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노인과 노숙자
수은주가 영하 3∼4도로 뚝 떨어진 17일 오전 10시쯤 서울 탑골공원. 낡
은 외투를 여며입은 노인들이 두 줄을 길게 서기 시작했다. 한 줄은 사단법
인 「사랑채」가 운영하는 무료급식 줄, 다른 하나는 원각사가 무료 점심을
나눠주는 줄이다.
두 시간 후 급식표를 나눠줄 무렵, 사랑채의 급식줄은 공원 담장을 빙둘
러 100 이상 늘어졌고, 발을 구르며 두 줄에 서 있는 노인이 1000명을 넘어
섰다. 노인들은 나눠주는 표를 받자마자 정문 앞 횡단보도를 건너 500여 쯤
떨어진 식당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식당 밥이 끊길까 봐 뛰는 거야. 아침부터 줄섰는데 못 먹으면 어떡해
.』 (김용수씨·67)
『이 추운데 3시간 가까이 기다렸으니 배가 고플 수밖에 . 그냥 저절로
뛰게 돼. 』(이천수씨·70)
오후 1시50분쯤, 「사랑채」의 식당에서는 800명분의 밥과 예비용으로 준
비한 라면이 다 떨어졌다. 10여명의 노인들이 『밥 좀 달라』며 식당 안으
로 들어서자 자원봉사자들은 『다음부터 일찍 줄을 서세요』라며 노인들을
달랬다.
93년부터 탑골공원에서 무료 점심 급식 봉사를 하고 있는 「사랑채」는
지난 9월부터 점심 때 700∼800명분의 밥을 준비하고 있다. 이 단체는 97년
이전에 250명, 98년에는 600명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했다. 밀려드는 결식노
인들을 이 단체는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점심을 해결한 뒤 공원 안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던 한 할아버지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IMF가 끝났다구? 누가 그런 소릴 해. 내년에 65세 이상
노인 300만명한테 한 달에 2만원씩 준다는데 그게 무슨 노인복지야. 노인
결사대를 만들어 국회라도 쳐들어가야겠어. 』
IMF 위기는 경제능력이 없는 노인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매일
점심을 굶는 노인이 전국에 22만2000여명(대한노인회 중앙회 추정). 노인들
의 자살률도 크게 늘어났다. 60∼64세 연령층의 자살률은 89년 10만명당
12.6명에서 97년 20명, 98년 34.1명으로, 65∼69세 연령층 자살률은 89년
15.3명에서 97년 22.7명, 98년 33.4명으로 껑충 뛰었다 (통계청 자료).
아들 딸들의 실직과 파산은 노인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었다
. 김말숙(72·인천시 부평구) 할머니는 경로당에서 살고 있다. 사업을 하는
사위-딸과 함께 살던 그는 지난 6월 사위의 부도로 자신 명의의 집과 약간
의 재산까지 다 날렸다.
사위는 빚쟁이를 피해 도망다니고 있고, 딸은 손녀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
갔다. 김씨는 동네노인들의 배려로 경로당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지만, 정
부의 생계지원비도 못 받고, 의료보험은 말소된 상태이다. 관절염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지만 올 봄 이후 병원에 가지 못했다.
IMF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노숙자도 마찬가지다. IMF의
상징인 노숙자의 숫자는 IMF가 극복됐다는 정부의 공언을 비웃듯, 지난 9월
이후 오히려 증가추세로 돌아섰다.
17일 오전 1시30분쯤,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지하도 퇴계로 방향 통로는
종이박스와 신문지를 깔고 덮고 양편으로 드러누워 잠자는 노숙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박용철 역전파출소장은 『오후 7시부터 노숙자가 모여들
기 시작해 하루 평균 100명 정도 집결한다』며 『종교단체에서 무료급식하
는 남대문5가 지하도에는 200∼300명이 모인다』고 했다. 서울역에선 노숙
자끼리 벌이는 크고 작은 싸움이 하루 20건 정도나 된다고도 했다.
같은 시각,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안의 팔각형 벤치들도 노숙자들로
점령됐다. 중구 장교동 중소기업은행 앞 을지로 지하보도는 노숙자 은거지
로 변했다. 통로 좌우에 노숙자 50여명이 군대 내무반처럼 나란히 누워자고
있었다. 노숙자 수용시설인 서울 자유의 집에도 6월 이후 꾸준히 수용자가
늘어나 9월말 현재 900명이 생활하고 있다.
서울시가 지원하고 성공회가 운영하는 「노숙자 다시서기 지원센터」는
올 여름부터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던 서울의 노숙자 수가 9월 들어 매일 수
십 명씩 늘어 9월 현재 5000∼6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작년 10월
의 노숙자 수는 3000여명이었다.
「노숙자 다시 서기 지원센터」 김영술 실장은 『지표상 경기가 좋아졌다
고 하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하류층에서 노숙자가 계속 발
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IMF 조기졸업」, 「외환보유고 700억달러」, 「주가지수 1000포인트 돌
파」 . 그러나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은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다는 거냐』
며 울부짖고 있다. 이제 가진자-정치인-정부는 성급하게 치켜든 축배의 잔
을 내려놓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닐까.
[저 자] 안석배 신동흔 이길성 기자
[출 처] 조선
[발 행 일] 1999.12.20
[발 행 처] 조선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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