와 사회주의파가 갈라진 바로 그때 서울청년회를 장악해 이탈한 게 ‘서울그룹’이다. 서울그룹의 중심인물은 김사국 이영 정백 최창익 차금봉 이성태 등이다.
또다른 그룹은 ②‘북풍회’다. 23년 1월 15일 동경서 김약수 등 10여명이 북성회를 조직해 흑도회로 확대했다. 북성회의 국내본부가 ‘북풍회’다. 제3의 조직은 23년 7월7일 서울서 홍명희 김찬 등이 조직한 ③‘신사상연구회’다. 조봉암은 이 북풍회 소속이면서도 신사상연구회도 관여했다.
북풍회와 신사상연구회 등이 합치면서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라서 ‘화요회’로 발전했다. 곧바로 다른 그룹이 생겼다. 동경에 있던 김세연 한위건 등의 ‘북성회’가 ‘1월회’로 바꾸고 기구도 개편했다. ‘1월회’는 3차 공산당의 중심세력이 된다.
조봉암이 참여한 신사상연구회는 1923년 7월7일 홍명희 김찬 등이 조직한 단체다. 홍명희는 해방이후 평양에 남아 공산당 요직을 지낸다. 김찬의 주도로 공산주의 조직으로 변해갔다. 1924년 11월19일 이 연구회는 화요회로 바꾸고 연구단체에서 행동단체로 전환한다. 조봉암은 상해에서 국내로 들어오다 잡혀 감옥살이를 하다 화요회 출범때 막 석방된 임원근 김단야와 함께 한발 늦게 화요회원이 된다. 조봉암과 박헌영은 여기서 처음 만났다. 이후 조봉암과 박헌영은 해방이후 숙명적 대결을 벌인다.
박헌영은 1915년 충남 대흥보통학교를 나와 경성고보를 나와 이승만처럼 YMCA 영어반에서 1년 영어공부를 했다. 박헌영의 희망은 미국유학이었다. 미국에 못간 대신 1920년 9월 일본으로 갔다가 학비가 비싸, 상해로 갔다. 상해의 프랑스 조계로 갔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기독교청년회의 부설강습소에서 영어공부를 했다. 박헌영은 안병찬이 만든 상해 사회주의연구소에 들어갔다. 21년 7월 고려공산당의 안병찬이 만든 사회주의연구소는 학비를 보조했다. 박헌영은 21년 상해로 나와 피아노 공부하던 주세죽과 결혼했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임원근을 만났다. 임원근은 선린상고 나와 일본 경응대 2년 중퇴하고 상해에 있었다. 임원근은 김만겸의 사회과학연구소에 나갔다. 박헌영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참여했다. 1922년 박헌영 등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공산청년동맹의 대표로 참석했다. 21년 1월18일 박헌영은 형기를 마치고 나왔다. 박헌영의 출감은 조봉암이 동방노력자공산대를 마치고 귀국한 시기와 비슷하다. 김만겸은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3명에게 국내 잠입을 지령했다. 셋은 1922년 봄 상해를 떠났다.
조봉암과 김조이, 박헌영과 주세죽
조봉암은 국내로 돌아와 여성운동가 김조이를 사귀었다. 조봉암은 고향에서 소년시절 다정히 지낸 김이옥이 있었는데 고향 집의 형편 차이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조봉암이 김조이와 결혼한 것은 1924년 쯤으로 보인다. 주세죽과 김조이 모두 24년 5월 만든 조선여성동우회에서 일한다. 이 조직도 내부파벌투쟁을 벌이는데 서울파 김사국의 부인 박원희와 화요회의 임원근의 부인 허정숙,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 간의 분파투쟁이었다. 여성운동에서도 화요회가 우위였다. 박헌영이 처 주세죽, 임원근의 처 허정숙, 김단야의 애인 고명자, 조봉암의 처 김조이가 모두 화요회파였다. 반대편 서울파는 김사국의 아내 박원희였다. 남편들의 파벌이 그대로 여성운동에도 번졌다. 여성 화요회는 25년 1월18일 좌파 중심으로 경성여성청년동맹을 만든다. 박원희도 한 달 뒤 25년 2월21일 경성여자청년회를 만든다. 두 그룹은 치열하게 쟁탈전을 벌였다.
25년 11월 주세죽은 남편 박헌영이 신의주 사건으로 잡혀 옥바라지에 생활까지 꾸렸다. 당시 김조이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갔다. 그래서 좌파 여성운동은 25년을 고비로 사라진다.
화요회 시절 조봉암은 대단한 활동을 보였다. 신흥청년회는 1929년 2월11일 결성한다. 신흥청년회는 화요회, 김약수의 북성회, 신백우의 무산자동맹 등의 연합이었다. 다만, 김사국 이영 차금봉의 서울청년회는 빠졌다. 서울청년회는 경성콤 그룹으로 불리며 훗날 공산당 주류가 됐다.
신흥청년회와 서울청년회가 통합해 1924년 4월12일 ‘조선청년총동맹’을 창립한다. 이 조직에서 조봉암은 김단야 등과 함께 중집위원이 된다. 박헌영 등은 중앙심사위원이었다. 내부엔 치열한 주도권 싸움이 있었다. 조봉암과 박헌영은 화요회의 중심인물로 이 조직에선 굳게 손잡았다. 당시 조봉암은 조선일보 기자였다. 다른 몇 잡지도 관계했다. 조봉암은 언론계 좌파포섭에 주력했다. 박헌영은 1924년 4월15일 동아일보에 입사한다. 송진우가 사장에서 물러나고 허헌이 동아일보 사장때였다. 허헌이 박을 채용했다. 박헌영은 1924년 9월 조선일보로 옮겼다. 조선일보는 친일단체 일진회 회장 송병준의 것이었는데 화요회 홍승식이 신석우의 부친을 설득해 회사를 샀다. 그때 사장은 이상재였고 홍증식은 영업국장이었다. 조선일보 사회부에는 조봉암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지방부엔 홍남표, 논설반엔 김준연 신일용 등 사회주의 청년그룹이 많았다.
적기사건
24년 국내 좌파에겐 공산당 발족의 결정적 시기였다. 코민테른 극독총국의 코리아뷰로는 이르쿠츠크와 상해파의 끝없는 파벌경쟁에 난처했다. 코민테른은 이르쿠츠크파쪽으로 기울었다. 국내는 좌파그룹이 난마처럼 얼켰다. 이들의 경쟁은 이념이나 가치관 차이가 아니었다. 조선공산당이란 열매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코민테른의 지원은 돈과 무기와 국제후원 등 거대한 백그라운드였다. 코민테른 코리아뷰로에서 밀파된 김재봉, 모스크바에서 밀파한 조봉암, 고려공산단 상해지부 김만겸이 파견한 박헌영 그룹이 손을 잡았다. 김은군 이영 차금봉 등 서울그룹은 여기서 제외됐다. 서울그룹은 1924년 10월 서울콤뮤니스트그룹, 세칭 경성콤을 결성했다.
화요회는 김재봉 조봉암 박헌영을 중심으로 서울그룹을 뺀 사회주의 계열을 묶어 창당에 박차를 가했다. 화요회 주도로 1925년 4월 20일 오전 10시 곡천정 공회당(지금의 소공동 상공회의소) 자리에서 열기로 했다. 그러나 25년 4월 19일 밤 9시 준비위원 조봉암은 종로서 고등계에 연행됐다. 경찰은 대회 취소를 명령했다. 20일 당일 3백 대의원이 대회장에 나왔지만 경찰에 해산당했다. 자연스럽게 오후 3시쯤 파고다공원에 모였다. 경찰은 강제해산을 시도했고 이들은 가두시위를 벌였다. 군중들도 합세했다. 단성사쪽에선 조봉암이 이끈 시위대가 합류했다. 종로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게 <적기사건>이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고 훗날 국회의원을 지낸 서범석 등 15명이 현장에서 잡혔다. 대회는 좌절됐지만 화요회는 그들이 겨냥한 모든 것을 얻었다. 적기사건에서 조봉암 박헌영은 검거되지 않았다. 조선기자대회를 열어 경찰의 눈을 그쪽으로 돌려놓고 극비리에 조선공산당을 결당했다.
중국요리집 아서원의 비밀결사
1925년 4월 17일 서울 중심가 중국집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김조봉 김찬 김약수 조봉암 박헌영 등 18명이 참가했다. 화요회, 북풍회, 이루쿠츠크 고려공산당, 상해파 고려공산당까지 모였지만 서울청년회 안의 좌파만은 제외됐다. 창당일은 경찰의 눈이 기자대회에 쏠려있던 때였다. 기자대회는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화요회 계열이 주도한 ‘무명회’가 주최했다. 당시 조선일보 지방부였던 김재봉 박헌영 홍남표가 기자대회 주역이었다. 기자대회는 2박3일로 열렸다. 일본경찰은 기자대회에 신경을 집중했다. 기자대회에 잇달아 조선민중대표자대회도 준비했다. 경찰은 두 행사에 쏠렸다. 4월17일 기자대회 3일째 마지막날 공산당 핵심그룹은 서울 한복판 아서원에서 공산당을 결당하는 집회를 열었다. 아서원 대회는 김약수가 사회를 맡았다. 김재봉이 공산당 결당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처음 당명을 고려공산당으로 하려했으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의 심한 파벌 이미지 때문에 ‘조선공산당’이 됐다. 조봉암은 전형위원으로 김약수 김찬 김재봉 등 7명을 중집위원으로 뽑았다. 책임비서는 김재봉, 인사부는 김약수 등이 맡았다. 조봉암은 당 집행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청년조직을 맡기 위해서였다. 당의 기본조직은 3명 이상 7명 이하로 구성된 야체이카(세포)였다. 당원 후보기간은 노동자는 3개월, 농민과 소공업자는 6개월, 사무원 기타는 1년 이상이었다. (그런데 주도세력 모두 1년 이상짜리였다.)
1925년 4월 18일 밤 박헌영의 집에서 극비리에 고려공산청년회 결성대회를 열었다. 김찬 조봉암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주세죽 등 20명이 참가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조선일보 대표로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시대일보 대표 조이환, 노동총동맹 권오설(權五卨), 여성 주세죽 등 18명이라고도 한다. 일동은 비밀유지를 위해 규약을 확인한 다음 그 자리에서 태워버렸다. (한심한 먹물들) 고려공산청년회는 책임비서 박헌영, 국제부 조봉암, 정치연락부 김단야, 조직부 권오설, 선전교양부 임원근 등이었다. 이 대회에서 조봉암은 지도적 위치였다.
조선공산당은 조동우를, 고려쳥년회는 조봉암을 각각 모스크바로 보냈다. 둘은 코민테른에 조선공산당 조직을 보고했다. 조봉암은 콤소몰의 승인을 얻고 1925년 겨울 상해로 돌아왔다. 조동우의 조선공산당 승인은 지연돼 1926년 4월에야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았다. 조봉암은 공작금 1850루불와 21명의 유학 티오까지 얻었다. 선발된 21명은 권오설 조용암(조봉암의 동생) 김응기 김조이(조봉암의 부인) 등이었다. 김응기는 뒤에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고 노동상이 됐다.
어이없는 신의주 사건, 1차 공산당 붕괴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결성 뒤 1925년 11월 22일 두 조직은 괴멸의 위기를 맞는다. 신의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에서 발단한다.
1925년 11월 22일 밤 신의주 중심가 경성식당 2층에는 신만청년회 집행위원장 김득린(金得麟) 등 29명이 한 회원의 결혼피로연을 열었다. 아래층에는 신의주에서 변호사 개업중인 박유정과 의사 안계복 최치호, 일본인 순사 스즈끼, 한국인 보조순사 김운섭 등이 술자리를 벌였다.
2층 청년들이 너무 떠들고 노래를 하창하자 식당주인이 2층에 올라와 “아래층에 일본순사도 와 있으니 너무 떠들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2층 청년들은 누구냐고 따졌고 주인은 알려줬다. 청년들은 “친일파 변호사놈 오늘 잘 걸렸다”고 기염을 토했다. 김경서(金景瑞)란 청년회원이 웃옷을 벗은 차림으로 손에 술병과 술잔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스즈끼 순사에게 “술한잔 들라”고 권했다. 이렇게 싸움이 붙었다.
2층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 내려와 “순사 앞잡이들이다. 친일파 박가놈 때려 죽여라”며 멱살을 잡아끌었다. 스즈끼 순사는 자리를 피해 도망치다가 잡혀 매질을 당했다. 결국 경찰이 출동해 사태를 진압했다. 이때 집행위원장 김득린이 팔을 걷어올리며 “시원하다. 성공했다”고 중얼거렸다. 순간 팔소매에 감춰졌던 붉은 완장이 눈에 띄었다.
며칠 뒤 경찰은 엄중하게 문초했다. 싸움을 걸었던 김경서의 집 옷장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회원자격 심사표와 통신문 3통이 나왔다. 조선일보 신의주지국 기자 임형관(林亨寬)이 김경서에게 은밀히 맡겨둔 것이었다. 임형관이 잡혀오고 편지는 박헌영이 상해로 보내는 것이었다. 조봉암은 콤소몰에서 받은 유학생 파견비용 등 지원금을 신의주 연락책인 임형관을 통해 박헌영에게 보냈다. 박헌영은 유학생 선발을 끝내고 편지와 함께 사업보고서 등 청년회 조직에 관한 보고서를 조봉암에게 전하라고 임형관에게 맡겨두었다. 이 사건으로 여운형도 상해에서 연행됐다. 여운형은 상해에서 공산당 활동에 참여했다.
노동자.농민 없는 공산당
신의주사건으로 연행된 신만청년회원은 모두 18명이다. 신의주의 유력청년들로 도청, 금융조합, 식산은행, 만주은행에 다니던 사람들이었다. (노동자는 아무도 없었다.)
경찰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의 일부도 포착했다. 신의주서는 종로서로 형사대를 급파했다. 사상범 검거로 악명 높던 미와 경부는 종로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검거선풍이 불었다. 1925년 11월 30일 새벽 일본의 사상범 전담반인 고등계 형사들이 관철동 허헌의 집을 급습해 임원근 허정숙 부부를 체포했다. 박헌영도 처 주세죽과 함게 체포됐다. 권오설과 시대일보 기자 조이환도 모두 체포됐다. 김약수는 1925년 12월 15일 대구에서 체포됐다. 김단야는 상해로 도망쳤다. 김찬도 상해의 프랑스 조계로 피했다. 결국 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관계자 66명이 체포되고 그중 56명이 검찰에 송치되고 37명이 지명수배됐다.
1차 공산당은 결정타를 맞고 기능이 마비됐다. 회요회는 북풍회와 서울그룹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사건이 일어났고 북풍회의 자백으로 당의 비밀이 모조리 폭로됐다고 규탄했다.
2차 공산당, 조선일보 기자를 책임비서로
검거망을 벗어난 책임비서 김재봉과 김찬 주종건 등은 1926년 1월 중앙기구개편에 들어갔다. 이른바 2차 공산당이다. 이는 1차 공산당의 계승이었다. 후계자를 조선일보 진주지국장이던 강달영으로 정했다.
강달영은 3.1운동때 진주에서 선도역할을 하다 체포돼 1년6개월을 옥살이했다. 출옥 뒤 노동운동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좌파조직인 신흥청년동맹 창립에 들어와 고려공산청년회 진주 세포책이 됐다. 김재봉은 조선일보 지방부장이던 홍덕유를 시켜 강달영을 서울로 오게 했다. 강달령은 기꺼이 승낙했다. 강달영은 진주지국을 정리한 뒤 1926년 1월 서울로 왔다.
새로 선임된 중집위원은 노동총동맹의 권오설 이준태, 동아일보 경제부장 이봉수, 시대일보 업무국장 홍남표, 조봉암이 급파한 전덕(일명 김치관)과 김철수였다. 책임비서에 강달영을 뽑았다. 청년회는 책임비서에 권오설 등으로 새 집행부를 짰다.
조봉암의 상해지도부
2차당의 책임비서 강달영 등 국내 간부진과 상해지도부 사이에 불화가 적지 않았다. 강달영은 1차당 간부의 직접 지도없이 자기 판단에 따라 당을 재건해야 했다. 1차 검거때 피해 나온 김단야 조봉암 김찬이 상해에서 해외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상해지도부는 강달영에게 당 재건의 방침을 지도하도록 했다. 상해부의 이 같은 간섭에 국내당은 반발했다. 다만 강달영은 상해지도부를 정면 거부는 하지 않고 지령은 받을 것은 받고 무시할 건 무시하는 양면책으로 당을 운영했다.
조봉암은 1926년 5월 북만주로 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해 책임비서가 된다. 만주총국 설치를 전후해 국내당과 상해해외부 사이 마찰이 생겼다.
강달영은 화요회 중심의 1차당이 붕괴된 뒤 당 재건을 위해 연합을 모색했다. 화요회가 기피하던 경성콤그룹과 통합을 모색했다. 경성콤그룹도 책임비서 김사국을 뺀 다수가 2차당과 합류를 지지했다. 예비교섭을 거쳐 1926년 3월 합동회의를 열었다. 합류방식을 놓고 줄다리를 했다. 경성콤은 1 대 1 대등한 합동을, 2차당은 개인자격으로 2차당에 합류하라고 각각 주장했다. 이때 경성콤의 대표 김사국이 폐결핵으로 죽자 합동장례를 치르면서 누그러졌다.
강달영 공산당은 안재홍(安在鴻) 신석우 권동진 등 민족진영 지도자들과도 긴밀히 접촉해 통일전선을 추진했다. 이것이 신간회 운동으로 발전했다. 고려공산청년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권오설은 국내에 남아 지도했다. 권오설은 남은 유일한 1차당의 중집위원이었다. 권오설은 상해지도부와 국내파의 원만한 관계조정에 주력해 상당히 관계가 정상화됐다.
1926년 6.10항쟁
또하나의 사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죽었다. 상해지도부는 순종 국장을 기해 3.1운동 못지않는 거족적 항일거사를 계획해 행동하라고 지령했다. 조봉암은 권오설에게 1천원을 보내면서 인산일인 6월10일 대대적 항일시위를 지령했다. 권오설은 천도교 기관지 개벽사 인쇄담당 박래원에게 부탁했다. 그 무렵 김단야도 상해에서 서울로 잠입했다. 김단야는 조선일보 사회부장 유광열을 찾았다. 유광열에게 “곡복(哭伏)하는 민중에게 격(激)함”이란 제목의 격문을 내놓고 인산일 항쟁을 역설했다.
6월 초 종로서는 오사카에서 일어난 중국 위폐범의 체포를 의뢰받아 이동규를 검거하고 집을 수색하다가 방안의 재떨이에서 갈기갈기 찢은 인쇄물 1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짜 맞춰 보니 순종 인산일을 기한 시위운동 격문이었다. 이동규는 선천에서 금광하는 안정식에게 받았다고 자백했다. 안정식은 고향 친구인 권오설이 거사자금 5천원을 요구하면서 격문 2장을 줬다고 실토했다. 경찰은 권오설을 전국에 수배했다. 마침 개벽 6월호는 문제기사 때문에 압수수색 당했다. 종로서는 26년 6월 6일 천도교당 안 개벽사를 수색하면서 궤짝에 넣어둔 격문을 압수하고 박래원을 체포했다. 박래원은 고문에 못이겨 권오설의 은신처를 실토했다. 권오설도 잡혔다.
격문은 이랬다. “민중의 통곡과 상복은 이척(순종) 때문이 아니라 민중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것 때문이다. (중략) 26년 4월25일부터 5월2일까지 1주일간 서울 종로서 관내만 해도 통곡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취조받은 사람이 2만9497명에 달한다. 통곡과 슬픔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일본제국주의를 조선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격문은 압수됐지만 더 많은 격문이 서울과 지방 곳곳에 숨어있었다. 권오설은 모진 취조를 받았다. 결국 2차 공산당과 2차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이 드러났다. 강달영은 2차당이 무너지자 바나나장수로 변장해 몸을 숨겼지만 7월17일 끝내 검거됐다. 당원명부, 각종 보고서 등이 압수됐다.
1, 2차 공산당 사건으로 모두 135명이 체포되고 이 가운데 101명이 예심을 거쳐 재판에 회부됐다. 1,2차 공산당 사건은 소위 ‘조선공산당’ 사건이다. 데라우찌 총독 암살음모라는 날조극의 105인 사건, 기미년의 48인 사건과 함께 피고인 수가 가장 많았던 1920년대 조선의 3대 사건이다.
조봉암은 국내당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만주총국을 강화해 국내당의 와해된 조직을 재건할 발판을 만들어 코민테른에서 조선지부를 유지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김철수의 3차 공산당 재건
1926년 6.10 만세사건으로 2차 공산당도 치명타를 맞고 무너졌다. 검거망을 벗어난 김철수가 당 재건에 나섰다.
김철수는 전북 부안군 백산면 부농으로 태어나 향리의 보통학교와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졸업했다. 1916년 귀국 뒤 군산에서 미곡상을 하다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좌경화됐다. 이동휘와 만난 뒤 사회주의운동에 나섰다. 1,2차 공산당 창당에 참여한 간부 중 두 차례 검거에도 유일하게 국내에 살아남았다.
김철수는 1926년 9월 서울 동대문 밖 숲 속에서 간부회의를 열었다. 김철수는 책임비서를 맡아 당을 재건했다. 공산계열 통일협동파와 접촉했다. 협동파는 김약수의 북풍회가 화요회에 흡수되자 불만을 품고 사회주의 그룹 협동을 내걸고 별도 임원진을 구성했던 ‘1월회’를 말한다. 앙숙이던 경성콤그룹과도 접촉해 합동에 합의했다.
1926년 12월 6일 견원지간이던 서울파 이인수 김병로 김강(일명 김니콜라이)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2회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책임비서 안광천, 선전 김준연 한위건, 조직 권태석 등으로 잤다. 이 3차당엔 화요회 김철수 고광수, 서울파 이인수, 무파벌의 안광천 등이 들어왔다. 화요회를 극단으로 싫어했던 서울파 이인수의 등장이 특이하다. 이는 이후 화요회파 리더 조봉암과 3차당의 사이가 벌어지는 요인이 됐다. 3차 조선공산당은 ML당으로 불린다. 3차당은 1927년 5월 코민테른 조선지부로 승인받았다. 3차당은 화요회가 거의 감옥에 있을 때 결성돼 화요회 리더인 상해부를 멀리했다.
김철수는 코민테른의 승인을 위해 모스크바로 가면서 상해의 조선공산당 지도부인 김찬 조봉암 김단야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갔다. 김철수와 김찬의 2라운드 게임은 코민테른 사무실에서 벌어졌다. 김철수는 불가피한 국내 실정을 말하고 새 당의 승인을 간청했다. 김찬은 재건 조선공산당이 엉터리 날조극이라고 주장했다. 김찬이 판정패했다. 김찬은 외톨이가 돼 이집 저집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폭음을 일삼아 배척당했다. 조봉암은 김찬보다는 도량도 넓고 파벌의식도 그리 강한 편이 아니라고 알려졌지만 서서히 석양의 그림자가 그에게도 다가오고 있었다.
안광천과 김준연의 갈등, 김세연
3차당에서 안광천 책임비서 시대는 1926년 12월부터 약 반년 정도였다. 3차당의 특징은 민족진영과 연합하는 민족협동전선 추구다. 신간회 참여도 그 때문이다. 내부 파쟁으로 안광천은 물러나고 1927년 9월 20일 중앙기구를 개편, 김준연(해방 이후 법무장관을 지냄)이 책임비서가 됐지만 그 역시 1개월로 단명했다. 김준연은 안광천을 스파이로 의심했다. 그러나 김준연 자신에게 더 문제가 있는 듯했다. 당은 심각한 분란에 빠졌다.
물론 안광천도 문제였다. 안광천은 일본의 어느 전문학교 유학중인 여학생과 깊은 애정관계에 빠졌다. 그 여학생은 어느 기자의 약혼녀로 그 기자가 박봉을 털어 수년 동안 학비를 대주는 처지였기에 주위의 빈축을 샀다. 안광천은 1928년 2월 2일 김준연 등 30여명이 검거됐을 때 교묘히 상해로 탈출했다. 이를 두고 안의 스파이설을 의심한다. 중국 망명한 안광천은 김원봉 휘하에서 의열단 조직에 참여해 기관지 <레닌>을 발행했다.
1927년 11월 2일 간부회의에서 당 해산을 결의한 김준연은 선전부원 양명에게 뒷일을 위임했다. 양명은 김세연에게 책임비서 자리를 넘겼다. 김세연은 1899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오성중 재학때부터 독립운동에 참여, 중국 동북지방으로 건너가 민족진영이 운영하던 참의부에서 군사훈련도 받았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 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 북성회에 들어갔고 북성회가 화요회에 흡수될 때 ‘1월회’에 남은 사람이다. 2차 검거때 잡혔지만 예심에서 나왔다. 김세연은 조선공산당의 해묵은 파쟁을 해소하는 데 애쓴 것 같다.
파벌 속에 싹튼 좌익 모험주의
만주의 공산당도 파벌이 심했다. 화요회, 서울그룹, 북풍회, ML파로 흩어져 있었다. 자파 세 과시용으로 무리하게 시위를 벌였다. 이때 1차 간도사건이 터졌다. 1927년 10월 2일 동만주 구역국은 서울의 1백여 공산당원 재판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다. 그들이 시위에 열중할 때 중국 일본 합동경찰이 본부를 급습해 37건의 문서를 압수했다. 당원명부, 세포들의 활동도 포함돼 1백여명이 노출됐다. 이 사건으로 조봉암의 화요회는 당원명부가 모두 노출돼 치명상을 입었다.
1928년 4월 북풍회가 또 용정에서 시위를 벌였다. 북풍회의 시위도 중요간부의 대량 체포라는 댓가를 치렀다. 1930년엔 파괴활동도 수반한 3차 간도사건을 벌였다. 화요회는 활동능력을 잃고 30년쯤 해산한 것으로 기록된다. 조봉암은 서울그룹이 잠식한 3차당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다만 조봉암은 고려공산청년회에는 계속 지도적 위치를 유지한 듯하다. 3차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엔 책임비서에 화요회 고광수가 앉았지만 간부진은 이인수 등 서울파가 다수였다. 화요회파가 1,2차 공산당사건으로 대부분 검거 투옥된데 반해 서울파는 거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총독부는 1928년 2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에 대한 대량검거를 단행했다. 이때 3차당에선 김준연 김세연 최익한 최창익, 공산청년회에선 김철 이인수 등 모두 2백여명이 잡혔다. 3차당은 특별한 사건없이 무너졌다. 내분이 자초한 자멸이다. 그때 책임비서도 지내면서 격심한 분파행동의 장본인이 된 K가 실은 경찰 스파이였다.
코민테른 경고도 무시한 몰락
코민테른은 이런 3차당을 향해 경고했다. “파벌투쟁을 청산하라. 조선공산당은 지식계급과 학생의 당이 돼 버렸다. 이제라도 지도부에 노동자 출신을 더 많이 배치하고 노동계층으로 조직방향을 돌리라”고 했다.
4차당을 결성하는 3회 조선공산당 회의는 28년 2월27일 고양군 김병한의 집에서 열린다. 책임비서 차금봉, 정치 안광천 양명 등으로 이른바 차금봉 당이다. 4차당도 코민테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파쟁을 계속했다. 4차당도 1928년 7월5일 4차 공산당 검거선풍으로 무너졌다. 당과 청년회 관계자 175명이 검거됐다. 이제 사실상 궤멸했다.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 승인을 취소했다.
코민테른 극동부에는 일본공산당의 사노 나마부, 중국공산당의 진독수, 조봉암이 ‘극동의 3인조’로 서로 친했다. ML파 홍남표는 경성콤그룹과 합세해 조봉암에게 도전했다.
첫사랑 김이옥과 딸 조호정
▲ 2006년 7월 31일 조봉암 사법살인 47주기에 참석한 딸 조호정 |
상해의 조봉암에게 첫사랑의 여인 김이옥이 찾아왔다. 김이옥은 조봉암과 같은 강화도 출신 부농의 딸이다. 김이옥은 경기여고를 나와 이화여전 음악과 재학중이었다. 김이옥은 어린 시절 조봉암과 같은 교회에 다녔다. 나이는 조봉암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3.1운동때 조봉암이 향리로 내려와 선봉에 설 때 김이옥은 함께 격문을 쓰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3.1운동 직후 조봉암이 1년 옥고를 치를 때 김이옥은 서대문형무소로 자주 면회갔고 둘은 깊이 사랑했다. 김이옥의 부모는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태어난 딸 조호정은 어머니 김이옥이 이화여전 재학중 폐결핵에 걸려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받으면서 조봉암을 찾아 상해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김이옥은 상해로 무사히 찾아가 두 사람은 신혼살림을 차렸다. 국내파 공산당에선 두 사람의 결합을 강하게 비판했다. 공산주의자가 비당원인 여성과 열애에 빠졌다는 비판이었다. 둘 사이에 딸 조호정은 1929년 태어났다. 1932년 조봉암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로 압송됐다. 당시 조선일보는 “조봉암은 1933년 12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받았다”고 보도한다.
조봉암이 공산당에 회의하기 시작한 건 상해시절 후기가 아닌가 한다. 4차당이 무너지고 얼마 뒤 1928년 조동우 등 6명 체포됐다. 조봉암의 맹우였던 3인조도 무너졌다. 진독수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국공합작을 추진했다. 그러나 합작을 우익기회주의로 몰아 중국공산당은 1929년 진독수를 제명시켰다. 그 뒤 진동수는 국민당과 손잡고 반공대열에 섰다.
상해파 3인방의 몰락
일본인 사노도 1929년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조봉암은 외톨이가 됐다. 조선공산당은 파쟁으로 세월을 허송하고 정력을 낭비했으며 스스로 일제의 그물에 걸려들기까지 했다. 선배도 후배도 없는 권모술수가 끊이질 않았다.
조봉암을 쫓아와 불안한 5년을 보낸 병약했던 여인 김이옥이 1932년 네 살난 딸 조호정을 남겨둔 채 죽었다. 김이옥이 죽은 다음해 신의주로 압송된 조봉암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손톱이 뽑히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동상까지 걸려 손가락 마디를 잘라냈다. 조봉암은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복역했다. 1941년 출옥해 고향 강화에서 휴양한 뒤 인천에서 자리잡았다. 1942년 정식으로 결혼했던 김조이와 재결합했다. 김조이도 6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막 풀려난 뒤였다. 인천에서 왕겨연료조합을 만들어 생계를 이었다.
해방 뒤 박헌영의 재건파공산당은 조봉암을 일본에 협력한 것으로 매도했다. 그러나 왕겨벌이는 큰 돈벌이 자리는 아니었다. 조봉암의 행동은 늘 감시당했다. 죽산은 전쟁 말기까지 황민화운동을 도운 흔적은 없다. 1945년 1월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체포돼 해방되는 날까지 감옥에서 보냈다. 일제 때 공산주의를 청산한다고 발표한 일도 없었다. 일본인 친구 사노는 1932년 감옥에서 공산주의 청산의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