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디지털새천년] 11.직장 “직업은 있어도 직장은 없다”
발디딜 틈조차 없이 북적대는 지하철, 자동차로 꽉막힌 도로.
출퇴근할 때마다 마주치는 도시의 풍경이다. 직장인이라면 한번 쯤은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리를 내달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시간조차 기다릴 수 없어 계단을 뛰어오르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출근전쟁을 치르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원격근무'(telework)가 달
콤한 꿈처럼 떠오 른다.
그 꿈이 머잖은 장래에 실현된다. 정보통신 기술의 인터넷과 네트워크시스템의 발전이 뒤에서 밀고, 이동통 신, 화상회의 프로그
램, 웹비디오폰과 같은 정보통신 기술이 앞에 서 끌며 꿈을 현실로 만든다. 발
전속도로 보건데, 원격근무는 가 까운 시일 안에 직장인들의 보편적인 근무형
태로 자리잡을 전망이 다.
미국의 실례를 들여다보자. 지난 94년 실리콘밸리에 있는 7개 회 사에서
300명으로 시작된 원격근무자는 최근 이 지역에서만 무려 200만명으로 증가했
다. 미국 전역의 원격근무 인원은 1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취업자
10명 가운데 한명 정도가 출퇴근 의 부담없이 일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사무실근무와 재택근무의 절충형태인 위성사무실도 확산되고
있다. 노동자들이 자신이 사는 곳 가까이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정보통신시설을
갖춘 사무실을 지역별로 여러 곳에 두는 것이다. 당장 미국정부가 이런 위성
사무실을 워싱턴 지역에 여러 곳 설치해 확산을 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외국계 기업을 중심으로 원격근무 형태가 자리잡아가
고 있다. 한국IBM의 경우 1400명에 이르는 직원 가운데 900명은 자기 자리가 없다. 이들은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바로 고객과 접촉한다. 덕분에 사무실
이 절반 가까이 줄어 회사는 비 용절감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원격근무가 제대로 시행되면 기업주나 노동자 모두에게 이득이다 . 기업 쪽
에서는 사무실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노동자들은 더욱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어 생산성이 부쩍 높아진다. 출퇴근전 쟁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데다,
시간을 스스로 관리하게 되므로 , 창조적으로 작업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무실
의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문화적 차이나 갈등으로 불필요하게 스트레스를
받을 일 도 없다.
지금까지 원격근무의 확산을 막아온 것은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
하고 있는지 기업주가 감독할 수단이 별로 없었다는 점 이다. 원격근무자들도
자신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없어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미국의 원격근무자들은 회사에 서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못할까봐 화장
실에 가는 것도 두 려워했다고 한다. 10년전만 해도 회사가 재택근무를 시켜주
겠다고 해도 응하겠다는 미국인들은 소수에 그쳤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장
벽들을 정보통신
원격근무가 확산되면 고용관행도 크게 달라진다. 어떤 직장에 공 간적으로
매어 있지 않으면 아무래도 직장에 대한 귀속의식이 약 해지게 마련이다. 기업
처지에서도 한식구라는 생각이 줄어든다.
따라서 원격근무의 확산은 지식노동자화 추세와 맞물려 계약직이 나 임시
직, 시간제노동자 같은 자기고용(self-employment)의 경향 을 강화한다. 지식
노동자는 자신의 전문지식을 기본자산으로 삼기 때문에 독립성이 강하기 때문
이다. 앞으로는 개개인이 독립적인 지식기업이 되는 것이다.
계약직이나 임시직, 시간제노동자 등과 같은 불완전고용에 대한 인식도 달
라진다. 지금처럼 이들의 고용조건이 열악하다거나, 이 들은 기업의 비용절감
수단이라는 인식이 줄어들 것이다. 그 대신 비상근적 고용이 기업과 노동자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거나 비상 근자는 전문직의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다. 육아나 가사 때문에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던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 활발해진다.
물론 원격근무의 문제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시대의 일반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전자공간은 구성원간의 상호작용을 어렵게 해 소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기업조직의 역사나 전 통에 대한 동질감도 줄어든다. 창
의적 업무수행을 요구받게 되면 서 그에 따른 정신적 압박감이 오히려 커질 수
있다. 원격근무의 시대는 능력 위주의 시대와 동의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없는 노동자의 도태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고착화될 수도 있
다. 그러면 사회통합력이 약화돼 새로운 사회불안 요인으 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혜 를 갖춘다면, 디지털 시대의 직
업세계는 노동의 인간화에 훨씬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채창균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 ckche@hri.co.kr
◐ 99년12월14일19시49분 한겨레 http://www.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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