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야-한국사회] /일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류동민/충남대 교수

새 천년 해돋이를 보러 정동진으로, 울릉도로 떠날 준비를 서두 르는 한켠

에서, 노조전임자 임금을 누가 지급할 것인가라는 문제 로 말미암아 실로 오랜

만에 우리 눈에 익숙한 폭력시위 장면까지 연출되고 있다. 명색이 경제학으로

밥벌이를 하는 터인지라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솔직히 노동문제를 직접 전공하지 않는 나로서는, 마치 맹장수술 부탁을

받은 치과의사라도 된 듯 끙끙댈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물어온 쪽에서 먼저

해답을 들려주기 일쑤이다. 예컨대 `생산적 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노조 일

만 하면서 꼬박꼬박 월급을 챙기 기보다는 조합원들이 걷어 주는 돈을 받는 것

이 논리적으로 앞뒤 가 맞는 얘기 아니냐고 한다. 아이엠에프 위기가 물러가서

먹고 살 만 하니까 우격다짐을 해서라도 제 몫을 챙기겠다고 난리법석 인 것

아니냐는, 그러니 이 참에 군기를 한번 잡아야 한다는 과격 한 해석도 따라 붙

는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거래된다는 것이야말로 길게 잡아야 200년 남 짓한 역사

를 가진 자본주의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 우리 몸에서 노동력만 뚝

잘라내어 팔 수는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 에, 빵이나 책 따위를 사고 파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미묘한 문 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특히 장기지속적인 고

용관계에 놓인 노동 자가 받는 임금이 과연 일한 만큼에 정확하게 비례해 주어

지는 것 인지, 아니면 그것과 다소 무관하게 정상적 노동력 재생산을 보장 해

주기 위한 것인지, 또는 무시무시하게 들리겠지만 일한 결과의 일부를 착취당

하는 것인지는, 적어도 내가 배워온 경제학의 테두 리 안에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사실 성경에서 유래하였다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운영원리를 단순명쾌하게 설파한 금언도 드물거 니와, 그 따름정리로서

노조 일만 하는 자는 먹는 것도 노조에서 해결하라는 주장은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들리기도 한다. 곧 노 조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는 결국 `무노동 무임금’

이라는 원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노동조합 투쟁가의

가사일 뿐더러, 일찍이 사회주의 혁명가인 레닌도 즐겨 사용했던 말이다. 요

컨대 정말로 일하지 않는 자가 누구인지, 무 엇을 먹지 말라는 것인지가 명확

히 규정되지 않은 채, `일하지 않 는 자, 먹지도 말라’는 추상적인 원칙만으로

자본주의사회의 핵심 축인 노사관계를 한칼에 날려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서구와는 달리, 짧은 기간 동안 압축적으로 산업화한 우리의 특 수한 역사

적 배경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무노동 무임금이 그렇게 자명한 원리라

면, 애초에 자본은 왜 노조전임자에게 임금 을 지급했던가를 생각해 보자. 사

실 그것은 노동조합운동을 마지 못해 허용하되 최대한 억제하고 싶었던, 그래

서 산업별 노조보다 는 상대적으로 말랑한 기업별 노조체제를 유지하면서, 경

우에 따 라서는 정말 하는 일없이 월급만 타 가는 어용노조간부들을 회유 하

기 위한 정부와 자본의 묵계에 의해 형성됐던 것이다.

재계가 여야 가리지 않고 뒷돈 대주며 `정치’해 왔던 것을 삼척 동자도 다

아는 판국에 일견 사소한 일에 목숨이라도 건 듯 새삼 정치활동을 공식 선언

하고 나서는 것은, 이제 자본 스스로 그 대 리인인 정부를 제치고 전면에 나설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기 때문

80년대 `비판적 지지’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아 디제이피 정 권에 대해

서도 `정책연합’이라는 어정쩡한 말로 지지를 보냈던 노 동계 일각, 그리고 몇

년 전만 해도 진정한 진보세력을 자임하다가 지금은 `국민의 정부’만이 반재

벌-반지역감정세력들간의 개혁연 합이라 주장하는 이데올로그들과는 달리, 나

는 오히려 지금이야말 로 이 땅에서 제대로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던 계급정치

가 들어설 시점이며, 노조전임자 문제도 이런 거시적 맥락 속에서만 올바르

게 다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99년12월20일19시01분 한겨레 http://www.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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