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김금수의 항해> 인류의 소망이 곧 새 천년의 희망
<발문1> 새 천년, 새 백년, 새 해를 맞는다. 이 시점에서 환호의 목소리
는 요란한 듯하나 도무지 실제의 무게를 느낄 수는 없다. 오히려 미래에 대
한 불확실성과 우려만이 감돌 뿐이다. 낡은 가정들이 대부분 사멸한 상태에
서 새로운 가정들이 아직 제대로 형태를 갖추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처럼 삶의 궁극적인 목적에 관해 ‘왜’라는 의문을 갖고 다가
선 적도 없었을 것이다.
<발문2>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또한 이것은 다른 개
념에도 적용된다. 교육의 반대는 무지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아름다움의 반
대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 우리는 역사가 우리를 이 지
점까지 몰고 왔으며, 왜 그러했는지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하다. 인류가 인정할 수 있는 미래를 가지려 한다면, 그것은 과거나 현
재를 연장함으로써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세 번째 천년
기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실패의 대가는,
즉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경우의 결과는 암흑뿐이다.” 에릭 홉스봄의 『
극단의 시대: 20세기의 역사』마지막 구절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인류는 새 천년, 새 백년, 새 해를 맞는다. 이런 시점에서 환호의 목소리
는 요란한 듯하나 도무지 실제의 무게를 느낄 수는 없다. 오히려 미래에 대
한 불확실성과 우려만이 감돌 뿐이다. 변화와 발전의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 방향감각마저 잃을 지경이다. 어쩌면 낡은 가정들은 대부분 사멸한 상
태에서 새로운 가정들이 아직 제대로 형태를 갖추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낡
은 가정의 죽음은 가치체계의 위기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처럼 삶
의 궁극적인 목적에 관해 ‘왜’라는 의문을 갖고 다가선 적도 없었을 것이다
. 갖가지 혼돈 속에서 새로운 세기를 맞게 된 것이다.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를 냉철하게 숙고해야 한다는 말은
옳다. 독일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송두율 교수는 그의 『21세기와의 대
화』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미래를 전망하는 문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안도 커지게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는 관습적 사고에 더욱 매달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조주의적 사고와 행동양식이다. ‘참선하는 이가 화두
를 의심하지 않으면 큰 병이 된다'(參禪者 不疑言句 是爲大病)는 불가의 말
처럼, 미래의 전망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지금까지 풀었던 사고와 보냈던
행동에 대해서 더 큰 의심을 해보아야 한다.”
*반동과 변혁의 격심한 충돌이 예측되고
21세기 예측에서 떠오르는 불확실성과 혼돈 그리고 우려는 따지고 보면
지배계급·지배세력·지배블록이 세계정세와 상황을 주도한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현재로서 이 가정은 정당하다. 지구촌화의 폭넓은 진행,
신자유주의의 팽창, 민주주의 질서의 왜곡, 급속한 기술혁신, 통합의 가속
화와 지역화, 빈곤의 증대와 빈부격차의 심화, 대량실업 상존의 노동시장
구조 등을 둘러싼 전망이 그렇다.
지배하는 쪽이 추구할 이런 가정들에 대응해 피지배쪽이 지향할 목표는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일하면서 안온한 생활을 누리는
것, 보편적인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 경제
발전을 지속하고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
지구적 차원에 걸쳐 환경을 보호하는 것, 국가간·지역간의 격차를 줄이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 산업정책이나 기업경영에서 경제민주주의와 노동의 인
간화를 실현하는 것,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을 해소하는 것, 사회정의와 도
덕적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것, 평화를 유지하고 국내외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지향 목표는 인류의 보편적인 소망일 수 있고, 그 소망의 줄기찬
추구가 곧 미래의 희망일 수 있을 터이다. 이렇게 본다면, 21세기는 지배
계급·지배세력·지배블록이 빚어내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반동과 피지배계
급·피지배세력·피지배블록이 추구하는 변혁 사이의 격심한 갈등과 충돌이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노동운동 발전 전망은 밝은가
“노동의 생애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뭐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으며 옛날부터 노동의 생애는 늘 불확실성
으로 가득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재의 불확실성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여기에는 한 사람의 생계와 미래의 전망을 쑥밭으로 만들 수 있는
끔찍한 재앙이 담겨 있다. 이 재앙은 세력을 모으거나 연합해서 저항하거나
, 또는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모으고 수단을 강구해서 막아볼 수 있다든지,
최소한 저항하고 어떻게든 바꿔볼 수 있는 그런 재앙이 아니다.
가장 두려운 재앙은 아주 기이한 논리를 내세우거나 아니면 아예 논리도
없이 닥치는 대로 그 희생자들을 때리고 발길질하며 제멋대로 이들에게 주
먹을 휘두르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불행한 운명에 빠지고 또 누가 구원받
을 것인지 예견할 도리가 없다. 오늘날의 불확실성은 극단적인 개별화에 있
다.” 제35차 국제노동사학자대회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노동의 대두와
몰락」에서 표현한대로다.
21세기를 맞을 분명하다. 노동운동을 둘러싼 상황과 정세의 급격한 변화 그 자체가 하나의
큰 도전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 자본과 국가권력의 새로운 통제와 지배 형
태가 엄청난 도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요구 확대나 요구의
다양화가 역시 노동운동으로서는 중대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런 도전들 말고도 노동운동 앞에 다가설 최대의 도전은 ‘극심한 개별화’를
극복함과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잠재적 성장 역량을 구체적인 운동의 발전
역량으로 발현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에릭 홉스봄은 노동운동의 발전을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그는 「노동운동
의 세기」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우리는 오늘날 노동운동사의 새
로운 단계에 와 있다. 노동운동은 아직 존재한다. 브라질과 한국의 예가 보
여 주듯이, 신흥 산업국가에서 노동운동은 아직 성장기에 있다. 그곳에서는
아직 산업노동자층이 축소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구산업 세계의 부유
한 국가들에서도 노동운동은 지속될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서 첫째 맑스
가 예언했듯이 최소한 피고용자로서 이해관계가 고용주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임금·봉급 소득자가 다수 존재하고 있고, 둘째 계급으로 불리든 아니
든간에 사회계층, 즉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집단들이 존재하고 있
으며, 셋째 국가가 소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운동은 계속될 것이라는 주
장이다.
한국 노동운동도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거대도전에 직면하여 주체적인 주
요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놓여 있다. 산별노조 건
설이라는 조직형태 개혁을 비롯하여 제도·정책 개선을 위한 공동투쟁·통
일투쟁의 전개, 정치세력화의 구체적 추진, 21세기에 동 노선과 운동기조의 설정 등이 그것이다.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21세기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 전망은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한 추진 주체의
성장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다. 새로운 세기를 ‘인간의 세기’, ‘희망의 세
기’로 이끌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발전이 필수적 요건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우려를 떨쳐내는 데는 방향성의 상실에서 비롯되
는 무관심을 극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엘리 위즐의 「무관심 극복
의 필요성」이라는 글을 떠올린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
다. 또한 이것은 다른 개념에도 적용된다. 교육의 반대는 무지가 아니라 무
관심이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삶의 반대는 죽음
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이다.”
[저 자]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출 처] 매일노동뉴스
[발 행 일] 1999.12.30
[발 행 처] (주)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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