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주] 반올림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입니다.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산재를 신청하면서 기록의 필요성을 절감해 생애사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아픔과 고통뿐만 아니라 개인의 꿈과 행복에 대해 인터뷰했고, 재해경위서, 진술서가 아닌 삶을 담은 글을 적었습니다. 2026년 매월 한 명씩 총 12명의 삶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웨이퍼 형태로 절단하는 장비를 바라보는 강세진 Ⓒ박정원

우연히 공고를 봤어요. 그때는 반도체라는 게 없었잖아요. “반도체 산업의 첫발을 딛는”, 그런 내용으로 나왔었어요. 신문에 이렇게 공고가 나왔길래 제가 넣었는데 됐어요. 공장도 짓기 전에 공장 터만 닦아놓고 들어가 가지고 3개월 교육받고 설비 들어오고 이제부터 웨이퍼라는 게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된 거죠. 첫발이죠.

대기업 반도체 공장에 납품되는 웨이퍼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질까? 시작은 그 궁금증이었다. 클린룸에서 이루어지는 웨이퍼 가공 공정, 그 이전 단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반올림이 산재를 신청한 피해자 중 웨이퍼 제조 공장에서 일을 하신 분이 계셨다. 연락을 드렸고, 가을 저녁 천안의 한 호수 옆 카페에서 일을 막 끝내고 오신 강세진님(가명)을 만났다. 웨이퍼 제조와 관련해 이것저것 여쭤봤는데 말, 그리고 표정에서 본인의 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담뿍 묻어났다. 만성 백혈병으로 산재 인정을 받아 일을 하지 않으면 휴업 급여를 받을 수도 있지만 본인의 의지로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중이다.

웨이퍼 형태로 절단하는 장비를 바라보는 강세진 Ⓒ박정원

적응이 어려웠던 도시 생활

2남 4녀의 막내입니다. 근데 아버님이 좀 일찍 돌아갔어요. 제가 9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경북 영천에 초등학교 2학년까지 있다가 대구로 나왔어요. 제가 대구 나왔을 때에 몇 년 안 있다가 (형제자매들이) 다 결혼했으니까 결국 엄마하고 저 둘이 사는 택이죠.

세진은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 말의 억양이 강할 뿐 아니라 다양한 경상도식 표현을 사용했다. 개성 있는 말투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맞춤법에 맞지 않더라도 그대로 전사와 인용을 했다.

시골에 있다가 조금 놀랬는 거는 시골이다 보니까 시험 이런 게 없었어요. 시험이 뭔지도 모르고 대구 시내 나오니까 학교에서 시험을 치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니까 적응하는 데 좀 걸렸지, 한 2, 3년 정도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와 가지고 시험 치고 뭐 전혀 생활이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이었죠. 왜냐하면 아버지 안 계시지, 누나들 다 나갔지, 엄마하고 나와 있으니까 조금 키도 좀 작은 편이었고. 뭐 그렇게 지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도시 생활에 대해서 별로 뭐 적응을 쉽게 못 했었죠.

그 당시에 70년대니까, 70년 초니까 그런 걸 모르고 나왔다가 한 5학년, 6학년 정도 됐을 때 ‘그렇구나. 도시가 이런 거구나’ 처음 알았고. 제가 바나나를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먹어봤나 그래요. 바나나를 못 먹어 봤는데 대구 오니까 막 바나나도 있고 막 뭐 하여튼 그랬었어요. 시골에서는 진짜 사탕 하나 주는 거, 안 그러면 또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주는 빵. 그거 받는 재미로 학교 갔는 것 같은데 도시에는 뭐 먹을 게 좀 많더라고. 근데 그만큼 사 먹지는 못했었어요.

하루에 버스가 두 번 들어오는 시골에 살던 소년의 눈에 대구는 큰 도시였다. 이사 온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적응하고 학교생활도 즐길 수 있었다. 당시 세진은 대학에 간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형, 누나들도 다 대학에 가지 않았고 곧바로 취업 나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환경이었다.

제가 공고를 나왔는데 그때는 이제 공고 갔으니까 엔지니어 계통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이제 막내고 저 큰 집에도 저기 어머님이 혼자 계셨어요. 큰 집에도 큰 어머님이. 그래서 저희 집에는 아들이 둘이고, 형하고 저하고 있다 보니까 제가 그러니까 어머니 앞으로, 큰엄마 앞으로 양자로 갔어요. 고등학교 때 호적을 이렇게 해놔가지고 그러다 보니 부(父)사망 독자로 군 생활을 다 못하고 빨리 제대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나오자마자 바로 그냥 직장 생활을 시작해 가지고 18살 때부터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3학년 되자, 바로 취업 나왔으니까요. 그때부터 직장생활 한 거죠.

취업 나갔는 데가 그 곤로 난로라고 잘 모르시죠? 지금으로 따지면 우리가 전부 다 불 딱 켜면 가스렌지잖아요. 그때는 기름 넣어가지고 불 피우는 게 있어요. 심지어 이렇게 TV에 보면 가끔 나오는데 난로도 보면은 왜 심지 붙이는 게 있어요. 이 곤로 난로 만드는 회사였었어요. 밥솥, 커피 포트 이런 거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었어요. 그래서 3년 다녔었습니다. 딱 좋은 거는 제가 그 당시에 첫 직장에서 만난 친구들 아직도 모임을 하고 있어요. 82년도, 83년도에 만난 친구들하고 현재 부부 모임하고 있어요. 하여튼 그거는, 예 아직까지 벌써 82년도니까 40년? 40년 넘었죠.

곤로(こんろ)는 우리말로 풍로, 화로를 가리키는 일본말이다. 곤로는 석유, 가스 등을 연료로 열을 발생시켜 음식 조리를 하거나 난방하는 데 사용되었다. 1980년대까지 가정집에서 흔하게 사용되었으나 가스레인지의 등장으로 점차 사라져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사양산업에서 성장산업으로

곤로 난로 회사에서 3년을 일한 후 세진이 발을 들이게 된 산업은 이름조차 생소한 반도체 산업이었다. 돌아보면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용이 줄어 저물어가던 사양산업에서 오늘날까지도 미래 기술로 각광받는 성장산업으로 발빠른 이동을 한 셈이다.

우연히 공고를 봤어요. 신문 공고를 봤는데 이제 제가 첫 직장이 S사잖아요. 그때는 반도체라는 게 없었잖아요. “반도체 산업의 첫 발을 딛는”, 그런 내용으로 나왔었어요. 신문에 이렇게 공고가 나왔길래 제가 넣었는데 됐어요. 운이 좋았는 건지 제 수험 번호가 620번이었으니까 한 천 명 넘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당시에. 근데 그때 우리 152명이 합격한 거죠. 공장도 짓기 전에 공장 터만 닦아놓고 들어가 가지고 3개월 교육받고 설비 들어오고 이제부터 웨이퍼라는 게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된 거죠. 첫발이죠.

(반도체가) 뭔지 모르죠. 왜냐하면 아무것도 모르니까. 웨이퍼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반도체. 그 당시에는 뭐 보고 했냐 하면 회사 이름 보고. 전부 다 신기했었죠. 장비도 국산 장비가 없었으니까. 일본 장비 아니면 미국 장비였으니까. 거의 다가 일본 장비가 대다수였었어요. 웨이퍼라는 게 그래가 탄생된 거죠.

1986년 11월, 반도체가 뭔지, 웨이퍼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세진은 S사에 들어갔다.

그건(웨이퍼의 쓰임은) 잘 몰랐습니다. 그냥 이 웨이퍼 한 장이 얼마 안 하지만 뭐 10만 원도 안 했지만 8인치 웨이퍼나 6인치 한 장 만들면은 삼성전자 가면은 그랜저 한 대 나온다. 이 정도만 알았어요. 칩으로 만약 절단하면은 10만 원짜리 하나가 몇천만 원 된다 그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웨이퍼를 만드는 일

제가 이제 3개월 교육받고 배정받은 게, 공정이 여러 개 있잖아요. 잉곳은 이제 보셨으니까 알잖아요. 이렇게 키우잖아요. 저는 이제 절단 공정이 있습니다. 절단. 잉곳을 이렇게 키워서 오면은 그것을 웨이퍼로 한 장씩 만드는 거예요. 웨이퍼 얇게 이렇게 절단하는 공정이에요. 처음에 배치됐었어요. 절단 공정.

반도체 웨이퍼는 반도체 소자, 집적 회로를 만드는 원료로서 반도체 산업의 기본이 되는 재료이다. 가장 일반적인 웨이퍼는 실리콘(Si)을 통해 만들어지며 실리콘 대신 갈륨아세나이드(GaAs), 사파이어(Al2O3)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본재료를 고온에서 녹여내어 일정한 방향으로 성장시킨 원기둥을 잉곳(Ingot)이라고 하며, 이를 얇은 박판으로 자르면 웨이퍼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절단 공정이다. 절단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결정방향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엑스레이(X-ray) 장비를 사용하여 이루어진다. 절단 후에는 모서리 연마(Edge grinder), 웨이퍼 표면 연마(Lapping), 식각(Etching), 세정(Cleaning) 등의 후공정을 거쳐 웨이퍼가 완성된다.(강세진(가명) 재해경위서. 2018.)

웨이퍼 제조 공정 ⒸLX 세미콘

엣지 그라인더(edge grinder)하고 에칭(etching)하고 래핑(lapping)하고 폴리싱(polishing)하고 이 뒷공정인데 주가 이제 절단이었고 뒷공정은 다 배웠죠. 왜냐하면은 그때부터 제가 조금 조짐이 있었어요. 뭐냐 하면은 절단하면은 결정 방향을 찾아요. 엑스레이를 이용해가 결정 방향을 찾는데 저희들이 엑스레이를 쏘니까 3개월마다 저희들이 백혈구 검사를 했었어요. 그런데 유독 제가 많이 떨어졌었어요. 처음에는 만 정도 됐었는데 8천, 그다음에 또 뭐 하면은 6천, 그다음 하면 5천. 5천까지 괜찮다고 했는데 제가 5천 이하로 떨어지니까 또 뭐 3천까지 또 괜찮다 캐가지고 또 4천 하다가 인자 3천 이하로 떨어진 적이 있어요. 2400 떨어지니까 이거 큰일 났다 싶어서 그래서 공정을 이제 그다음 공정으로 또 배치가 됐죠. 그래가지고 뒷공정에서 많이 돌아다녔죠.

백혈구 수치의 정상 범위는 혈액 1μL(마이크로리터)당 4,000-10,000개이다.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는 것은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한 징조였겠지만 당시에는 수치가 떨어지면 후공정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S사에서는 15년 정도 일을 하고 나오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뭐 좋은 회사는 안 다녔었는데 나름대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그래도 대기업에 비해서는 아주 열악한 회사였었어요. 근데 S사에 들어가고부터 생활이 확 바뀌었죠. 모든 게 환경이라든지 급여라든지 이런 게 확 바뀌고 이제 눈이 떠였어요. 제가 좀 성실한 편이에요. 남들보다. 요즘이야 뭐 임금 다 그냥 똑같이 올라가지만은 그 당시에는 그래도 조금 잘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한 호봉씩 더 받는 그런 시대였었어요. 한 15년 다니면서 15년 동안 한 호봉씩 계속 더 받았었어요. 제 동기들보다. 그 정도로 그냥 인정받고 들어가 가지고 성실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퇴사할 때까지만 해도 연봉으로는 제 동기들 150명 중에 공동 1위였었어요.

진단받기까지 16년 동안 거친 6개 회사

S사 퇴사 후 세진은 2000년부터 2013년까지 작은 사업체들을 옮겨 다니며 새로운 도전을 했다. 실리콘 반도체가 아닌 화합물 반도체를 제조하는 데 참여한 것이다. LED를 제조하는 데에는 웨이퍼 재료로 실리콘 대신 갈륨아세나이드(GaAs), 사파이어(Al2O3)가 사용된다. 갈륨아세나이드는 붉은색 LED 소자이고, 사파이어는 청색, 백색 LED 소자이다. 원재료만 다르고 잉곳을 키우는 방식과 절단하여 웨이퍼를 만드는 방식은 유사하다. 그 이후 중소업체 규모의 T사에서는 SiC(실리콘카바이드) 웨이퍼와 SiC 링의 세정을 주로 담당했다.

그러고 난 뒤에 그 세정 공정을 맡아 가지고 그 뒤에 했는데 그래서 이제 약품을 좀 많이 사용했고, 불산을 좀 많이 사용하는 공정입니다. 그 앞에서도 제가 약품 처리를 많이 했었어요. 뭐 황산, 질산, 불산, 암모니아, KOH(수산화칼륨) 이런 거 다 사용했었는데 유독 여기에서 셋업 한다고 불산을 좀 많이 했어요. 초음파 측정을 하다 보니까.

(그 다음) 옮긴 회사가 어디냐 하면 웨이퍼 재생하는 회사로 제가 옮겼습니다. 예전에 갈륨아세나이드 하는 데 같이 나온 친구들이 그때 12명 나왔거든요. 거기에서 몇 명이 이제 회사를 웨이퍼 재생하는 회사를 만들었어요. 그 회사로 이제 제가 가게 됐는데 거기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갑자기 백혈구 수치가 이상하다고 빨리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가지고 대학병원 가가 받았는 게 만성 골수성 받았습니다.

회사 이름은 달라졌지만, 반도체를 만들기 위한 웨이퍼, 부품을 생산하는 사업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진은 S사에서 제대로 배운 하나의 기술을 가지고 여러 방식으로 접목과 응용을 시도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 이름은 인터뷰이의 요청으로 가명으로 처리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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