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행란 조합원이 농성장 구석에서 “비에 젖은 신발에서 냄새가 나는데도 그냥 두니 참을 수 있어야지”라며 신발을 빨고 있었다. 그리고 조합원들의 흉보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신발을 다 빤 박행란 조합원은 자리를 일어서면서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기륭분회 조합원들은 오후 3시 여의도에 위치한 한나라당사 앞에서 열리는 ‘기륭투쟁 승리를 위한 결의대회’ 참석하기 위해 농성장을 나섰다. 약간 늦게 출발해 버스정류장에 급하게 갔지만 여의도를 가는 버스를 바로 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뒤에서 천천히 오던 조합원에게 이미영 조합원이 핀잔을 줬다. 뒤에서 오던 조합원은 짐짓 못들은 척하며 버스정류장 옆에 있던 의류매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의류매장에서 돌아온 조합원은 티셔츠 하나를 만 원에 샀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백화점에서 팔던 이월의류를 싼 값에 사는 ‘쇼핑의 지혜’까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버스를 내려 집회 장소로 걸어가는 길에 드라마 촬영 중인 차량을 만났다. 이들은 신기한 장면을 건진 듯 수다를 떨었다.
작은 일에도 미소를 머금고 행복을 찾는 이들이 어쩌다 1080일이 넘게 싸우게 됐을까.
기륭분회 조합원들이 집회 장소에 도착하니 집회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곧바로 이미영 조합원이 발언을 시작했다.
“한나라당의 본질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단식하고 있는 동지를 살리기 위해 찾아갔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중재한 합의서는 다음 날 기륭자본에 의해 파기됐다. 천일의 투쟁보다 더 길고 힘든 3개월이었다. 조금 있으면 야 3당 여성 국회의원의 중재로 교섭이 시작된다. 중재안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함께 하는 동지들이 있어 싸우고 있다. 단식하는 동지를 살리기 위해, 비정규직이 더 이상 목숨 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위해 싸울 것이다”
이미영 조합원은 마이크를 잡으며 눈물을 흘렸고, 기륭분회 조합원들도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훔쳤다. 조금 전 수다를 떨며 웃던 모습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음이 여려 눈물을 참지 못하는 이들이 어쩌다 1080일이 넘게 싸우게 됐을까.
집회가 끝나기도 전에 이들은 교섭을 위해 노동부 관악지청으로 향했다. 기륭분회 조합원들은 교섭장 옆에 위치한 휴게실에서 대기했다. 금속노조 교섭위원들은 수시로 휴게실을 드나들며 조합원들에게 교섭상황을 보고했다. 기륭분회 조합원들의 질문과 토론이 이어지자 휴게실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교섭위원이 나가고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누가 나를 왕따 시키네”, “시도 때도 없이 방귀를 뀌네”라는 식의 잡담이 이어지며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작은 일에도 행복을 느끼는 이들이 어쩌다 1080일이 넘게 싸우게 됐을까.
기륭분회의 막내인 최은미 조합원의 글이 실린 한 단체 간행물이 휴게실에 전달됐다. 모두의 관심이 최은미 조합원의 글에 집중됐다. 한 조합원이 진지하게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기륭분회 조합원들은 그 조합원이 책 읽는 모습을 처음 본다고 입을 모았다. 최은미 조합원의 입가에 미소가 돌며 어깨에 힘이 들어 갔다.
작은 일에도 행복을 찾는 이들이 어쩌다 1080일이 넘게 싸우게 됐을까.
촛불문화제를 위해 기륭전자 농성장에 있었던 조합원들이 노동부 관악지청으로 돌아 왔다. 돌아온 조합원들은 ‘82cook.com'에서 밑반찬을 가득 챙겨주었다는 이야기, 누가 와서 악수를 했다는 이야기를 웃음과 함께 도란도란 펼쳐냈다.
작은 일에도 행복을 찾는 이들이 어쩌다 1080일이 넘게 싸우게 됐을까.
한 조합원이 “교섭결과보다 단식하고 있는 동지들이 더 걱정이다”며 한숨을 내뱉었다. 교섭이 13일 자정을 넘겨 계속됐다. 기륭분회 조합원들이 지쳤는지 의자에 기대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눈은 감고 있지만 좀처럼 깊게 잠이 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기륭노사 간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팽팽한 의견 차이로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금속노조 교섭위원이 14일 새벽 2시경 교섭을 마치고 기륭분회 조합원이 있는 휴게실로 돌아왔다. 14일 오전 10시에 교섭이 재개된다고 했다. 기륭분회 조합원들은 농성장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이들의 하루가 또 다시 끝이 났다.
투쟁이 쉽지만은 않은 이들이 어쩌다 1080일이 넘게 싸우게 됐을까.
그리고 하루하루가 쉽지 않은 이들에게 내일은 어떤 오늘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