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건만

사북… 산자락을 휘감아 돌며 늘어선 짙은 회색빛 아파트가 방문객을 무덤덤하게 맞았다.

잔뜩 흐린 하늘은 야트막한 양철 지붕위로 비를 뿌리고,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스산한 삶이 배어났다. 멀리 산허리를 세로로 잘라 우뚝 선 빨간색 송신탑만이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원색. 하지만 도시 전체를 휘감아 도는 우울함을 달래지는 못했다.

8,000여 탄광노동자 가족들의 집회, 250여 노조간부들 삭발과 천막농성, 연맹 위원장을 비롯 단위노조 위원장 12명의 갱내 단식농성, 간부 부인들의 삭발, 5,000여 조합원의 삭발 결의 신청… 밖에서 바라본 사북은 폭발 직전이었다.

하지만 단 하루만에 모든 것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요구가 관철됐다’는 노조간부들의 말은 공허하게 들렸다. 길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관심 없습니다. 달라질게 뭐 있겠어요”라며 담배만 피워댔다.

99년 9월의 어느 날. 사북은 그렇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잿빛 하늘, 회색 땅, 무표정한 사람들…

올해 사북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정부당국이 전력산업의 민영화를 공식화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문제가 무연탄 발전소의 해외매각. 탄광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무연탄 410만톤의 70%를 사용해온 발전소들이 매각되면 값비싼 국산 무연탄 소비는 급속하게 줄어들 것이다. 매각 백지화만이 석탄산업을 살릴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동원 복지회관 광장은 검은색 만장으로 뒤덮 혔다. 상인들도 모두 가게문을 닫고 농성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은 정부에 다섯 가지를 요구했고 “모두 들어주기 전에는 한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북 사람들은 여기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사북에는 폐광이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500m의 수직 갱도를 내려가 사방 6km에 펼쳐진 레일을 따라가야 막장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사북의 동원탄좌다. 당연히 채탄비용이 많이 든다. 단위무게 대비 열량도 장성 탄좌의 70% 수준인 4,000∼5,000칼로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발전소 매각 백지화보다 정부의 폐광 대책비에 있었다.

한창 채탄이 진행되고 탄질도 좋은 태백의 장성광업소와 도계 경동광업소 등지 탄광노동자들이 주장했던 ‘발전소 매각방침 철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사북을 휘감고 있는 무거운 분위기는 얼핏 체념처럼 보였다.

하지만 탄광과 자신의 미래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수직갱도 입구에서 한 노동자는 화를 내며 말한다. “36개월분이 요구사항입니다. 폐광대 책비 현실화를 위한 특별기구를 만든다는데 이게 어디 팩스 한장 받았다고 해결되는 겁니까?” 아무도 발전소매각 반대, 정부비축분 유지, 감산정책 철 회를 얘기하지 않았다. 아니, 얘기할 수가 없었다.

*카지노가 희망이라고?

올해 사북에는 무슨일이 있었나? 정선군 사북면 옹구마을에서는 지난 5일 거창한 행사가 치러졌다. 이름하여 ‘사북 관광특구’ 건설 계획에 따라 ‘서울 카지노’를 짓기 시작하면서 현실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사북 사람들은 카지노에 관심 없다. 광산노련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사실 카지노가 생긴다고 해서 석탄을 캐던 사람이 호텔 지배인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동네 분식집 주인아줌마가 호텔 레스토랑을 경영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으로 5년 정도 걸릴 관광특구 건설이 완료된 뒤에는 정말로 폐광이 현실화된다는 불안감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1,000여명의 탄광 노동자가 근무하는 동원탄좌가 문을 닫는 것이고 그동안 사북을 지탱해온 경제의 기초가 사라지는 것이다.

길에서 만난 한 노동자는 말한다. “대책비 나오면 사북을 뜰 겁니다. 정부가 지원해서 관광특구라고 만들었지만 그게 어디 우리 돈벌라고 해놓은 겁니까? 받은 돈 다 날리기 전에 어서 여길 떠나야죠” 그는 동원탄좌에서 10년째 근무하고 있다. 폐광 얘기가 나오자 목돈을 만질 수 있어 오히려 좋다고 했다. 하지만 이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의 어깨너머로 비오는 사북의 잿빛 하늘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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