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탈한 철도노동자들, 잠정합의안은 부결

철도노조 집행부 거취 및 이후 계획 오늘 논의

철도 노사가 20일 새벽 잠정합의안을 발표함에 따라 이날 오전 9시로 예정된 파업은 철회됐지만, 철도 현장 조합원들의 분위기는 냉랭하다.

황정우 철도노조 위원장이 새벽 1시 40분께 수색차량기지에서 잠정합의문을 낭독하자, 파업을 기다리며 밤새 대기했던 조합원들은 격한 불만을 드러냈고 결국 이 합의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일 새벽, 수색차량기지에서 잠정합의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황정우 위원장/ 이정원 기자

확대쟁대위서 잠정합의안 부결

곧이어 각 지부장들로 구성된 확대쟁의대책위원회 회의가 열려 잠정합의안 수용 여부를 논의했으나, 총 165명 중 64명만이 찬성해 부결된 것. 반대는 76명, 기권이 15명이었다. 그간 철도노조가 파업 직전 미흡한 잠정합의안을 도출할 때마다 조합원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쟁대위에서 통과시켰던 이력을 볼 때 이례적인 일이다.

현장에선 이번 잠정합의안이 조합원들의 요구를 반영하기는커녕 실제로 '아무 것도 따낸 것이 없다'는 반응이 많다. 임금 부분에서도 기획재정부의 공기업 임금인상 가이드라인 3%를 받아들였고, 철도노동자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해고자 복직 문제도 올해 안에 풀리지 못하게 됐다.

이는 강경호 전 코레일 사장이 구속되면서 노조와의 합의에 부담을 느낀 철도공사 측이 교섭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빚어진 일이기도 하나, 일각에서는 필수인원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열차 운행에 차질을 빚지 않게 하는 '합법파업'이 파업의 효력 면에서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경제위기'를 운운하며 '불법'을 예단, 노조를 압박한 것도 이번 합의의 배경이 됐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철도노조의 오늘이 있기까지 굵직한 투쟁으로 앞장서 기여해 온 해고 조합원들이 벌써 6년여 동안 해고 상태에 놓여 있지만, 이들의 복직 여부는 매년 노사 협상의 쟁점이 되어 왔다. 이번에 황정우 위원장은 "해고자 복직 없이 임단협 타결 없다"고 누차 강조해 왔으나, '2009년 상반기'라는 논의 시한만 정해진 채 또 복직은 뒤로 밀렸다. 잠정합의안 소식을 들은 해고자들은 말없이 전야제 장소를 떴다.

  잠정합의안 내용에 격분한 한 조합원이 단상 위의 황정우 위원장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이정원 기자

수색차량기지에서 잠정합의안 내용을 들은 조합원들이 격앙된 반응을 보인 것은 물론, 파업 전야제에 참석한 '애국촛불전국연합' 등 네티즌들도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인터넷으로 생중계된 파업 전야제 현장을 시청하던 시민들과 네티즌들도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철도 민영화 반대" 파업지지 네티즌도 '실망'

네티즌 '40대'는 "철도노조 파업은 왜 한다고 한 건가"라고 물으며 "파업하면 하는가보다, 철회하면 하는가보다하고 그냥 그렇게 알기보다는 국민들이 과연 파업이 정당한지 아닌지, 파업 철회가 정당한지 아닌지, 노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체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답답해했다.

이명박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방안'에 우려를 갖고 철도노조 파업을 지지해 왔던 일부 네티즌들은 다음 아고라 자유토론방 등에서 "철도노조가 백기투항했다", "공기업 민영화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는 등의 글을 올리며 실망감을 표하고 있다.

한 철도노동자도 노조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다음)아고라에까지 까발린 희대의 쌩쇼였다"고 잠정합의안을 혹평하며 "이제 조합원뿐만 아니라 국민들까지도 노조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나마 철도 민영화 반대라는 이유에 국민들도 지지했으나 (...) 앞으로 철도에서 파업하자면 국민들에게 맞아 죽는다"는 비관적인 내용의 글을 올렸다.

오늘 새벽 5시경 '파업투쟁 유보지침'을 발표한 철도노조는 이번 잠정합의안 부결에 따라 이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오늘 오후 3시 긴급 중앙쟁의대책위원회 회의를 열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잠정합의안 부결에 따른 집행부 거취 문제, 공사와의 재협상 여부, 파업 강행 여부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