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이름난 인권운동가가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는 정상에 올랐을 때 다른 주권국가의 인권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발언할 수 있을까.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11월11일부터 20일까지 중국 국빈방문과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 참석하면서 아시아 국가의 정치적 현안인 중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인권문제를 단 한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김 대통령은 지난 6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국제인권연맹으로부터 올해의 인권상을 수상한 일이 있다. 그는 수상연설에서 단호한 목소리로 “지구촌 도처의 인권문제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며 “경제를 위해 인권이나 민주주의는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아시아적 가치는 잘못된 주장”이라고 아시아 국가들의 인권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중국에서 주룽지 총리가 “나도 장제스 정부 당시 청화대 앞에서 민주화투쟁을 한 역정이 있는데 중국에서 인권탄압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을 때 별 응답을 하지 않았다. 클린턴 대통령을 대신해 아펙 정상회의에 참석한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이 콸라룸푸르에서 경제인들에게 “미국은 ‘용감한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민주주의와 개혁의 외침을 경청하고 있다”고 연설해 파문을 일으켰지만 김 대통령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버마의 아웅산 수지에 대한 김 대통령의 지지를 기억하고 있는 동남아지역 인권운동가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겼다. 국내 인권단체에서도 아쉬움을 표시했다.
김 대통령은 지난 19일 홍콩에서 청와대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자신이 인권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아펙 정상회의는 기본적으로 ‘경제’를 논의하는 기구라는 것, 또 남의 나라 문제는 우리의 국익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아무리 인권문제라도 언급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대통령은 “그렇다고 인권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앞으로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계속 하겠다는 것이다.
김 대통령은 이틀 뒤인 21일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을 위한 공동 프로그램’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 쪽에서 기본적인 구상을, 미국 쪽에서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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