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흐름] 피땀으로 일군 ‘벼랑끝 역전극’-노동자 인수기업 선전중
어둠이 짙게 깔린 이른 새벽. ㈜제일가전 생산직 사원 김민숙(2 7·여)씨
집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민숙아 큰일났어. 회사 가 부도났대.” 수화
기 저편에선 회사 동료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 러 나왔다. 젊음을 고스란히 바
친 회사가 하루아침에 부도라니.
어젯밤에도 쉴새없이 기계가 돌아가지 않았던가. 날이 새자마자 회사로 달
려나갔다. 아수라장이었다. 채권보전을 위해 몰려든 협 력업체 화물차량들, `
공장 사수’를 외치며 정문을 지키는 동료 노 동자들, 끊임없이 울려대는 외부
의 확인전화….
지난해 3월31일, 경기 화성군 정남면 ㈜제일가전의 길고 긴 하루 는 그렇게
시작됐다. 사장과 경영진은 줄행랑을 친 뒤였다. 그러 나 제일가전의 생산라인
은 멈추지 않았다. 1년6개월이 지난 지금 더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회사 이
름과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 . ㈜제일가전의 현재 모습은 `일하는 사람이 주
인인 기업’ ㈜르비 앙전자다.
르비앙전자가 삭막한 부도기업에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배수진을
친 직원들의 사투가 있다. 직원들은 우선 채권단 및 거 래업체들과 대화창구를
유지하기 위해 현재 회사 대표를 맡고 있 는 박덕성(41) 연구개발팀장을 종업
원 대표로 뽑았다. 그리고는 “일단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창고에 남
아 있는 부품과 반 제품들을 끌어다 무작정 공장을 돌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불안정 한 상태로 공장을 돌릴 수는 없었다. 부도 열흘 뒤 박 대표는 직 원들
을 모아놓고 일일이 의견을 물었다. 회사에 남겠다는 사람이 전체 직원의 절
반 가량인 54명이었다. 의외로 많은 숫자였다. “ 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매끄
럽게 청산절차를 매듭지을 수 있을까에 관심이 있었지, 솔직히 회사를 살릴
생각까지는 못했습니다. 그 러나 생각보다 많은 직원들이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마음이 바뀌었죠.”
그때부터 강행군이 시작됐다. 부도 전의 거래처를 방문해 “차질 없이 물건
을 공급할 테니 계속 거래를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매 달렸다. 제일가전의 주
력상품인 선풍기가 계절상품인 탓에 거래가 비교적 쉽게 이뤄졌다. 문제는 부
품업체였다. 현금은 씨가 말랐 는데 협력업체들은 야속하게도 현금결제를 고집
했다. “부도난 회 사에 뭘 믿고 외상으로 부품을 대주느냐”는 것이었다. 업
체 대표 들을 일일이 한명씩 찾아다니며 인간적인 호소도 하고 때로는 “ 우
리가 살아야 당신도 살 수 있지 않겠느냐”며 은근히 협박을 하 기도 했다. 운
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원들은 보험과 적금을 해 약했다. 집을 담보로 은행
에서 대출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박 대 표도 20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모은 주택구입자금을 모두 털 었다. 공장은 그럭저럭 굴러갔다. 내친 김에 오
이엠 생산에서 벗 어나 자체상표를 붙여 판매에 나서기로 했다. 생산직 사원들
까지 나서 영업 일선에서 뛰었다. 마침내 지난해 9월 대형 할인점에 `르비
앙’ 상표를 단 청소기, 가습기 등이 첫선을 보였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채권단에 의해 경매에 넘어가 있는 공장시설 이었다.
다시 한번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입찰보증금 을 마련했다. 입찰이
실시된 올해 1월28일 수원지법 경매법정. “ 땀으로 이룩한 제일가전, 피로써
사수하자” “경매가 왠말이냐, 제일가전 살아난다” 직원들은 법정 앞에서
현수막을 들고 시위 를 벌였다. 다른 사람의 입찰 참여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짜낸 묘 안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단독입찰로 공장을 낙찰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돈. 경락대금이 무려 14억여원이었다. 담보도 없 는 부도기
업에 은행이 돈을 내줄 리 없었다. “수원, 오산, 평택 , 천안 등 은행 간판이
붙은 곳은 다 다니며 구걸하다시피 했죠.
” 회사의 돈줄을 책임지고 있는 권영훈(38)경리팀장은 “나만 바 라보고 있
는 회사 대표와 직원들이 야속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 경락대금 납입을 두
차례나 연기하자 4월15일로 재경매가 잡혔다 . 공든 탑이 무너질 순간이었다.
기적은 이럴 때 일어나는 법일까 . 한 은행의 영업팀 직원이 신규 거래업체 물
색을 위해 돌아다니 다 `우연히’ 회사에 들렀다. 두시간 동안 정신없이 설득하
고 매달 렸다. 마침내 대출 결정이 났다. 재경매 3일 전이었다.
직원들은 오로지 일에 매달렸다. 1년 뒤 회사는 이렇게 변했다.
▲ 지난 8월에는 새로 들어온 사원 7명을 뺀 전 직원이 밀린 임 금과 퇴직
금을 자본금으로 출자전환해 노동자가 100% 지분을 갖게 됐다.
▲ 지난해 42억이던 매출액을 올해는 70억원으로 늘려잡았다. 1 억원 정도
의 흑자도 예상하고 있다.
▲ 투명한 경영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한달에 한차례 주임급 이 상 직원이
참여하는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중요 정책을 결정할 때 나 규칙을 정할 때는
팀장급인 경영진 4명과 평사원 대표 4명이 참여하는 경영위원회를 열어 합의
점을 찾는다.
르비앙전자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는 벗어난 만큼 `노동자인수기업 ‘의 틀을
만든다는 새로운 목표를 정립했다. 우리사주조합 규약을 만든 데 이어, 사원
복지와 분배방식 등에 대한 규정도 곧 마련 하게 된다. 박 대표는 “종업원이
주인인 회사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 일할 맛 이라고 말했다.
피와 땀으로 일군 `전화위복’이었다.
이종규 기자 jklee@hani.co.kr
◐ 99년12월01일22시54분 한겨레 http://www.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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