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초점]
임박한 공황과 노동운동의 대응
지금 즉각, 총파업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제공 :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제 6장은 11월 26일에 작성된 것입니다)
6. 대공황 속에서의 내외 독점자본의 움직임
6.1. 공황의 역동적 전개 양상
(1) 신용(금융)공황에서 산업(실물)공황으로!
공황은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에도 불구하고 봇물 터지듯이 터져나가고 있
다. 24일 월요일, 증권시장에서는 주가가 대폭락을 했다. 언론은 일제히 이날을
‘검은 월요일’이라고 보도했다.
이날자의 환율은 드디어 1,130원까지 올라서 1,100원 대로 진입했다. 이것은
종금사들의 외화 차입난이 계속되면서 달러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이었다. 주식
은 투매 물량이 쏟아지면서 종합주가지수가 14.79% 포인트 급락한 450.64에 마
감되었다. 이 수치는 87년 7월 9일의 441.02 이후 10년 4개월만에 최저의 수치
였다. 한편 이렇게 신용공황이 진행되면서 화폐자본 분파들이 돈주머니를 바짝
조이고 있다. 그래서 ‘검은 월요일’의 회사채 유통수익율은 연 16.05%로 마감되
어 전날보다 무려 1.55% 포인트나 폭등했다. 이것은 92년 9월 2일의 16.13% 이
후 5년 2개월만에 가장 높은 수치였다.
이런 양상은 25일에는 더욱 악화되었다. 증시는 25일에는 드디어 전면 마비되
었다. 주가는 전날에 이어 폭락하여 한때 420 대로 내려갔으며 439.59에 마감되
었다. 환율은 25일에도 오름세를 계속하였다. 금리는 25일에도 계속 상승하여
17.6%로까지 뛰어올랐다. 이러한 양상은 26일에는 더욱 악화되었다. 금리는 또
다시 전날보다 0.95% 포인트가 올라서 18.55%를 나타냈다.
그러나 조조정의 소용돌이에 대한 우려감이 높아지면서 금융시장은 공간적으로만 존재
할 뿐 거래는 정지되는 심각한 신용공황 상태를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
수 악화보다 더 큰 문제는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지금보다 사정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으로 환금성(換金性)이 낮아져 시장이 제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주1) 동아일보 11. 25일자의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주가
450….. 19년만에 최저, 금리폭등 자금시장 마비”로 되어 있다. 이날자 한국일
보의 경제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금융공황’… 자금시장 마비”로 되어 있다.
26일자 한국일보의 머리기사 제목은 “자금시장 전면마비”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내 최대의 2대 재벌인 삼성과 현대 그룹 계열사들이 회사
채를 발행하려 했으나 실패했다.*주2) 이렇게 외환시장에 이어 증권시장이 공황
상태를 드러내자 증권시장 객장에서는 “주식 거래를 중단시키라”는 투자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이에 임창렬 신임 부총리는 24일 하오 급히 증권시장을 방문
하여, ‘증시 안정화’를 위한 특별대책을 강구하겠다고 에도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26일에도 앞으로 증권사가 보유하고 있는
RP(환매조건부 채권)를 3~4조 원 가량을 한국은행이 매입하는 등 증권사들을 지
원할 계획–결정이 아니라–이라는 대책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이렇게 하여 ‘금융자본 세계화 시대’의 공황의 특징 그대로, 공황은 외환시장
으로부터 증권시장으로 파급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다. 공황은
자본주의에서 공황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신용(금융)공황으로부터 산업(실
물)공황으로 파급되어 나가고 있다.
현대, 삼성이 회사채 발행에 실패했다는 것은 국내 최대의 재벌도 이 공황에
서 전혀 비껴서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들이 이
시기에 급히 회사채 발행을 서두른 것은 그들의 자금사정이 극히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들이 내놓은 회사채가 팔리지 못했다는 것은 화폐자본
이 이들에 대해서까지도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는 심한 불안감에 빠져 있음을 보
여준다. 그렇다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의외의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이
들 최대급 재벌도 부도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최대급의 재벌이 이러하다면
여타의 재벌들이나 중소기업들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주3)
이렇게 해서 산업자본은 자금이 부족해서 추가자금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
는 시기에 화폐자본은 오히려 자금을 내놓지 않으려고 돈주머니를 더욱 조임으
로써 산업자본이 무너지는 것을 재촉하고 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
황이 계속, 금융기관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수적(‘빡빡하게’라는 뜻이다 : 필
자)으로 자금을 운용할 수밖에 없다”고 화폐자본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산
업자본은 “기업들의 비축자금이 떨어지는 내년 2월께 무더기 도산이 우려된다”
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융실명제 폐지 등 극약처방이 없는
한 주가가 4백선 밑으로 하락할 가능성도 높다”고 전망하고 있다.
(2) 한국경제의 공황에서 세계경제의 불안정으로!
자본은 지구화니 세계화니 하면서 그것이 자기들에게 전 세계적 범위에서 노
동자.민중을 지배하게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저들의 그러한 기대
는 지금 장미빛으로부터 흑장미빛으로 변색되고 있다.
아무런 조절 장치도 없는 환경에서 자본은 결코 축적을 지속할 수가 없다. 그
들은 이 점을 망각한 것이다. 민족국가라는 장치가 없이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에
게 착취를 강제할 수도 없고 민중에게 수탈을 강제할 수도 없다. 일시적으로는
모르나 지속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민족국가 없이 노동자.민중의 저항
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민족국가의 지배계급이라는 헤게모니적 지위를 가지
고서만 그러한 것들이 가능하다. 민족국가는 자본 상호간의 관계를 조정하고 자
본의 무정부성을 누그러뜨리고 하는 등의 조절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국가의 권위로 탄압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때로는 변혁적으로 진출
하는 대중에 대해 개량을 통해 무마하는 조절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민
족국가 없이는–세계국가가 출현하지 않는 한–자본은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주4)
그런데 초국적 자본은 70년대의 자본축적의 구조적인 위기–흔히 ‘스태그플레
이션’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벗어나는 돌파구로서 민족국가의 역할(조절과, 조
절을 위한 규제)을 억압하는 역할만 남긴 채 대폭 약화시켰다. 그러면서 국내적
으로는 ‘유연화-착취’를 도입하는 한편 국제적으로는 세계적 범위로 영역을 확
장하는 것–그래서 ‘범위의 경제’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을 적극적으로 추구했
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자본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정부성–경쟁이라는
동전의 뒷면–과 화폐자본의 부패성의 무한한 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무정
부성과 부패성이 제거된다고 세계화의 모순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무정부성과 부패성이 모순을 심화.격화시키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때마침 25일 캐나다 벤쿠버에서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가 열렸다. 이 회의는 지난해만 해도 장미빛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으나 이번
에는 먹구름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다. 벤쿠버 유력 신문인 벤쿠버 선 지(紙)는
‘한국 금융위기가 APEC에 먹구름을 드리우다’는 제하의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게재했다. “각국 대표단과 언론은 세계 11번째 경제대국인 한국의 금융위기가
일본과 남미를 거쳐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지역에까지 상륙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
지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21일부터 열리고 있는 각료 및 정상회의에서는 예정
됐던 기본의제인 지역 내 인프라 구축 문제나 투자.무역 조기자유화 대상선정
등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한국 및 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대책이
최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주5) 그리고 ‘한국 금융위기에 대한 비상대책 모
임’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는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해 경제협력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고, 필리핀 수빅에서 열린 제4차 정상회의에 으스대며 참여
했을 때와 딴판의 모습이다”*주6)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태 경제협력체 정상회
의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23일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벤쿠버 도심에서 가두시위
를 벌였다.*주7)
그러나 이처럼 세계가 한국의 공황에 대해 비상하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한국이 11위의 경제대국이라는 데서 오는 심리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다. 거기에
는 뚜렷한 물질적인 이유가 있다. 전문가의 얘기를 들어보자.
“한국 금융위기는 동남아 금융위기와 또다른 것이다. 지난 35년간에 걸친 고
속 경제성장의 결과로 한국은 세계 11대 경제국인 동시에 11대 교역국으로 성장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빌려다 썼고, 엄청난 규모의
교역을 하고 있다. 만약 한국경제가 부도를 내고 파산하는 경우에는 전 세계가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다. APEC 회원국들은 물론 모든 나라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바로 한국의 금융위기인 셈이다”, “미국의 프레드 버그스텐 박
사는 한국 금융위기의 여파로 세계적 불황과 무역전쟁의 가능성을 걱정한다.”*
주8)
이렇게 한국의 공황이 심리적, 물질적 이유로 인하여 세계적 공황으로 또 무
역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초국적 자본(미.일 등)은 자못 긴장된 대
응책으로 나오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 클린턴은 한국경제가 완전한 파산으로 주
저앉지 않도록 홍보전에 나서고 있다. 그는 APEC 정상회의에서 “한국인들은 매
우 강력한 경제체제와 큰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한국이 지난 수십년 간 이룬
성공을 감안한다면 분명히 한국경제의 장기적 전망에 대해 그 누구도 실망할 수
없다고 본다”며, “세계 각국은 이 지역의 금융위기를 안정시키기 위해 힘을 모
아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진화작업에 나섰다.
한편 일본에서도 금융계가 불안한 조짐을 드러내고 있다. 24일 일본 4대 증권
사 중의 하나인, 1백년 전통의 야마이치 증권이 경영난을 이유로 자진 폐업하기
로 결정하는 등 일본경제에 도산 도미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중견 증권사인 산요증권과 10위권 시중은행인 홋카이도 다쿠쇼쿠 은행이 차례로
무너진 데 이은 것으로서, 이 연쇄도산으로 일본경제가 충격파에 휩싸이고 있
다.*주9) “이와 관련 4대 증권 가운데 또 한군데와 10위권 안에 드는 야스다 신
탁은행이 곧 부도를 낼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주10) 또 26일
에는 일본 제2의 지방은행인 도쿠요시티 은행(본점 센다이)이 경영난으로 도산
했다. 도쿠요시티 은행의 파산은 일본 금융시장이 본격적으로 위기상황에 돌입
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세계경제의 불안한 모습과 관련되는 신문 보도 몇 가지만 추려보아도
사태의 심각성은 충분히 감지될 수 있다.
“전 세계의 73년의 하루 외환 거래액은 1,500억 달러였고 87년에는 1,900억
달러였으나…… 10년이 지나지 않은 95년에는 무려 1조2천억 달러로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다.” “이 가운데 성장시장으로 주목된 아시아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
도 엄청난 뭉칫돈이 유입됐다. ….. 신흥 성장시장으로의 민간자본의 유입은
지난해에 3,360억 달러로 폭증했다.”
“타이 홍콩 한국 등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이들 밀물처럼 들어왔던 외국자
금들이 해당국의 경제상황 악화 등을 배경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다.” “이 지역을 떠돌던 뭉칫돈들은 상황이 바뀌자 투기자본으로 돌변해 싱가포
르와 홍콩까지도 공략대상으로 삼았다.”
“일본은 어떤가. 동남아는 일본 전체 수출의 40% 안팎을 차지한다. 일본은행
들은 동남아에 30조 엔의 채권을 갖고 있다. 이제 초점은 일본이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금융위기는 본격적인 세계경제의 금융공황을 몰고 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주11)
‘수출증가 = 호황’이라는 상식이 깨진 오늘의 일본경제는 ‘조용한 공황’으로
불린다. 무역 쪽에서만 보면 일본경제는 여전히 최우등생이다. 엔화 약세 덕분
에 자동차와 컴퓨터 정밀기기를 중심으로 수출이 급증하고 있다. 올 들어 9월말
까지 무역수지 흑자는 6조5천9백억 엔,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39.7%나 늘었고
이미 연간 흑자액을 넘어섰다. 그런데도 2/4분기(4∼6월) 성장률이 마이너스
2.9%를 기록하는 이변이 발생했고, 올해 연간 성장률은 1% 대에도 미치지 못할
전망이다.”
“일본 경기불황의 주범은 극심한 내수부진이다. 정부가 재정적자 탈피를 위해
지난 4월 소비세를 종전의 3%에서 5%로 2% 포인트 올린 것이 그 계기였다.”
“올들어 9월까지의 기업 부도는 부채액 기준으로 이미 8조5천억 엔을 기록해
연말까지는 사상 최초로 10조 엔을 넘을 것이 확실시된다. 고용불안도 심각하
다. 9월 말 현재 완전실업자 수는 2백36만 명으로 작년 말에 비해 11만 명 증가
했다.”*주12)
“일본의 금융위기는 미국과 유럽의 금융시장에도 부담이다. 일본은 미국 국채
의 가장 큰 매수세력, 자금이 쪼들리면 일본은 보유채권을 파는 수밖에 없고 이
는 당장 미국채권 가격을 떨어뜨린다. (한편 : 필자) 서구 자본들이 일본에 대
한 채권투자를 기피하면 일본에서 돈이 빠져나가면서 엔화가치가 떨어진다. 또
교역 부진으로 서구의 주가가 동반하락하면 금리는 오르고 기업부담은 커지며
경기는 후퇴한다. 야마이치 증권 도산 후 뉴욕증시의 주가하락이 이를 보여준
다. 국제금융시장은 일본정부의 대응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주13)
“한국의 주가폭락과 일본 야마이치 증권의 폐업 등 겹친 악재로 25일 아시아
각국의 증시의 주가와 화폐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지고, 일본의 엔화의 환율은 5
년 3개월만의 최저치인 달러당 128.05엔을 기록했다. 일본 도쿄증시의 닛케이
평균주가는 이날 개장 초부터 약세를 보이기 시작, 854.05엔(5.1%) 떨어진
15,867.53엔으로 끝나 1만 6천엔 대가 다시 무너졌다.”*주14)
“한편 뉴욕 증권시장(NYISE)의 다우존스 지수는 24일 전날보다 113.15 포인트
(1.4%) 하락한 7,767.92로 폐장됐다. 또한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 지수도 전날
보다 87.2 포인트가 빠진 4,898.6을 기록했으며,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시의 주
가지수도 3,830.63으로 전날보다 129.06 포인트가 급락했다.”*주15)
“마스즈까 히로시 일본 대장성 장관은 24일 야마이치 증권 자진폐업과 관련,
긴급 회견을 갖고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공공자금 투입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고 밝혔다.”*주16) “일본 정부가 금융시장에 대한 공공투자 투입 의사를 공식적
으로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APEC에 참석 중인 메들린 울브라이트
미국 국무부 장관은 23일 노부치 게이조 일본외상과 회담, 야마이치 증권 도산
에 따른 금융불안의 조기해소(와 이를 위한 내수확대)를 촉구했다.”*주17) “일
본은행은 25일 야마이치 증권 도산 사건과 관련, 단기금융시장의 자금경색을 막
기 위해 7천억 환을 위해 수천억 엔 규모의 특별융자도 추진키로 했다.*주18)
“일본의 특수성에 공격을 개시한 시장원리의 뒤엔 서구의 ‘글로벌 머니파워’
(초국적 금융자본)가 도사리고 있다. 시장개방과 정보의 투명성, 자유로운 활동
을 요구하는 서구 투자가들은 자신의 금융철학에 반(反)하는 아시아 국가들을
차례차례 공략한 뒤 이젠 일본을 노리고 있다.”
“보편적인 시장원리를 강요하는 아시아 금융위기의 태풍은 동남아와 한국을
거쳐 동진(東進)을 거듭, 일본상륙을 시도하고 있다.”*주19)
그러면 동아시아의 연쇄 공황의 단초를 열었던 태국에서는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가? 태국에서는 지금 92개 부실 금융기관 통.폐합이 진행되고 있다. 사실상
모든 금융기관이 기능불능에 빠져서 경제전체가 거의 마비 상태에 있다.
“태국은 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정부재정 지원 하
에서 대대적인 금융기관 통.폐합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방콕에서 발행되는 영자
일간신문 네이션 지가 보도했다. ….. 이미 영업정지된 58개 사는 물론 아직은
영업 중이나 상태가 좋지 않은 로 하고 있다.”*주20)
동아시아의 공황은 이렇게 넉달 전 이 금융태풍이 처음 불어닥쳤던 곳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붙으며 인도네시아
와 한국을 거쳐 초국적 자본 경제인 일본경제까지도 공황이라는 태풍권 속으로
휘몰아넣고 있다. 그리고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3) 동아시아 정치·군사적 질서의 개편으로!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지배를 재편.강화하고자 하고 있
다. 미국의 뉴욕 타임즈는 24일 아시아의 경제위기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조
정될 수밖에 없으며, 그 첫 시험대가 대북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지금까지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은 아시아의 지속적인 성장을 전제로 한 것이었
다고 전하고 아시아의 경제위기로 북한의 붕괴에 대비한 정책, 아시아 나라들의
무기구매 증대를 통한 중국 군사력에 대한 대응 등이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
었다고 밝혔다.
이 보도에 따르면 아시아 나라의 정치적 힘은 경제적 힘에서 출발한 것인데,
경제적 힘이 위기에 놓이게 됨에 따라 정치적 힘도 줄어들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즈는 그 첫 시험대가 한반도라고 지적하고, “한국경제가 위기
에 빠짐에 따라 한국이 경제력을 무기로 사용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
며, 따라서 한국의 경제력을 전제로 한 미국의 대북정책의 전제가 크게 바뀌게
됐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26일로 예정된 북.미간의 준고위급 회담이 워싱턴의 미 국무부 청
사에서 열리게 된다. 뉴욕의 4자 예비회담에 참석했던 김계관 외교부 부부장이
사상 처음으로 국무부 안에서 공식적인 회담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회
담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예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앞으
로도 관심있게 지켜볼 대목이다.”*주21)
한편 클린턴은 APEC 정상회담 참석차 벤쿠버로 향하면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핵심 목
표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라며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항구적인 평화를 위
해 열리는 다음달 4자회담에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주22)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를 확인 내지 추정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의 공황은 그 비중이 멕시코나 동남아에 비해 현저히 크며 세계적인
불황과 불안정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특히 한국의 공황이 일본의 공
황과 겹쳐져서 진행될 경우에는 세계적인 공황으로 비화될 가능성까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사태 전개를 미국이 주도하고 있으며, 미국은 이를 계기로 하여
동아시아 경제에 있어서 자신의 지배력을 집중적으로 강화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집행하는 제도적 기구로 IMF를, 이것을 관철하는 자본운동
의 메커니즘으로서 미국계 초국적 금융자본(그 첨병이 헤지펀드들이다)의 투기
적 활동을 사용하고 있다.*주23)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 보다 구체적으로는 일
본과 한국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격하되는 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은 이러한 경제적 질서의 개편을 정치.군사적 질서의 개편과 긴밀히
맞물려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단정하기 어렵다. 그
러나 추정컨대 일본과 중국의 세력을 동시에 약화시키는 방향이 될 것이고, 그
지렛대로 한반도가 이용될 것이다.
그렇게 나아가는 데 있어서 현재의 국면에서는 일본과 한국을 통제하고 그 지
위를 상대적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미국이 노리는 지점이다. 그래서 클린턴이
APEC 정상회의에서 고촉동 싱가포르 총리(중국계)와 골프를 치는 한가함을 연출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일본 경제권을 통제한 바탕 위에서 중국 세력과
대면하여 그들을 제어하려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주24)
6.2. 파국 확대의 적정 수준 조절 : 공황의 관리
6.1에서 보았듯이 공황은 예측하기 어려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아무리
초국적 자본이 지배력을 가지고서 전략.전술적으로 사태에 임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로서도 상황을 완전하게 통제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물며 국내의 총자본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대한 상황을 관리하여 경제순환
과정의 완전한 파탄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 초국적 자본
먼저 미국을 비롯한 초국적 자본의 대응을 보자.
그들은 첫째로 한국의 공황이 심리적으로 불안감을 증폭시켜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클린턴의 행보는 이런 점에
서 연출가답기까지 하다. 그는 한국경제의 장래가 “낙관적”이라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 그는 23일 오전 캐나다 크레티앙 총리와의 회담을 마치고 한 공동
기자회견에서 “지금은 우리가 아시아와, 대아시아 관계의 장래에 대해 신뢰를
가져야 할 때다. 우리는 길에 자그마한 돌멩이 몇 개를 만났지만, 이것들을 헤
쳐 나가기 위해 일하고 있다.” “한국은 큰 잠재력이 있는 막강한 경제를 갖고
있다. 한국은 구조조정을 하고,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생산능력을 회복하고 경
제 성장을 시켜야 한다. 지난날의 괄목할 성취에 비춰 볼 때 한국 경제의 장기
적 전망은 희망적이다.”라고 말했다.*주25) IMF의 구제금융을 강요할 당시 미국
관리들이나 언론의 주장과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일본이나 싱가포르, 대만 등으로 하여금 한국공황에 지원하도록 권유
하고 있다. 한국의 공황이 악화되면 그 파급이 일차적으로 동아시아 경제에 미
칠 것이므로 이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을 대(對) 한국 지원에 동
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일본의 지원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 동안 일본은 경제에 관한 한 이
지역에서 맹주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막대한 국제수지 흑자와 외환 보유고를
가지고 있다. 이 일본에게 이 지역 경제의 붕괴에 대한 짐을 지우고자 하고 있
다.
넷째 그와 동시에 일본 자체가 위기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데 대하여 그것
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심지어 규제를 완화하고 내수시장을
확대하라는 등 구체적인 정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은 공공자금을
푸는 것을 비롯하여 현재의 일본 자체의 금융위기를 해소하는 데 적극 대응하고
있다.
요컨대 미.일 초국적 자본들은 미국의 주도 아래 한국의 대공황이 세계적인
공황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데 긴밀히 협조하면서 비상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2) 국내
그러면 국내 총자본은?
국내 총자본은 지금 공황을 관리할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다. 경제부총리가 증
권시장을 급거 방문하였지만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대책을 보자!
공황이 파국적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 대해 국내 총자본이 시행하고 있
는 거의 유일한 대책은 한국은행을 통해 시중은행에 돈을 마구 푸는 것이다. 사
상 최대의 주식 폭락, 금리 폭등으로 자금시장이 극도로 경색되었던 지난 24일
에는 하루 동안에만 무려 5조 7,332억 원의 돈을 은행에 공급했다. 한국은행은
이날 통화량 조절(통화량의 지나친 팽창을 막는 것)을 위해 시중은행에 팔았던
통화안정증권을 다시 사들이는 방식을 통해 1조 1,100억 원, 환매조건부 국공채
(RP)를 매입하는 방식을 통해 4조 6,222억 원을 공급했다. 하루 자금 공급 규모
로는 사상 최대의 규모였다. 이어 이튿날인 25일에도 다시 RP 매입을 통해 1조
원의 돈을 더 풀었다.*주26)
이렇게 하여 공황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이래 한국은행이 공급한 유동성
(즉 현금)은 벌써 10조 2,000억 원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전경련이 요구한 10
조 원 규모의 한국은행 특융이 더해진다면 우리나라 1년 예산의 거의 30%에 가
까운 돈이 일시에 시중에 풀리는 셈이 된다
한편 이렇게 많은 돈이 은행으로 풀려나와도 금융권에서 가장 취약한 종금사
쪽으로는 돈이 돌지 않고 있다. 은행들이 언제 부도가 날지 알 수 없는 종금사
들에게 자금을 공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금사가 돈줄이 막히면 종금사
자체가 부도가 나거나 재벌의 어음 할인을 중단하게 된다. 그러면 극심한 자금
난에 허덕이는 몇몇 재벌들이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그 여파는 다시 종금사는
물론 은행에까지 파급되어 종금사, 재벌, 은행이 연쇄도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정부는 은행들에 대해 종금사에 자금을 지원하
도록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25일 재정경제원 윤증현 금융정책실장과
임창렬 부총리가 연달아 은행 상무와 은행장들을 불러 모아 종금사에 자금을 지
원하도록 강요했다. 특히 윤증현 실장은 “다 같이 망하려 하느냐”며 은행 상무
들을 질책했다.*주27)
이처럼 국내 총자본은 일차적으로 한국은행을 통해 시중은행에 대량으로 자금
을 공급함으로써 은행의 신용기능(자금 공급)이 완전히 마비되는 사태를 막는
데 급급하고 있다. 그들은 부실 정도가 심한 종금사들이나 은행을 통.폐합하거
나 그 중 일부는 파산시키는 것도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종금사 중 몇 개라도 갑작스럽게 파산해 버린다면 다른 종금사는 물론
이고 재벌, 은행들이 연쇄적으로 줄줄이 무너지면서 겉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발
전할 수 있다. 한국은행을 통해 시중은행에 대규모로 돈을 풀고 종금사쪽으로도
돈이 돌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다.
통화안정증권이나 RP 매입의 방식이든 특융이라는 방식이든 한국은행의 발권
력을 가지고 대규모의 자금을 공급하게 되면 통화량이 팽창하고 물가가 폭등하
게 된다. 그것은 곧 노동자.민중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세금을 걷어서 정부재정
으로 은행의 부실채권을 사들이는 방법(금융산업의 구조조정에서는 이 방법을
쓰려고 하고 있다)과 겉모습은 다르지만 민중수탈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
다. 즉 노동자.민중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빈사상태에 빠진 은행과 재벌을 구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돈을 쏟아 붓는 것으로도 공황이 파국으로 치닫
는 것을 막는 데는 억 원을 쏟아 부었지만 주가 폭락과 금리 폭등을 막는 데 실패했다. 뿐만 아니
라 회사채나 기업어음의 금리가 천정부지로 치솟는데도 팔리지 않는 신용마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은행에 돈을 아무리 많이 풀어도 돈이 재벌들에게 잘 돌
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은행들 자신이 이미 막대한 부실채권으로 파산하거나 합
병될 처지에 놓여 있는데다(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돈을 비축해 놓아야 한다),
과중한 부채와 자금난으로 언제 부도날지 모르는 재벌들에게 돈을 순순히 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IMF 구제금융의 여파로 초(超)긴축과 경기침체가 예상되고 있어 돈 빌
려주는 것을 더욱 꺼릴 수밖에 없다. 심지어 4대 재벌조차 자금난을 겪기 시작
했는데 나머지 재벌이나 중소기업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따라 총자본은 또 하나의 비상대책을 내놓고 있다. 금융실명제를 폐기해
서 지하에 숨어 있는 검은 돈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재벌의 자금난에
숨통을 틔워 주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전경련과 5.6공 수구세력이 주도하는
한나라당은 이전부터 이것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그런데 공황이 파국적 양상
으로 전개되면서 국민회의 등도 여기에 적극 가세하고 있다. 총자본 차원에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검은 돈을 끌어들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무기명 장기채권 발행이
검토.추진되고 있다. 무기명 장기채권을 매입하는 사람이나 나중에 채권 시장의
유통과정에서 그것을 사는 사람에 대해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하며, 나아가 이
채권을 팔아 부동산이나 증권을 사더라도 마찬가지로 자금 출처를 따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 탈세 등 범죄행위로 만들어
진 검은 돈들이 처벌을 받지 않음은 물론이고 세금조차 내지 않은 채 합법적인
돈으로 탈바꿈할 수 있게 된다!(유보니 보완이니 하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그나마 쭉정이만 남아 있던 금융실명제는 이렇
게 대공황의 과정 속에서 완전히 폐기되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이렇게 금융실명제를 폐기할 경우 “30조 원으로 추산되는 지하
자금 중 상당액이 자금시장으로 유입되어 금융시장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주28) 이 중에 가장 큰 부분은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5.6공 세
력의 검은 돈이다. 요컨대 총자본은 면죄부를 주어서 5.6공의 검은 돈을 끌어들
여서라도 당장에 주식시장이 완전히 붕괴되고 재벌들이 자금난으로 줄줄이 무너
지는 것을 막아 보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황이 예측할 수 없는 양상으로 치달아 가면서 초국적 자본과 국
내 총자본은 공황이 파국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고 자신들의 통제하에서 어느 정
도 질서(?) 있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황에 대한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공황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초국적 자본이든 국내 총자본
이든 뚜렷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초국적 자본은 한국의 공황이 동아시아 경제의 약화와 더불어 세계경제의 불
안을 조성하는 것에 대해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또 국내 총자본은 한
국경제가 일단 공황 국면으로 들어간 이상 이것이 산업자본의 공황으로 확대되
고, 자본의 수익률이 회복되는 지점까지(자본의 가치감소가 이루어짐으로써) 지
속되는 것을 어쩌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공황이 세계공황으로
비화되거나 한국 경제의 완전 마비로 비화되는 것을 억제하는 수준에서 관리하
고 있을 뿐이다.
다른 한편 초국적 자본은 한국 재벌이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고 확장을 추구해
왔다고 비판해 왔는데,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초국적 자본은 적절한 수익성=이
윤율이 회복되는 지점까지 부실한 기업들이 무너지는 것을 방치할 뿐 아니라 오
히려 그것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이 진출해서
이런 과정을 통해 높아진 이윤율에 동참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국내 재벌
들처럼 금융특혜 같은 지대를 추구하지 못하는 그들로서는 이 조건이 꼭 필요하
다!
이렇게 초국적 자본의 압박까지 받게 된 국내의 총자본은 은행과 재벌들이 줄
줄이 도산.파산하는 파국을 모면하기 위해 한국은행의 돈을 마구잡이로 풀고
5.6공의 검은 돈을 끌어들이는 등 그야말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그
러나 그것을 통해서도 주가의 폭락, 금리의 폭등 및 그에 따른 자금시장의 경색
을 해소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그만큼 현재의 공황은 심각한 수준
과 양상, 즉 대공황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6.3. 공황을 계기로 한 구조조정의 강요
대공황 속에서 구조조정이 격렬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고되고 있다. 구조조정
에서는 기술적 능력의 향상만이 추구되는 것이 아니다. 구조조정은 각 세력의
이해관계에 의해 방향지어진다. 그런데 IMF를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므로 IMF가
강요하는 구조조정은 그들 초국적 자본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이루어진다고 보아
야 한다. 이것이 과학적인 인식이다!
그러면 초국적 자본의 이해관계는 무엇인가? IMF의 언행을 통해 알아보자.
IMF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 근거가 몇 가지 있다.
IMF가 대외정책 결정 시 내부적으로만 참조하는 정보자료는 지난 11일자 ‘한
국, 경기후퇴 위기’란 제목으로 환율의 추가하락을 예상하면서 “한국의 주요 재
벌과 은행들의 현상태를 감안할 때 경기가 후퇴할 진짜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
다. 이 자료는 또 “한국이 갖고 있는 1천1백억 달러의 채무 가운데 무려 8백억
달러가 1년 안에 만기가 도래하는 것들”이라면서 “이같은 단기 외채의 부담으로
인해 경영상태가 좋지 않은 일부 은행이 도산할 지 모른다는 우려가 늘고 있다”
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또 경제가 이같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이 여전
히 확대지향 경영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면서 그 예로 △동부그룹이 IBM
과 제휴 2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설립키로 한 것 △현대가 55억 달러
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키로 한 것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 등을 들었다.
이 자료는 그러나 한국경제에 긍정적인 조짐도 없지 않다면서 △무역 회복세
△시장개방 추세 △감량경영(다운사이징) 움직임 △외자에 대한 적대감 감소 등
을 들었다.*주29)
한편, 구제금융 지원을 협의하기 위해 한국에 온 IMF의 토머스 밸리노 실무협
의단 단장은 23일 오후 도착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대한 자금지원에서
금융시스템
그러면 초국적 자본(미국 및 EU이 주도하고 있는데)은 왜 금융개혁을 이른바
구조조정의 중심과제로 삼는 것인가? 얼핏보면 한국 경제의 외환위기가 은행의
방만하고 부실한 경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잡아야 기업의 무모한
확장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지극히 중립적이고 합리적으로 약소국을 도와주는
견지에서 금융개혁 문제를 중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참으로 그러하다면 그들은 어째서 세계경제를 그토록 교란시키고
있는 은 것은 어째서 불법이라고 선언하지 않는가? 이처럼 그들의 언행은 초국적 금
융자본의 이해관계의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의 이해관계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들이 그 동안 주장해 온 것
을 보면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아시아 경제의 옳지 못한(!) 관행을 타파하
지 않고서는 자기들의 진출이 확대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시아 경제
성장 모델은 나라별로 구체적 양태에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국가
주도성이 강하다. 국가가 은행을 통제하고 이것이 민간자본을 통제하는 형태이
다. 1994년 이전의 멕시코도 그러했다! 이런 형태 하에서는 순전히 자본의 이윤
추구 논리에만 입각해서는 시장에 접근하기도 어렵고 초국적 자본이 토착자본을
경쟁에서 제압하기도 어렵다. 시장 논리만이 아니라 ‘민족의 발전’이라는 정치
논리가 크게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국적 자본은 이 지역의 시장
을 장악.지배하기 위해서는 이 국가주도 모형 내지는 국가와 민간자본의 유착
모형을 깨뜨리는 것을 전략적 방향으로 삼게 된다. 특히 국가주도 경제운영 모
형에 의거하여 민간자본에게 국내시장을 보호해 주면서 초국적 자본의 진출에
국경이라는 장벽을 만드는 것은 반드시 타파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것들을 관철함에 있어서 약한 고리가 바로 금융 부문이다. 금융 부문은
정경유착으로 부실한 채권을 많이 떠맡게 되어 취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융 부문은 또한 초국적 자본의 공격에 있어서 중심고리이다. 은행을
공략하면 재벌과 관료 사이의 자본-은행-관료의 연계고리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초국적 자본이 금융개혁을 제1차적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금융 부문을 공격해서 이른바 아시아적 모형을 무너뜨리면서 초국적
자본은 앵글로 색슨적인 신자유주의 착취방식을 도입하도록 강요한다. 국가독점
자본주의적으로 국가가 경제를 조절하는 것은 자기들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약소
국에서도 폐지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본의 자유롭고 무자비한 임금노예적
착취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 자기들이 진출해야 안심하고 이윤
을 벌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구조조정의 또하나의 축은 그 유명한 ‘규제완화’
이다.
다음은 시장에서 토착 독점자본을 제압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토
착자본들은 갖가지 제도와 관행으로 외래 자본에 대한 진입장벽을 만들어 놓고
있다. 초국적 자본이 재벌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한
통속인 그들이 이 땅의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재벌을 비판하겠는가? 예컨대
재벌은 자유로운 기업 매수.합병에 반대한다. 이것은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제
한한다. 자본시장이 개방되어도 이 조건이 해결되어야만 초국적 자본에게 초과
적 이윤을 보장해 줄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이 구조조정의 또하나의 중요한 항목
이 되는 것이다. 정부의 규제만이 아니라 시장에 대한 갖가지 장애물들도 제거
되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는 시장의 대외개방이다. 이것은 IMF가 직접적으로 또는 전면적으로 강요
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미국 EU 일본 등 초국적 자본 국가들 및 OECD, WTO,
IBRD 등의 여타 국제기구와 공조하여 반드시 관철시키고자 할 것이다. 즉 상품
시장, 금용(자본)시장의 개방을 전면화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초(超)긴축이다. 이것은 앞의 모든 것들(그리고 노동자.민중에 대한
총공세도 포함하여)을 강요하는 데 있어서 국가경제 전체적으로(즉 거시경제적
으로) 유리한 여건을 조성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노동시장에 대한 자유화 즉 이른바 유연화이다. 이것이 없이는 초
과적인 높은 이윤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윤의 원천을 만들어 내는 부분
이다. 따라서 가장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뜻이 애매모호한
구조조정이란 다름 아닌 바로 이런 것들이다!(노동시장의 자유화에 관한 부분은
아래의 6. 4 ‘내외 독점자본의 노동자.민중에 대한 총공격’ 항에서 다른 총공격
들과 함께 다루기로 하겠다.)
(1) 금융개혁
금융개혁은 IMF의 최대의 관심사항이다. 금융개혁은 금융을 이른바 관치금융
으로부터 탈피시키고 사적인 영리활동의 원리에 의해서 작동되도록 개편하는 것
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기구-금융-재벌로 일체화되어 있는 토착 지배구조의 연
계선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IMF가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 참고가 될
것이다 첫째는 부실금융기관의 정리이다. 태국에서는 58개 금융기관이 영업정지
를 당했고 인도네시아에서는 16개 은행이 면허정지를 당했다. 심지어 수하르토
대통령의 아들이 소유하고 있는 은행까지 의 경우에도 부실은행 정리가 금융개혁의 일 순위가 될 것이다. 이러한 충격적
인 과정을 통해서 IMF는 금융부문이 순수히 사적인 영리를 추구하는 기관이 되
도록 그 체질을 개조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충격적인 방법이 아니고 체질이 바
뀔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사태를 파국적으로 만들어 갈 것이
다.
둘째는 이와 병행하여 금융의 제도와 관행에 대해서도 같은 방향에서 일대 수
술을 가할 것이다. 정책금융에 의해서 지방 기업이나 중소기업에 대출금의 일정
비율을 의무적으로 할당하도록 하고 있는 ‘의무대출 비율’이나 비생산적인 특정
업종에 돈을 빌려주지 못하게 하고 있는 ‘여신금지 업종제도’를 폐지시킬 것이
다. 그렇게 하여 금융부문은 오로지 “돈놀이 장사”하는 제도로서만 기능하게 만
들 것이다.
셋째 이러한 관행.제도.체질의 변화를 확실하게 관철시키기 위하여 금융긴축
을 초강도로 실시할 것이다. 통화증가율, 여신증가율을 대폭 억제함으로써 이런
제약 속에서 금융기관이 자금 공급을 빡빡하게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을 조성할
것이다. 이렇게 고삐를 바짝 조인 상태에서만 위에서 하기가 보다 쉬워지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렇게 금융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금융부문에 대해 초국적 금융자본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놓을 것이
다.
이것이 요컨대 금융개혁의 골자이다. 이 뼈대 안에서 금융감독기구의 위치도
결정될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금융개혁을 자신의 힘으로 실시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초국적 자본의 이해관계와 논리가 관철되는 금융개혁을 하고서 물러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IMF가 강요하는 금융개혁은 국내 재벌에게는 한편으로는 관료의 통제
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점에서 환영할 바일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이 초
국적 금융자본에게 장악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는 위험스러운 바가 될 것이
다. 초국적 자본의 금융장악에 의해서 재벌들 자신이 그들 초국적 자본들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종속되는 길이 되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우리 노
동자.민중의 입장에게 ‘내외 독점자본에 의한 금융지배’라는 새로운 정세가 조
성되는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아니 그러한 정세가 이미 코앞에 다가와 있다.
(2) 규제완화
관료와 재벌의 연결고리인 금융이 독립(?)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관료의 힘–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정권의 힘도 아울러서–이 크게 약화된다. 이렇게 되면
규제의 완화 내지 철폐는 아주 쉽게 관철될 것이다.
규제완화는 크게 네 영역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 첫째는 금융자원(돈)의 배분
에 관련된 규제를 폐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금융개혁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금융개혁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도 정부 규제의 철폐 속에서 마저 없어질
것이다.
둘째는 재벌에 대한 산업적 규제가 완화 내지는 폐지된다. 보건.환경.안전에
대한 규제들은 더욱 무력화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산업정책에 입각하여 진입을
제한하는 인.허가제라든가 투자의 규모 확대에 대한 이러저러한 제한도 규제완
화라는 이름으로 없어질 것이다.
셋째는 토지에 대한 규제가 없어진다. 그린벨트 같은 제한도 대폭 완화될 것
이며 기업의 부동산 보유에 대한 규제도 완화 내지 폐지될 것이다
넷째는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 재벌의 은행 지분참여 등 자본의 소유.경영권
에 대한 규제가 완화 내지 폐지될 것이다. 공기업 민영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규
제완화는 아니지만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는 방향에서 같이 추진될 것이다. 끝으
로 이 과정과 결합하여 초국적 자본을 차별(?)하는 각종 규제도 폐지시킬 것이
다.
이러한 규제완화, 민영화는 IMF가 강력히 요구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은 국
가독점자본주의와 복지국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자본주의적인 것에
대해서도 초국적 자본의 이윤추구 활동에 커다란 장애요소라고 보고 있기 때문
이다. 그 상(像)을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그리기는 아직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방향은 분명하고 그 폭 또한 가히 혁명적일 것이다. 물론 국내 특권관료 분파가
이에 잘 순응하지 않을 것이고 노동자.민중운동이 무제한적인 규제철폐와 공기
업 민영화에 강하게 저항할 것이다. 이러한 세력관계 속에서 이 문제는 처리되
어 갈 것이다.
(3) 시장의 자유화
시장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는 다소간 생소하다. 초국적 자본은 기회 닿는 대
로 ‘시장’ 얘기를 한다. 시장을 개방하라고 할 뿐 아니라 시장의 규칙을 제정하
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의 첫 번째로 ‘투명성’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금융개혁에 있어서도 그 첫 번째를 ‘투명성’으로 꼽는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부
실채권 규모에 대해서도, 외환 보유고에 대해서도 투명성이 없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투명성을 제고하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시장을 절대시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걸어 온 국내 독점자본도 이러한 류의
말들을 해 왔다. 정부에서도 신임 경제부총리가 ‘금융시장 안정 대책’을 발표하
면서 그 가운데 하나로 투명성 제고를 통해 대외 신인도를 높이겠다고 말하고
있다.
초국적 금융자본은 외환과 증권에 투자함에 있어서 나아가 기업을 인수.합병
함에 있어서, 기업(은행 포함)이나 해당 국가경제의 실태를 훤히 들여다보고서
합리적(?)으로 투자를 행할 어 말하면 강한 자금력으로 자금력이 약한 자본이나 국가를 먹어 줄 수 있게끔
경영상태를 보고하라는 이야기와 다름이 없다. 말로는 회계와 통계의 투명성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그것들이 모두 투명하게 노출될 때, 국내 자본보다 압도적으
로 강한 자금력을 지니고 있는 초국적 자본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러한 투명성 보장은 주식투기에 필수적 조건일 뿐 아니라 기업 매수.합병에도
꼭 필요한 조건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IMF는 ‘자유로운 시장’을 요구함에 있어서 소유.경영권의 획득을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이런저런 제한들에 대해 이를 철폐시키고자 할 것이
다. 여기에는 일반 기업은 물론이고 은행에 대한 소유.경영권 획득도 중요하게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획득하는 방법으로는 공개적인 기업 인수.합병이
사용될 것이다. 따라서 이에 관한 자유 보장이 중요한 요구사항이 될 것이다.
세계의 200대 초국적 기업들은 그 동안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자본을 급속히
집중해 왔다. 이것을 이제 선진자본주의 시장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행하
려는 것이다.*주30)
이와 관련, 초국적 자본이 국내 재벌의 선단식 경영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보면 기업을 먹어주는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재벌을 비판하여 그 권력집중을 약화시키고 그룹 산하의 각 기업에게 경영상의
독립성을 제고시키면서 이 기업들의 경영지배권을 기업 매수.합병이라는 방식으
로 탈취하는 것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보아 왔던 기업
인수.합병과는 차원이 다른 공격적인 기업 인수.합병들이 횡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무수히 정리해고될 것이다.
(4) 시장의 대외 개방(상품 및 자본 모두)
국제통화기금은 구제금융 제공을 계기로 국가경제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
하게 될 것이다. ‘경제 식민지화’니 ‘경제 신탁통치’니 하는 것은 결코 공연한
수사가 아니다. 그들이 한국의 민족경제를 구제하기 위하여 오는 것은 아닌 것
이다. 그들은 한국의 민족경제가 파산한 것을 계기로 하여 그것을 초국적 자본
의 전 세계적 지배 체계에 더욱 철저하게 편입시키고 그들이 지배하기에 유효한
내부적 조건들을 정비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후자를 두고 그들은 ‘개혁’이니
‘구조조정’이니 라고 칭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구조조정’이라고 하지만 한국
의 경우 ‘개혁’이라는 수사를 동원하는 것은 초국적 자본의 침략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호도하기에 유효하므로 이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뿐이다. 따라서 실제
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에서 실행했던 구조조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민족경제의 내부 구조를 정비하는 것과 그것을 세계적인 체계에 더 깊
이 편입시키는 것은 약간은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구조조정 하면 일반적으로는
대내적인 제도.체계.구조의 조정에 국한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구조조정
은 넓은 의미에서는 민족경제의 대외관계까지 포함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상품
과 자본의 자유로운 진출에 대한 민족국가의 장벽을 철폐하는 것을 구조조정이
라는 이름으로 실현시키려 할 것이다.
다만 이 문제는 민족적 감정을 자극할 가능성이 크고, 이로 인해서 자칫 IMF
가 국내 제도.체계를 구조조정하는 데(이것이 그들의 핵심적인 관심사인데) 저
항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므로 우회적.간접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할 것이다.
예컨대 IMF는 ‘자금지원 조건’으로서 시장개방을 일반적 원칙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연후에 이러한 틀 안에서 미국.EU.일본 등이 자기들의 구체적인 개방 요
구사항을 관철시켜 나가도록 뒷받침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이미 감지되기 시작했다. 국내자본은 한편으로는 IMF의 신탁
통치를 재벌의 활동공간을 확대하는(정부와 정치에 의한 규제로부터 벗어나서)
계기로 환영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시장개방이 이루어져서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
(시장에서의)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정부는 앞으로
미국 자본의 시장개방 압력이 더욱 높아질 것을 예상하고 어차피 내어 줄 것은
솔선해서 미리 내어 주자는 발상에서, 교육시장 개방을 확대하겠다고 서둘러 결
정하고 있다.
시장개방의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IMF의 정책 개입이 본격화될 경
우 IMF를 사실상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요구사항인 자동차세와
주세 개편 등은 당장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특히 국가부도에 대해 미
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입장인 만큼 한미 자동차협상에서 미국 차에
대한 세금인하 등 미국의 요구사항이 대부분 관철될 것으로 내다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EU는 이번 공황에서 특별히 을 견제하고 아시아 경제권을 통제하려는 지금 국면에 있어서 미국 초국적 자본
이 EU를 협력자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 또한 덤으로 관철되게 될 것이
다.
상품시장과 관련해서 미국은 자동차 이외에 보험.의료.보건.법률 등 서비스
산업 분야에 대한 시장개방 압력을 높일 것이며, 일본은 미국과 더불어 자동차
시장에 대한 개방압력을 높일 것이다. 미국은 또 농산물 시장, 정보통신 시장
및 정부조달 시장 등의 완전개방도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자본시장에 있어서는 채권시장, 주식시장의 개방은 물론이고 국내 은행의 주
식지분에 대한 대외 개방도 강도높게 요구할 것이다. 또 외국인에 의한 토지매
매 제한을 철폐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국내 총자본이 초국적 자본에 항복을 한 상황 속에서, 노동
자.민중을 침묵시킨 속에서 속전속결 식으로 관철되어 나갈 것이다.
(5) 초(超)긴축(재정.금융)
끝으로 이런 제반 구조조정들을 관철시키고 노동자.민중에 대한 총공세를 유
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재
정.금융의 초긴축이다. IMF는 곧 초긴축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초국적 자본은 이
것을 주요한 무기로 삼아 왔다. 초긴축에 의한 디플레이션 즉 경기침체의 여건
속에서만 자본 제 분파들을 구조조정 주도자의 의도에 따르도록 강제할 수 있
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초긴축의 하에서만 노동자.민중을 굴종하도
록 강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긴축과 불황은 노동자에게는 실업과 저임금이다.
이런 어려움에 처하게 해야만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임금 동결’ ‘노조 무력
화’ 등을 노동자계급에게 손쉽게 강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긴축은 금융도 금융이지만 무엇보다 먼저 재정의 긴축이다. 이것은
조세 수입 증대에 의한 대중수탈의 증가와 ‘사회적 지출’의 대폭 축소에 의한
‘사회적 착취도’의 증가로 될 것이다. 부실채권 매입(그들은 떠맡는 것을 이렇
게 ‘매입’이라고 호도한다!)이라는 미명으로 재정부담이 늘어나고 이것을 노동
자.민중이 치러야 할 것이다. 또 수백억~1천억 달러의 외채도 국가 재정으로 갚
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늘어나는 국가재정은 세금 증가와 공공요금 인상에서밖
에 나올 곳이 없다. 반면에 교육.보건.노동.환경 등 그나마 명맥만 유지하고 있
는 사회복지적 지출은 가차없이 삭감될 것이다. 이와 같이 노동자.민중은 경제
식민지의 실상을 뼈아프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을 누가 책임지고 노동자.민중에게 강요할 것인가? 그 책임자가 되기
위한 경쟁이 오늘로써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
초긴축이 이렇게 IMF 구조조정의 핵심이라는 것은 멕시코의 경험에서도 확인
되고 있다. 멕시코 대통령 세디요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랑하고 있다.
세디요는 한국의 공황과 관련하여 아시아의 국가지도자들에게 “재정지출을 축
소하거나 세금을 인상해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처리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것
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충고하는 말을 했다. “지난 94년 12월 페소화 평가
절하를 계기로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은 멕시코는 철저한 긴축정책을 통한 경제
체질 개선으로 3년만에 APEC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과시하게 됐다. 당시 멕시코
정부는 노.사.정 합의의 ‘경제 비상사태 극복을 위한 공동협약'(AUSEE)을 체결,
실질임금 감소와 대량실업 사태에 따른 사회적 동요에도 불구, 긴축정책을 흔들
림 없이 추진했다. 멕시코 정부는 96년 10월 AUSEE를 ‘경제성장을 위한 동
맹'(AEG)으로 전환하면서 경제위기 탈출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문제를 직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즉각 시행해야 한다”고 말하면
서 “즉각적이고 과감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했다.*주31)
6.4. 내외 독점자본의 노동자.민중에 대한 총공격
공황 국면 속에서 자본은 자본 상호간의 세력관계 재편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가치감소’를 통해 이윤율을 회복시키는 문제만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 과정 속에서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에 대
한 가치감소를 이루어 내지 않으면 안된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에게는 보다 결
정적이다. 자본의 가치감소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초기 국면에서는 무정부성
관리와 더불어 자본 상호간의 세력관계 재조정이 중요하겠으나 이후로 갈수록
후자가 보다 중요하게 될 것이다. 노동의 가치 감소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져야만
이윤율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높게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배세력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이 지점은 노동자계급이
총자본과 대결함에 있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다.
총자본의 대(對)노동 전략은 그들이 항상 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법적.제도적인 장치와 정부의 정책들을
개악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제도.정책적 지
형 속에서 현장 수준에서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
다. 그리고 이렇게 이데올로기, 제도.법, 현장권력을 확보한 힘을 가지고 실제
적으로 ‘노동시장 유연성’의 확대, 노동강도의 강화, 임금 삭감 등을 집행할 것
이다. 그것의 방법은 개별적인 기업 수준에서 관철시키는 방법과 총노동 수준에
서 사회적 합의로 관철시키는 방법이 병행될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것들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저항을 공안탄압으로 압살함으로써 그것들의 관철을 뒷받침
할 것이다.
이것이 예고되어 있는 내외 독점자본의 총공격이다!
(1) 이데올로기 공세
이데올로기 공세는 그 동안 경제위기 노동자 주범론으로, 구체적으로는 “고비
용-저효율 구조”론으로 정식화되어 가해져 왔다. 그러나 이제 국가경제가 일대
파국을 맞이한 지금에는 고비용-저효율의 책임을 노동자에게만 일방적으로 뒤집
어씌우기에는 곤란한 점이 너무 많아졌다. 세계가 재벌의 방만한 경영, 정경유
착에 의한 특혜금융, 관료.정치권의 부패 등 총자본측의 과오를 강도 높게 비판
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의 진심은 이것이 아니지만!)
이런 상황이므로 총자본측은 재빠르게 변신하여 ‘경제살리기’ 캠페인으로 노
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나오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서도 조선일보
가 단연 선두를 서서 지난주에 이미 그러한 홍보를 개시했다.*주32) 그리고 나
서 단 사흘이 지나지 않아서 지난 주말부터 언론, 정당, 정부, 재벌 등 총자본
의 모든 구성분파와 부분들이 한 목소리로 ‘경제살리기 이데올로기 공세’를 개
시했다.
24일자 신문의 사설은 이것 일색이다. 보라!
동아일보는 ‘다시 시작이다’ 제하의 사설에서 “위기 극복 과정에서 국민이 떠
맡게 될 고통은 엄청날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은 실업과 임금소득 감소를 불
가피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아픔을 감내하고 위기극복에 동참하지 않고서는
진정 풍요한 앞날을 기대할 수 없다”*주33)
같은 날자 중앙일보는 ‘위기 극복은 모두의 몫이다’ 제하의 사설에서 “당장
부실종금사 인수.합병과 은행간 합병 과정에서 상당한 사무직 종사자가 일자리
를 잃을 것이다.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재정도 긴축하고 통화도 긴축하면 금
리는 오르고 주가는 위축되고 성장률도 낮아질 것이다. 그만큼 실업자도 늘겠고
일자리의 순증가 규모도 줄어들 것이다. 기업이 구조조정에 본격적으로 착수하
고 합리화를 강도높게 진행시키면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도 거의 수용할 수 없
게 되고…… 실질 가처분 소득이 줄게 되면 소비가 줄고 불황은 점점 더 깊어
져 당분간 스태그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이런 암울한 시나리
오의 진행을 늦추거나 그 과정에서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우리 한 위기의 본질을 깨닫고(그렇다.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필자 첨가) 각자가
자기 몫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그렇다! 구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필자 첨
가) ‘변화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이 몇년전 한 때 유행했다가 남이 알아서 하
겠지 하는 안이한 자세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잊혀지고 말았다”*주34)
심지어 국민일보는 이를 구국운동으로 부르고 있다. ‘모두 구국운동에 나서
야’ 제하의 사설에서 “실업으로 고통받거나 실업 공포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
들이 부유층의 정신적 횡포를 두고 볼 리가 없다. 서민들의 배신감.좌절감을 자
극해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경우 자신들의 부도 결코 온전할 수 없음을 깨달
아야 한다. 서민들도 허리띠를 더 졸라매지 않으면 안된다. 그간 과소비 풍조에
전염되어 뱁새가 황새걸음 흉내내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진지하게 반
성할 필요가 있다. 이제 고도성장기는 지났다. 내핍이 강요되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 우리는 참담한 심경으로, 그러나 희망을 가지고 <자각 및 절약
운동>에 대한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한다. 국민이 한마음으로 뭉쳐 낭비된 비능
률을 추방하면 이 난국은 반드시 극복된다. IMF의 급전으로 국가부도를 막아야
하게 된 이 수치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 수도 있다. 바로 지금 모두가 구국
운동에 나서자”*주35)
이렇게 언론이 ‘경제살리기’, ‘구국운동’ 등 온 국민의 공동의 책임과 의무로
사태의 본질을 호도해 가고 있는 동안에 정치권에서도 ‘경제살리기’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정치권은 대통령 후보 중심으로 사실상 선거운동에 본격 돌입하고 있는데, 후
보들 모두 경제를 화두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그 방향에서
도 한결같이 ‘경제살리기’로 통일되어 있다. 다만 약간씩 강조하는 지점에서 차
이를 드러낼 뿐이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는 휴일인 23일 하오 여의도 당사에서 조순 총재와 함
께 <비상 경제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언론보다는 조금 덜 노골적이다. 표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정경유착의 부패한 정치를 청산하지 못하고는 우
리 기업을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키워 낼 수 없다”면서 “지난 5년 동안 나라경
제 곳곳에 덮어진 금융부실, 기업부실 등을 과감히 걷어 내야 한다”고 역설했
다. 다만 “구조 조정에 따른 중소기업의 흑자도산과 고용불안을 최소화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주36)
그러나 25일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회창 후보는 서울 올림픽 체조공원
에서 열린 ‘한국학원총연합회 창립 40주년 기념 학원교육자 대회’에 참석하여
“집권하면 온몸을 던져 경제를 살려내겠다. 경제를 발목 잡고 있는 규제를 대폭
철폐해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며 자본의 입장을 전면 대변했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22일 삼성전자 부천사업장을 방문해 최근 입사한 젊
은 노동자들과 경제살리기를 주제로 대화를 나눈 데 이어 대전에서는 <경제살리
기 전진대회>에 참석했다……. 그런 한편 김 후보측은 “IMF의 구제금융과
APEC 참가를 반대”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의 행보를 ‘정략적 행위’라고 비난
하고, <한나라당 = 국가부도당>으로 규정하는 등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국민회
의는 또 ‘1당원 1달러 모으기 운동’을 전개하여 국채보상운동을 흉내내고 있다.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한술 더 뜨고 있다. 그는 22일에 이어 23일에도 전용
버스를 타고 민생현장을 찾아가는 <경제살리기 버스투어>를 계속했다. ….. 이
후보는 인천 소태구 신포동 일대에서 <경제를 살립시다>는 제목의 전단을 시민
들에게 배포하고 경제살리기 운동에 온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이 후보는 전
단에서 “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나 집권욕에 사로잡힌 정치권은 막대한 돈이 들어
가는 세몰이식 대규모 정치집회를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국민신당은 ‘경
제의병운동’을 통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살리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에 앞서
이 후보는 22일 하루 동안 청주, 대전, 구미, 대구 등 4개 도시를 차례로 돌며
경제살리기 캠페인을 벌였다.*주37)
이인제 후보는 또 일요일인 23일 “정부와 한나라당이 책임져야 할 경제위기
상황을 국민의 힘으로 극복하자”며 △소비 10% 절감 △저축 10% 증대 등을 촉구
했다. 이 후보는 24일 하오에는 또 안산 LG 백화점 거리에서 “경제를 살립시다,
나라를 살립시다”는 전단을 배포했다. 이 후보는 시민들과 악수를 하며 <경제의
병운동> 참여를 호소했다.*주38) 그는 또 대선 기간 중 ‘애국심’이라는 머리띠
를 두르고 ‘애국심 물결운동’을 일으키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렇게 재벌과 특권관료들은 물론 재벌 언론과 보수 정치권까지 총동원하여
민족주의적.개혁주의적 수사(修辭)를 구사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방어하고 바
로 그 수사(修辭)를 가지고 각성되지 못한 대중을 자신들의 헤게모니 아래로 포
섭하고자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태의 본질을 진정으로
각성하고 있는 대중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고립시키고자 입체적인 공세를 가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에 파국이 오고 노동계급에게 그 부담이 집중적으로 전가되리라
는 것은 불 보듯 하다. 이것을 자본은 경제살리기–축적(자본의)과 성장(상품
의)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노동자계급이 대항할
때 두 가지가 가해질 것이다 그 하나는 협박이다. 다른 하나는 고립화이다.
자본은 이미 이러한 공격을 개시하고 있다. 요즈음 신문에서는 느닷없이 임시
직.일용직 노동자의 비중이 50%를 넘어섰다는 통계청 발표(이것은 명백한 과장
보도이다!)가 커다랗게 보도되고 있다. 실업자가 100만이 될 것이라는 보도, 실
업률이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 그리고 성인 남자 가운데 집에서 놀고 있는 사람
이 2백만 명을 넘어섰다는 보도 등 예측보도와 과장보도가 ‘IMF 신탁통치’를 전
후로 하여 일제히 매스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하고 있다.*주39) 이런 전망들은
대부분 재벌들이 운영하는 이른바 민간 경제연구소들이 만들어서 퍼뜨리고 있
다,
종래 같으면 노동자계급 쪽에서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자본과 정권에게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할 사안인데, 그래서 자본과 자본의 입들은 가능한 한 이
를 쉬쉬해야 할 사안인데 거꾸로 그들이 앞장서서 떠벌리고 있다. 이것은 공황
과 공황에 따르는 고용 감소를 가지고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협하
여 일자리를 지키는 것만도 감사하라, 회사 밖의 길거리에는 실업자와 구직자가
저렇게 득시글거린다고 겁주기 위해서이다.*주40)
하기야 이것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자본은 산업
예비군을 기업밖에 두고서 이들을 노동자계급을 위협하는 수단인 동시에 호황기
에 쓰고 불황기에 버리는 소모품으로 삼아 왔다.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이것에서
발전해서 기업 안에 비정규직–의사(擬似)고용이라는 형태로 산업예비군을 확보
하고서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저수지로서 이용하면서 정규직 노동
자들에 대한 위협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것을 영국에서는 ‘산업예비군의 기업 내부화’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
서도 이것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진척되어 있음이 이번에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제 공황이라는 상황을 틈타서 노골적으로 이들을 노동자계급에 대한 위협수단
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동안 우리나라 자본은 천민적 축적을 하면서도 최소한
밥줄은 보장하는 듯이 처신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포섭하는 명분으로 삼아 왔으
며 이것이 그들로서는 부담스러운 짐이었던 것인데–이것이 우리 노동시장이 유
연하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그들 주장의 실질적 의미이다–차제에 그 부담
을 훌훌 털어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자본은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시혜자(가부장적 관계)이기를 포
기하면서 전통적(앵글로 색슨의) 자본가계급의 예에 따라 산업예비군을 가지고
노동자를 협박함으로써 노동자를 피지배계급, 즉 임금노예로 대우하겠다고 선언
하고 있다. 자본은 이러한 협박으로 노동자계급의 저항의지를 원천적으로 무력
화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초과착취적인 제도.정책들을 관철시키고자 하고 있다.
(2) 고립화와 공안탄압
또 하나는 고립화이다. 최근에 들어오면서 집단이기주의를 엄단하겠다는 정부
의 발표가 느닷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언론도 일제히 집단이기주의를 비난하
고 있다. 나라 경제를 살리는데 협력하지 않고 노동자계급의 권익을 옹호하겠다
는 주장과 투쟁에 대해 재벌은 모든 재벌언론 매체들을 동원하여 집단이기주의
로 매도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집단이기주의란 말인가?
그러면서 총자본은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를 개혁하고 구조조정을 해서 나라경
제를 살려야 한다면서 민족주의적 수사(修辭)와 개혁주의적 수사들을 총동원하
고 있다. 이러한 선전은 공황이 임박해 오면서 부쩍 빈도와 강도가 높아지고 있
다.
문화일보 11월 14일자에서 신일철 교수는 “세계화는 민족적 자주성이 있어야
한다”면서 초국적 자본에 투항하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자신들의 대응을 민족
자주적인 것으로 미화하고 있다. 자본은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기들이 민족자주
의 기수로 나서면서 초국적 자본이 요구하는 경제개방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입
지를 방어하고자 꾀하고자 할 것이다(이 지점에서는 국가관료 분파들이 총대를
맬 것이다!). 그러면서 국가기구의 통제를 약화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개혁이라
는 이름으로 더욱 적극화하고자 할 것이다(이 지점에서는 재벌이 총대를 맬 것
이다!). 그러나 초국적 자본이 비판–그러나 이 비판은 그들이 진정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하고 있는 정경유착의 단절, 부패의
제거 등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할 것이다.
이렇게 민족주의적.개혁주의적 수사를 동원하여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기득권
을 방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수사들을 가지고 각성되지 못한 대중들
을 자기들의 헤게모니로 편입시키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속아넘어가지
않는 부분들 즉 노동자계급 특히 투쟁으로 나서는 노동자들을 고립시키고자 할
것이다. 비민족적이며 비개혁적이며 집단이기주의 세력이라고 매도하면서! 요컨
대 경제살리기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적 수사와 개혁주의적 수사를 가
미한 입체적인 이데올로기 공세가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세를 하는 가운데 참다운 민족적인 이해관계와 계급적인 이
해관계를 옹호하는 운동세력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공안탄압의 광풍이 몰아쳐 올
것이다. 아무리 산업예비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협박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
는 실질임금을 절반 가까이 깎아내리는 착취 강화를 받아들이게 하기에는 부족
할 것이다. 또 아무리 이데올로기 공세로써 고립화를 기도하더라도 그것이 진실
이 아닌 이데올로기인 이상 경제살리기 이데올로기의 설득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재벌체제를 해체한다면, 일반민주주의를 실시한다면 모를까
그러한 변혁적인 변화의 과정을 수반하지 못하는 경제살리기는 노태우.김영삼
정권의 허구적 이데올로기와 차별성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진실을 폭로하고 투쟁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세력들에게 탄압의 칼날이
겨누어지지 않고서는 저들의 계산은 안전성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공
안탄압의 광풍이 몰아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폭압 분위기 속에서
앞에서 말한 제도.정책의 개악들을 관철시키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경제살리기 이데올로기를 중심에 놓고 한편으로는 실업의 위협을 가하
여 위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한 요구.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여
고립시키는 입체적 접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공안탄압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벌써 사회과학 서점주인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있다.
(3) 제도 및 정책적 개악 공세
법·제도 개악 공세는 지금까지 이미 나온 것과 앞으로 계속 나올 것으로 예
상되는 것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미 나온 것들부터 살펴보자!
<임금(퇴직금) 강탈>
그 동안 공황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총자본은 중요한 법.제도적 장치 하
나를 확보했다. 노동자의 임금을 강탈하는 제도를! 지난 11월 18일 국회에서는
부도난 사업장 노동자의 퇴직금을 3년치까지만 지불하도록 근로기준법을 개악하
는 내용이 전격 처리되었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그러하지만 당장 기업의 도산.
파산 등 자본의 가치감소 과정에서 이 손실을 노동자 임금의 강탈에 의해 보충
하려는 것이었다. 엄연히 후불임금으로서 보장되어 있던 것을 강탈한 것이다.
<근로계약법 제정>
근로기준법을 대체하는 것으로서 ‘자율 근로계약법’ 제정을 전경련은 추진하
고 있다. 이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잘 알 수 없으나 노동자 보호를 그
취지로 하는 근로기준법과는 달리 노.사간의 자유로운 계약의 권리를 주장함으
로써 “근로기준”을 폐지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할 것이 분명하다.
이 법 속에 그 동안 노동자의 투쟁으로 좌절된 정리해고제를 포함시킴으로써
일거양득을 얻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자본의 무제한적인 착취에 대한 근로기
준법의 각종 규제를 폐지하면서 자연스럽게 해고에 대한 규제도 없애 버리겠다
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IMF와 초국적 자본들이 노동법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향후 5년간 임금 상승률을 총액기준 3% 이내로 억제하는 임금정책>
전경련은 노동법 전면 개악과 더불어 임금동결 정책을 새 정부에 요구하고 있
다.
전경련과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은 경제위기의 극복책으로서 이런 내용을 골자
로 하는 새 정부의 정책과제를 확정, 대선주자들에게 전달키로 했다. 근로계약
법 체결, 임금동결 등 노사관계의 자율 및 탄력성을 높여 줄 것을!
이와 더불어 경제활력을 저해하는 규제를 폐지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민
간(즉 친 재벌) 전문가들로 구성된 “규제개혁 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공기업 민
영화를 촉진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도 요구했다. 전경련은 또 금융실명제를 보
완, 금융거래에 대한 비밀보장을 선진국 수준으로 강화할 것과 지하자금을 양성
화하기 위해 실명전환 시 자금출처 조사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기업 구조조
정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특별법의 제정도 요구했다.*주41)
이런 일련의 요구사항들 가운데 임금을 동결하는 것이 노동법 개악과 나란히
첫 번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대선 주자들이 다투어 경제 살리기에
적임자임을 자임하고 나서는 것을 보면 정부의 임금정책의 방향은 재벌들의 의
사대로 될 것이 분명하다.
<직무분할제 도입 및 정리해고제 조기 실시>
자본은 임금을 대폭 삭감하는 동시에 현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법의 하
나로서 자본은 ‘직무분할제'(job sharing)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경총 김영배
상무는 “정리해고를 대량으로 하는 대신에 업무를 나눠맡은 직무분할제 및 임금
삭감이 논의될 것”이라고 예고했다.*주42) 이렇게 듣도 보도 못하던 ‘직무분할
제’라는 것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말인즉 노동시간을 단축하면서 고용 수준
을 유지키로 노사가 합의한 독일 폴크스바겐 사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지만 독
일의 진보적(?)인 경영자와 천민적인 한국의 경영자를 같다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제도는 정규직 노동자를 임시직 노동자화 하거나 전(全)-시간 노동제
의 직무를 여러 개의 부분-시간 노동제 직무로 쪼개는 데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언론은 “경총 등 재계는 정리해고제의 조기 도입이 끝내 좌절될 경우,
통상 근로시간을 단축해 인건비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해고 없이
근로자들의 평균근로시간을 단축해 인건비를 줄이는 직무분할제 도입 여부에 대
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뜨거울 전망이다”라고 보도하고 있다.*주43)
한편 재벌 안에서는 정리해고제 조기실시 문제도 적극 추진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언론은 “2년간 유보된 정리해고제를 앞당겨 실시하자는 주장도 재계에 팽
배해 있다”*주44)고 보도하고 있다. 한편 국가기구 측에서도 정리해고제 조기실
시는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재경원 안병우 차관보는 “미국이나 영국의 경
우처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것은 새로운 취업기회 확대측면도 있어서
우리 내부에서도 이를 새로운 각도에서 진지하게 논의했으면 좋겠습니다”*주45)
는 발언으로 정부의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 방향은 국제통화기금도 강력히 뒷받침할 것이다. “IMF는 구제금
융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혹독한 자구 노력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적어도 재정.통화긴축, 시장개방,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등을 강력하게 권고할
것 같다.”*주46)
(4) 현장에 대한 통제 강화
이상과 같은 제도.정책적 개악과 더불어 자본은 현장통제를 강화하는 움직임
을 비상하게 강화하고 있다. 이 움직임들은 언론보도나 통계자료로는 잘 드러나
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인원 삭감, 임금 동결, 노조 파괴, 노동강도의 강화,
노동생산성의 급격한 상승 등의 모습으로 표면화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사례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대표적인 성장산업인 자
동차의 경우 재고 누적에 따른 조업단축이 실시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최근 스타렉스와 아토스 라인을 제외한 전 생산라인이 잔업을 전면 중단했다.
특히 그랜저(나이어스타) 생산라인은 하루 4시간만 가동하고 4시간은 교육을 실
시하는 조업조절에 들어갔다.”*주47) 지난 봄 조업단축 시에는 노조와 이 문제
를 놓고 힘겨루기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움직임이 없다. 그리고 자본측은
교육을 통해서*주48) 현장 조합원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장악하는 노력을 경주
할 것이다.
이러한 자본측의 공세는 이미 간접적이지만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생산
성본부에 따르면 2/4분기(4∼6월) 광공업(전기·가스 및 수도업 포함)의 노동생
산성지수를 산출.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지수는 사상 최고치인 212.0을 기록했
다고 한다. 이 지수는 90년의 수치를 100으로 삼고 단위시간당 생산량을 표시하
는 방법으로 산출하는데(678개 주요품목의 생산량 지수를 10인 이상 채용한 사
업체 상근 근로자의 총노동시간 지수로 나누는 방법) 2/4분기 노동생산성 지수
는 지난해 동기(183.3)에 비해 15.1%나 늘어났다. 이는 91년 생산성본부 지수
산출을 시작한 이후 가장 높은 기록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2/4분
기 생산량 지수가 전년 동기에 비해 9.7% 증가한 반면 근로시간은 줄고, 근로자
수 역시 감소해 투입량 지수가 4.6% 떨어진 데 따라서 생산성 지수가 가파르게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노동생산성 지수는 94년 3/4분기(7∼9월)에 전 분기보다 하락한 이후 그 동안
꾸준히 증가, 지난 1/4분기(1∼3월)엔 204.5를 기록하는 등 11분기 연속 상승하
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내년에 IMF의 구제금융 조건에 따라 기업들이
인원감축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경우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 더욱 가파른 오름세
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현장에서는 인원은 줄이고 노동시간도 줄이면서 더 많은 물
량을 뽑아 내고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노동강도 강화를 의미하고 있다. 그리
고 이러한 강화는 현장에 대한 자본의 통제 강화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다.
(5) 상층에서의 담합(사회적 합의)과 현장에서의 밀어붙이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제도.정책적 공세와 현장에 대한 통제 강화 공세를 바
탕으로 해서 구체적 방법으로는 이른바 ‘사회적 합의’ 형태를 이용하여 관철시
키고자 할 것이다. 언론들은 이미 멕시코의 사회적 합의 사례를 크게 보도하고
있다. 자본측에서도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는 자기 사업장에 격렬한 분
규가 발생함으로써 자기만이 이 공황 과정에서 경쟁 대열에서 탈락하는 위험을
피하고자 고심하고 있다. 한편으로 현장을 바짝 조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투
쟁이 분출하는 것은 우려되는 것이다.
그래서 재벌들은 사회적 합의에 기대를 걸고 있다. “대기업 노사담당 임원들
은 노동관계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이 문제가 내년도 노동쟁의의 불
씨가 될 것을 우려, 정부측이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줄 것을 주문하고 있
다.”*주49)
그러나 이러한 총자본의 총공세는 상층에서보다는 단위사업장과 현장에서 가
장 적나라하게 행해지고 있다. 현장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
요한 지점이므로!
한라중공업은 6천여 명의 임직원 가운데 자그마치 절반인 3천여 명을 감원하
는 ‘비상경영 태세’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또 적자 사업품목의 생산을 중단하
고 노동자 및 관리직의 임금도 대폭 삭감하겠다고 했다.
그 방법으로 관리직의 경우 희망 퇴사자를 모집하고, 퇴직 희망자가 목표치에
미달할 경우 회사가 지명하여 권고사직 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리
고 현장 노동자의 경우에는 노조와 ‘구조조정 간담회’를 갖겠다고 했다. 말이
간담회이지 선전포고이다!
삼성은 이 지점에서도 한국 재벌의 으뜸답다. 삼성 그룹은 26일 조직과 기구
30% 축소, 임원 급료 10% 삭감, 노동자 임금총액 동결, 해외 주재원 수당 10%
감축, 연봉제 전면 실시 등을 골자로 한 대대적인 경영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이렇게 하면서 전체 인력 16만 명의 약 10% 정도를 감축할 예정이다.
내외 독점자본과 노동자.민중의 총성없는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 보론 >
‘IMF 신탁통치’ 정세에서의 총자본 각 분파의
패권분파인 재벌과 특권관료는 물론이고 언론.정당 등 이데올로기 기구들도
일제히 ‘경제 살리기’ 이데올로기 공세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두 가지의 수사학(修辭學)이 혼재되어 있다. 하나는 민족주의적인 수사학
(修辭學)으로서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것(구국……)이며 다른 하나는 개혁을
해야 된다는 개혁주의적인 수사학이다. 언론의 경우를 보면 민족주의적 수사학
은 대체로 조선일보.문화일보 등 그 동안 미.일에 비한 한국 자본주의의 위상
제고를 강조해 온 부분들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개혁주의적 수사학은
재벌과 초국적 자본에 보다 밀착하여 있는 부분들에서 주로 구사되고 있다. 언
론의 경우를 보면 중앙일보가 이 경향의 선두주자이다.
이러한 수사학들은 공황이 폭발하기 이전부터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화
일보 11월 14일자에 보면 신일철 교수는 “세계화는 민족적 자주성이 있어야 한
다”면서 초국적 자본에 대한 자신들의 대응을 민족자주적인 것으로 미화하고 있
다. 이러한 수사학은 IMF 신탁통치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목소리의
높이는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
조선일보 11월 25일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97년은 한국경제 발전사에
뚜렷이 기록될 것이다…… 약간의 정직성과 분별력을 발휘한다면 지금의 사태
는 초고속 개발 30년의 한국경제가 스스로 배태해 온 씨앗의 당연한 열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기업들은 이 위기의 전환기에서 최소한의 책임
감과 공공목표에 대한 공동분담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국난에 처하여 환투기나
자금확보 등 사적(私的) 이해에 급급한다면 결국은 국민경제와 공멸할 뿐이다.
정부에 앞서 과감한 자구와 부실 정리작업에 앞장서지 않으면 더 이상 누구도
그들을 구제해 줄 수 없게 되었다. 우선 정부와 대기업들만이라도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다면 지금의 위기는 절반 이상 해결된 거나 진배없을 것이다. 사회
지배그룹의 새로운 각성과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주50)
이와 같이 민족주의적 시각 위에서 지배블럭 내 두 분파의 협력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민족주의 수사학을 구사하는 부분들은 허구적이게도 민족
자주의 기수로 나서면서 초국적 자본이 요구하는 개혁.개방 압력 하에서 자신들
의 입지 유지를 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수사학을 가지고 노동자.민중의 저항에
대해 비민족적이라 매도하려는 기도를 하고 있다. 이 흐름은 수구적인 관료분파
들이 위주가 되어 있다. 현대그룹의 문화일보가 뒤로 처지고 수구관료의 입인
조선일보가 전면에 서고 있다. 한편 관료들은 IMF 구제금융 규모를 적게 하려고
허둥대고 있다. 한겨레신문 24일자 좌담에서 안병우 재경원 차관보는 “올해 갚
아야 할 단기자본이 2백억 달러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원규모는 협의
과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나머지는 정부의 국채 발행 등을 통해 메울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는 국제수지 적자 개선입니다. 수출에서 기계
류를 중심으로 한 자본재 산업의 육성과 국내 수요 기반 확충이 필요합니다”라
고 하여 위기 상황 속에서도 수구적인 특권 관료집단이 국가자본주의적인 방식
을 고수함으로써 종래의 특권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러나 그들의 기세는 이미 많이 꺾여 있다.
반면에 재벌들은 초국적 자본에 투항하면서 일제히 그리고 빠르게 “개혁주의
적인 수사학”으로 통일되어 가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개혁은 한마디로 국가기
구의 규제를 철폐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재벌의 이데올로기를 주도하고 있는
삼성의 표현기관인 중앙일보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금융위기에는 정부가 너무 사리에 맞지 않게 이래라 저래라 개입하지 말고
시장의 순리에 맞춰 민간과 협조해 구조조정에 성공하기만 하면 오히려 전화위
복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 금융업은 가급적 자유화해 민간 경영주체에 위임하
고 정부는 진정한 의미의 건전성 감독에 치중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관료가
규제와 인.허가권에 매달리지 말고 기업에 서비스하는 행정에 전념해야 한다”,
“금융시스템 개혁의 다른 한가지 키워드는 ‘투명화’이다. 신임 경제부총리가 취
임과 동시에 발표한 네 가지 ‘금융시장 안정 대책’ 가운데 하나는 투명성 제고
를 통해 내외의 신용을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이 발표한 부
실 자산액이나 외환 보유액은 의도적으로 불투명한 정의에 따른 수치였다”*주
51)
이렇게 재벌 분파들은 정부의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은 전경련의 일련의 발표에서 아주 분명하다. 전경련은 차기정부
역할론에서 정치.경제.행정 전반에 걸친 개혁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작고 효
율적인 정부 △기업 하기 좋은 경제환경 △저비용 정치구조 개선 등을 IMF 구제
금융 시대를 맞아 실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전경련은 현재의
경제위기를 “정부가 고비용-저효율 경제구조를 제때에 개혁하지 못한 데다 정부
의 정책 실기가 누적된 탓”이라고 진단하고, 내년 3월 출범하는 새 정부는 “시
장경제 원리와 글로벌리제이션(세계화–국제화)이라는 두 가지 기본 틀을 토대
로 대내외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 ‘규제의 주범’인 정부조직을 최소화하
고 총체적인 규제완화를 추진해 경제의 발목을 잡는 불필요한 장애요인을 없애
자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 보고서가 제시한 8대 정책과제는 △근로기준법
폐지와 노사간의 다양한 계약형태를 보장하는 근로계약법의 제정 △30대 재벌
지정 제도의 폐지 △은행소유.지배를 제한하는 규제의 완화 △그린벨트 제도 등
토지관련 규제의 대폭 완화 △각종 사회보장 제도에 대한 민간 경쟁체제 도입
△금융실명제 보완 △’규제개혁 위원회’ 설치 △관치금융 철폐 △교육부의 축소
등 현재의 경제(사회적 는 파격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주52)
한편 이렇게 이념공세가 전개되는 속에서 지배세력의 비패권 분파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어이없게도 이들은 초국적 자본의 대변인으로 나서고 있다.
국민회의와 한겨레신문의 일부가 그러하다. 지배세력 내 비패권적 분파의 입장
은 “경제신탁통치를 활용하자”는 한겨레신문 25일자 안국신(중앙대)의 특별기고
형태로 생생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 경제에 꼭 필요한 구조개혁, 안정성장, 균형발전을 제대로 이루어
낼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고 오히려 반겨야 할 일이다. IMF는 이런 목표를 추진
하는 데에 우리 정부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일관성과 투명성을 갖춘 정책당
국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기술개발과 투명경영에 힘쓴다. 특히 재벌은 무분별
한 차입경영, 비효율적인 선단식(문어발) 경영을 지양한다. 근로자는 선진국 근
로자처럼 노동시장 유연성을 받아들인다. 가진 자들은 금융.토지 실명제를 앞장
서 지키고 졸부 소비행태를 털어 버린다. 정치는 정경유착의 온상에서 벗어난
다. 행정은 공정한 경제질서와 제도의 틀을 사심없이 집행한다. 이번 기회에
IMF는 우리 각자가 고통분담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빡빡한 경제환경을 만들어 줄
것이다.” “국제통화기금 ‘신탁통치’가 국민경제에 덕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
다.”
이것은 곧 국민회의의 정치적 입장이기도 하다. “국민회의는 한나라당 및 국
민신당과 전혀 다른 시각을 보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지원과 구조조정이 오히
려 우리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IMF 권
고안 형태로 요구할 성장률 억제, 물가 안정, 재정긴축, 공기업 민영화, 금융기
관 인수.합병과 부실채권 조기 정리 등은 국민회의가 주장해 온 정책공약 기조
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다만 국민회의는 재정 축소에 따른 경기위축이 실업자를 증가시키고 공공요금
인상과 원자재 수입가격 상승으로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등의 부분에 대
해서는 “국민들을 상대로 솔직한 설득작업”을 벌여서 이를 무마한다는 생각이
다.*주53) 이것으로써 국민회의가 초국적 자본의 이해관계 및 시각과 밀착되어
있다는 그 동안의 우리의 분석은 객관적 사실로 검증되고 있다.
□ 주 ———-
1) 2) 24일 삼성물산 3백억, 현대자동차 4백억, LG 유통 1백억의 회사채를 발행하
려고 했으나 현대, 삼성은 실패하고 LG 유통만이 50억 원 어치를 발행하는
데 그쳤다. 25일에는 삼성전자 1천억, 현대전자 5백억, 대우기전 3백억을 발
행하려 했으나 팔리지 않아 도로 가져갔다.
3) ‘중견기업 흑자도산 늘어간다’ 제하의 기사는 “자금시장이 극도의 혼란 상태
에 빠져들면서 대기업에 비해 자금조달 능력이 뒤떨어지는 중견기업들이 잇
따라 도산하고 있다. …… 중견기업들의 잇따른 도산으로 인해 주식시장에
서 중소형 주의 주가가 대형주에 비해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으며…… 중
견기업들은 ‘증시에서 부도설만 나돌아도 휘청거린다’, ‘제2금융권은 물론
사채시장에서도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고 있어 부도 도미노가 우려된다’고 말
했다.” 동아일보 11월 26일자 참조.
4) “즉 자유시장이 형성된 역사적 과정 자체도 국가가 배제된 혹은 국가를 배제
하는 과정이 아니라 국가가 철저하게 계획한 과정이었으며, 자유방임적 자유
시장이 초래하는 사회적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자유시장에 대한 국가적 통제
가 필요하다”는 폴라니의 통찰을 참조하시오–정성진, “세계화인가, 세계적
규모의 축적인가?”, ‘한국자본주의와 21세기의 정치경제학’, 한국사회경제학
회, 1997.에서 재인용.
5) 문화일보 11월 24일자 참조.
6) 중앙일보 11월 25일자 참조.
7) 한국일보 11월 25일자 참조.
8) 조선일보 11월 24일자 시론, 양수길(세계경제정책연구원장).
9) 국민일보 11월 24일자를 참조.
10) 조선일보 11월 24일자와 동아일보 11월 26일자 참조.
11) 한겨레신문 11월 25일자 참조.
12) 동아일보 11월 25일자 참조.
13) 동아일보 11월 26일자 참조.
14) 동아일보 11월 26일자 참조.
15) 한국일보 11월 26일자 참조.
16) 한국일보 11월 25일자 참조.
17) 동아일보 11월 25일자 참조.
18) 동아일보 11월 26일자 참조.
19) 조선일보 11월 25일자 참조.
20) 문화일보 11월 24일자 참조.
21) 한국일보 11월 26일자 참조.
22) 중앙일보 11월 24일자 참조.
23) 오죽하면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세계적인 투기꾼인 소로스를 찾아가서 통
사정을 했겠는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24일(현지시간) ‘세계적인 큰손’
조지 소로스와 만나 한국에 대한 투자 확대를 당부했다. 중앙일보 11월 자 참조.
24) 클린턴의 여유 있는 행태에 대해서는 문화일보 11월 24일자를 보시오. “맨
늦게 22일 밤 나타내더니 일요일인 23일에는 싱가포르 고촉동 총리를 불러내
근교의 골프장으로 모습을 감춘 것이다.”
25) 동아일보 11월 25일자.
26) 매일경제신문 11월 26일자.
27) 매일경제신문 11월 26일자.
28) 동아일보 11월 26일자.
29) 중앙일보 11월 24일자 참조.
30) “세계를 좌우하는 200대 기업”, 프레데릭 F. 끌레르몽, 르 몽드 디쁠로마띠
끄 1997년 4월호 참조.
31) 조선일보 11월 25일자 참조.
32) 조선일보 11월 19일자 ‘경제를 살려야 한다’ 참조.
33) 동아일보 11월 24일자 참조.
34) 중앙일보 11월 24일자 참조.
35) 국민일보 11월 24일자 참조.
36) 한국일보 11월 24일자 참조.
37) 동아일보 11월 24일자 참조.
38) 한국일보 11월 25일자 참조.
39) 한국일보 11월 24일자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내년 실업 1백만 명 넘어설
듯’으로 되어 있다.
40) 재경원 당국자는 기업들이 경기침체로 설비투자를 줄이고 있는 데다가 정부
가 초긴축으로 경제운영의 기조를 바꾸게 되면 성장률은 4% 대를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9월말 현재 2.2%인 실업률도 4%에 육박할 수 있다”고 말
했다. 한편 재벌들이 운영하는 민간연구소들은 실업과 관련 “실업률이 4%이
면 실업자는 통상 80만 명 수준이나 이번엔 구조조정에 따른 감원 등으로 실
업자가 1백만에 근접하고, 특히 주당 취업시간이 18시간 미만인 불완전 취업
자까지 합하면 1백5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국일보 11월 24
일자 참조.
41) 한국일보 11월 25일자.
42) 중앙일보 11월 24일자 섹션 참조.
43) 동아일보 11월 24일자.
44) 동아일보 11월 24일자.
45) 한겨레 11월 24일자 좌담.
46) 한국일보 11월 24일자 오피니언.
47) 조선일보 11월 25일자 참조.
48) 동아일보 11월 25일자 참조.
49) 동아일보 11월 24일자.
50) 조선일보 11월 25일자 사설.
51) 중앙일보 11월 25일자 사설 ‘무너진 경제 되살리자’를 참조.
52) 동아일보 11월 25일자 참조.
53) 한겨레 11월 25일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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