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아침의향기] /껍데기는 가라/장재연/아주의대 교수
언론에서 외면했던 한 산재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무엇인가 써야 한다는 급
한 마음에 ‘아침의 향기’의 요청을 덜컥 받아 들인 지 벌써 5개월째다. 새해
부터는 매주 머리를 묵직하게 눌러대던 원 고마감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 가볍다.
그러나 그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항의 농성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 다는 사실
에 생각이 미치면 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곳 저곳에서 많은 농성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모든 문제 의 해결방
식이 농성이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가 꼭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요구하고 있
고 달리 호소할 방법이 없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의 포
항제철 고용승계 관련 농성은 대통령까지 해결을 약속했음에도 3년째 계속되
고 있다.
선거 때 각종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장담하던 현 정권도 권력을 잡고 나
니 핑계가 많다. 최근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은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
다. 그러나 시민단체, 언론, 학생운동 등 여 러 분야에서 기대를 받던 많은 사
람들이 그것을 밑천으로 정치권 으로 들어가고 있다. 새로운 틀이 만들어진 것
으로 보이지도 않는 데, 무슨 근거에서인지 자기들은 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노동운 동진영도 어쩐지 예전 같지 않다. 젊은 세대들은 재미없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 사회의 오랜 모 순과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을지 절망감을 느낄 때도 많다.
한달 전쯤 시골의 한 농가에 들렀다가 콩을 떠는 일을 거들게 되 었다. 바
닥에 줄기 채 말린 콩을 펼쳐놓고 도리깨로 두드리면 콩 들이 떨려 나온다. 떨
려 나온 것을 모아보면 콩깍지 껍데기와 부 스러기 등이 처음에는 워낙 껍데기가 많아 서 콩을 제대로 골라낼 수 있을까 염려되지만,
풍구로 가려내고, 키로 까부르고, 체로 치다 보면 점점 알맹이만 모이게 된
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역사발전의 한 단면이 바로 저런 모습이지 ‘라는 생각
이 들면서 자꾸만 잊어버리는 진리가 떠올랐다. 즉 세 상에 수많은 부패와 모
순과 어려움이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애를 쓰다 보면 조금씩 더 정의롭고 자
유로운 세상이 되어 간다는 사 실 말이다. 민중들의 힘든 삶 속에서도 절망하
지 않는 모습, 언젠 가는 희망이 있으리라.
풍구에서 콩깍지 껍데기가 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렸을 때 가 슴을 울렸
던 시인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장재연/아주의대 교수
◐ 99년12월27일21시04분 한겨레 http://www.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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