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논란, 모두 화가 나 있다

위안부 논의, 민족주의 감수성과 순결한 소녀 이미지 넘어설 수 없나



문을 열자마자 안경에 김이 서렸다. 실내에는 수용 한계 인원을 훌쩍 넘겨 가득 찬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후끈했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복도에는 우산 십수 개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어지간해서 문밖 출입도 하지 않을 날씨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모여든 곳은 재일 교포 사학자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의 저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출간 기념 강연회 현장이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열린 강연회에는 정영환 교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50여 명의 청중과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서승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 고문, 김창록 경북대 교수 등이 자리했다. 강연회 사회는 강혜정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실행위원이 맡았다. 정영환 교수를 비롯해 모두 '제국의 위안부'에 비판 입장을 지속해 밝혀 온 이들이다.

정영환 교수의 책은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검증하고 논박한다. 정영환 교수는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위안부 문제 본질의 수정을 시도한다”고 비판한다. 정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호평을 받은 이유는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이 원하는 위안부 이미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 강연한 박노자 교수와 김창록 교수 역시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강연을 했다. 박노자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제국주의와 파시즘, 자본주의 역사를 옹호하는 역사 수정주의의 갈래 속에 있다”고 말했다. 박노자 교수의 뒤를 이어 강연한 김창록 교수는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에 대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강연회에는 정영환 교수가 비판한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 박유하 교수도 참석했다. 박 교수는 출간 기념 강연회가 열리기 하루 전 강연회 개최 소식을 알았고 출판사 측에 본인의 참석 가능 여부를 물었다. 출판사 측은 “학문적 교류가 이뤄지길 바란다”는 ‘초청 공문’을 박 교수에게 보냈다. (출판사 측은 박 교수에게 보낸 건 ‘초청 공문’이 아니라 ‘안내문’이었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 과정에서 실무자의 착오가 있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유하 교수는 강연이 끝나고 이어진 간담회에서 공식적인 발언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토론자 자격으로는 발언 시간을 얻지 못했다. 박유하 교수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진 건 종료 시각 20여 분을 남겨 둔 시점의 청중 질의 응답 시간이었다. 박유하 교수가 정영환 교수와 논박을 벌이던 짧은 시간에 청중들은 박 교수에게 야유를 보냈다.

박유하 비판의 논지

2013년 7월, 박유하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제국의 위안부'를 출간했다. 책은 나오자마자 반향을 일으켰다. 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주도해 온 한국의 위안부 운동을 비판했다. 정대협의 활동이 위안부 문제를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로 박제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박 교수는 위안부의 동원 방식과 위상에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며 그 다양한 층위를 이해하는 것이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선결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 군인과 위안부 사이를 ‘동지적 관계’라 표현한 것도 도마에 올랐다. 이 표현을 놓고 정대협과 ‘나눔의 집’ 등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들은 박 교수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지원 단체들이 박 교수를 비판하고 나서자 박 교수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박 교수는 ‘친일파’로 지칭되기 시작했다. 2014년 6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나눔의 집’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출판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피해자 1인당 3000만 원씩 총 2억 7000만 원의 민사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제국의 위안부' 논란은 지식인 사회에서 덩치를 키웠다. 박 교수의 주장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박유하 교수 비판의 선두에 서 있는 건 정영환 교수다. 정 교수는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박 교수가 이를 위해 사료를 과잉 해석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 교수는 “정치적 의도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와 강연회 등에서 “동족이나 애국을 언급한 것은 위안부의 말이 아니라 일본군의 말”이라고 지적했다. '제국의 위안부'에 쓰인 위안부 피해자 황순이의 “‘운명’이라는 말로 용서하는 듯한 그녀의 말”이란 증언 역시 증언집에 나오는 문구와는 다르다며 “할머니의 증언을 과잉 해석 했다”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또 한일협정, 국민기금,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박 교수의 우호적인 평가 역시 박 교수의 ‘일본 입장의 시각’에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정 교수는 1일 열린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 “사료와 증언의 왜곡 등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식인들이 이례적일 정도로 책을 절찬한 배경에는 일본 지식계의 우경화, 그리고 일본 리버럴도 이해할 수 있는 위안부 이미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정영환 교수가 일본에서 박유하 교수 비판의 물꼬를 텄다면 국내에서 박유하 비판의 대표 선수로 나선 건 박노자 교수다. 박노자 교수는 박유하 교수의 연구와 주장을 ‘언어도단’이라고 비판한다. 박유하 교수의 주장은 역사 기록과 관계없는 주장이라는 견해다. 박노자 교수는 박유하 교수의 주장처럼 일본 군인과 위안부 사이에 ‘동지적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2등 국민으로 민족적 차별을 받고 있던 조선인 여성, 거기에 더해 전시 성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인 일본 군인과 동지적 관계를 형성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박노자 교수는 박유하 교수의 주장을 “거대 자본의 자본가와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동지적 관계를 형성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주장”이라고 말했다. 박노자 교수는 “내지 호적을 따로 두고 조선인을 2등 국민으로 취급하는 등 식민지 시대에 민족적 차별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 민족 차별을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노자 교수는 위안부 문제 해결 방식에서도 박유하 교수와 입장이 엇갈린다. 박유하 교수는 “일본의 법적 배상, 국회 결의를 통한 사죄와 배상은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없고 요구할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범죄’로서 물을 ‘법’ 자체가 당시의 국가 시스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박노자 교수는 “일본은 당시 국제 여성 인신매매 방지 조약에 가입해 있었고 일본 국내법에서도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적 책임을 물을 근거가 충분하다”고 반박한다. 박노자 교수는 또 “우경화된 현재의 일본 정부가 이 같은 요구를 들어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쟁취할 수 없더라도 온당한 투쟁을 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모두 화가 나 있다

학술 논쟁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이성적이고 건설적인 학술 토론보다는 감정과 화가 앞선 다툼으로 번져 가고 있다. 박유하 교수는 학술 연구의 결과를 공개하는 데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는 상황이 됐다. 정영환 교수의 출간 기념회 직전 열린 기자 회견에선 박유하 교수를 고발한 지원단체들의 소송에 연대하겠다는 발언도 나왔다. 학술의 영역에서 쓰이는 언어, 논리적인 비판이라고 보기 어려운 표현들이 동원됐다. 한 사회학자는 “박유하는 학문적으로 파산했다”고 말했다. 박노자 교수는 “박유하 교수의 연구는 역사 연구라기보다 창작 소설”이라고 비판했다. 정대협 관계자는 박유하 교수에 관해 묻자 “대응하고 싶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박유하 교수가 일본 우익의 논리에 복무한다는 비난은 박유하 교수를 비판하는 입장을 가진 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정영화 교수도 박유하 교수에게 “정치적 의도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은 박유하 교수의 주장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김규항 발행인은 “지금 박유하를 비판하는 논조 자체가 정상적인 지적 접근이 어려운 상태”라고 말했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학자들이 화가 나 있고 흥분해 있다”는 지적이다. 김 발행인은 “위안부 문제는 우리의 화와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문제기 때문에 감정적 한계를 돌아보고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더욱 냉철하게 접근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유하 교수로부터 직접적인 비판을 받은 정대협 역시 이에 대해 논리적인 반박을 펴진 않는다. 박유하 교수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결과, 관민합작으로 조성된 ‘아시아여성평화기금’을 비교적 높게 평가하고 실질적 보상의 의미를 강조한다. 반면 정대협은 이 기금의 수령을 거부하고 이 기금을 수령한 일부 피해자들에게 국내에서 조성된 다른 지원 기금을 받을 자격을 제한하기도 했다. 박노자 교수 역시 이 기금에 대해 “일본 정부의 입막음 비용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아시아여성평화기금 수령에 대한 입장 차이와 기금을 수령한 피해자를 배제한다는 비판에 대한 정대협의 입장을 물었으나 정대협 관계자는 “잘못된 기금이기 때문에 반대한 것뿐”이라는 답을 내놨다. 기금 수령자에 대한 배제를 묻는 말에도 “일본의 이간질”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일본 정부가 잘못된 기금을 만들었는데 그걸 왜 정대협에 책임을 묻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학술 비판’을 ‘운동 감성’으로 대응하는 듯한 태도도 엿보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반성매매 연구에 매진하는 중앙대 사회학과의 이나영 교수는 “1시간만 수요집회에 나와서 앉아 있어 보라”고 말했다. 정대협 관계자 역시 “김규항과 박유하 모두 수요집회 한 번 나와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며 비판의 ‘자격’을 강조했다.

정대협이 대표하는 위안부 운동이 민족주의 감수성에 경도돼 논의를 이성적으로 진행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유하 교수는 우리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로 고정하고 다른 층위의 피해자들은 배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규항 발행인 역시 “위안부 운동이 순결한 소녀에 방점을 찍는 매우 전근대적 여성관에 기초한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비판했다. 김 발행인은 “민족주의는 카타르시스를 끌어내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지만 사실에 부합하는 운동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감정 섞인 말은 자칭 진보라는 언론에서도 이어진다. 정영환 교수 출간 기념 강연회를 취재한 <한겨레> 기자는 기사를 통해 박유하 교수의 주장을 ‘일본군 무죄론’으로 단순화했다. 박유하 교수의 발언 시간 요구를 ‘이상한 논리’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박유하 교수의 주장은 “일본인들의 사죄 의식을 끌어내고 키우기 위해서는 과거사는 덮어 둬야 한다는 것”, “‘화해’는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가 아니라 오직 망각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이냐는 의문이 들었다”는 말도 있다.

제자리걸음

논의가 생산적인 토론보다 감정 다툼으로 비화하면서 정작 담론의 발전은 정체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아시아여성평화기금’에 대한 입장 차이다. 박유하 교수는 이 기금이 실질적 보상이며 관이 관여한 일본의 공식적인 보상에 가깝다는 입장이다. '제국의 위안부'에서도 “과거에 기금에 반대했지만 지금은 그때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이란 김문숙 민족과여성역사관장의 말을 인용해 기금 수용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김문숙 관장은 정대협 결성 초기부터 정대협 활동에 관여했고 부산 정대협 대표를 지냈다.) 그러나 정대협은 이 기금의 수령을 거부하고 피해자들에게 기금을 수령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박유하 교수는 이 기금의 수용을 거부하면서 일본 내부의 양심적인 시민, 지식인들과의 연대도 어려워졌다고 주장한다. 기금에 대한 갈등과 사실 이상의 비난이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과의 관계마저 차단했기 때문이다. 박유하 교수에 따르면 아시아여성평화기금의 발기인인 와다 하루키 교수는 “일본 정부가 기금의 부족분을 충당하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박유하 교수는 “일본 정부가 기금 조성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기금에 대한 논의가 중요한 까닭은 비단 금전 보상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기금에 대한 입장 정리는 고노 무라야마 담화의 정치적 의미, 일본의 공적 보상 범위에 관한 규정, 일본 정부에 대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입장 변모까지 규정하는 논의다. 정대협은 기금 거부에 대한 비판에 구체적인 답을 내지 않고 있다. 기금 수령을 거부하면서 일부 피해자들을 배제했다는 비판에만 “기금을 받은 피해자 할머니들과도 정대협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 방식에 대해서도 논의는 멈춰 있다.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 민족주의 감수성을 내세운 운동 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정대협 측은 1990년대 초반 정대협 결성 이후로 여성주의 운동과 함께 정대협의 운동 방식도 변모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규항 발행인은 “정대협 역사도 변화가 있었지만 대중 일반에게 작동하는 위안부 운동의 이미지는 ‘우리 민족의 순결한 소녀’에 맞춰져 있다”고 지적한다. 박유하 교수 역시 “대중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저항의 주체로 교육받아 왔고 그렇지 않은 주체, 다른 층위의 피해자들이 드러나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고 그래서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대협을 비롯한 운동 세력은 운동을 위해 민족주의의 틀로 그 인식을 이용해 왔다”는 비판도 더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시각을 제기한 셈이다. 그러나 박유하 교수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반론은 아직 없다. 정영환 교수는 박유하 교수의 지적들에 대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몰이해와 지적 퇴락”이라고 답했다. 김규항 발행인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토론할 여건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며 “구체적 해결 방식에 대한 논의와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고 토론 자체가 안 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아이러니

아이러니는 박유하 교수와 그녀를 비판하는 진영 모두가 제시하는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 해결 양태가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박유하 교수의 주장은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라는 민족적 관점에 국한된 사고에서 벗어나 더욱 다양한 층위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조를 살피자는 것이다. 박 교수는 위안부 동원 과정의 실상, 인신매매 구조, 가부장 사회의 책임, 제국주의의 속성, 순결한 소녀 이미지가 가진 한계 등을 두루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유하 교수는 “위안부 문제는 근본적으로 성의 위계 차이에서 발생한 문제이며 거기에 계급의 문제, 제국주의에서 발생한 국가 대 개인의 착취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성 격차의 문제라는 걸 알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 아이러니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군인에 의한 조선인 여성의 피해’라는 구도에서 나아가 계급의 문제, 젠더의 문제로 논의의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진단은 정대협을 비롯한 박유하 비판 진영에서도 비슷하게 내놓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필리핀 성노예 문제에 대해 정대협과 위안부 피해자들이 연대했을 때가 가장 고무적이었다”고 밝혔다. 정대협 역시 국내의 미군 위안부 문제를 수면 위로 등장시킨 것이 정대협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거론하면서 위안부 운동이 보편적 여성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결국 이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 국제주의, 보편주의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데에 양측은 이견이 없다. 같은 주장과 방향을 갖고서도 서로를 공격하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아이러니다.

박유하 교수는 “어렵사리 국제 연대도 만들고 입장도 정리해 놓은 상태에서 가해자를 일본으로만 국한하려고 하니 문제가 다시 꼬이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서 박노자 교수와 정영환 교수 등은 ‘역사 수정주의’라는 입장이다. 같은 말을 이미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논의는 접점과 해결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김규항 발행인은 “논의는 서로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상승 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민족주의 감수성을 걸러내고 박유하의 새로운 의견을 개방적 태도로 수용해 토론해야 한다”는 지적. 김 발행인은 “당장은 대중의 호응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논의를 지속하면 대중도 호응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영환 교수는 박유하 교수의 연구를 ‘화해론’이라고 이름 붙였다. 최근 저서의 제목도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다. 박 교수의 ‘화해’가 섣부른 수정주의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박유하 교수는 “정영환 교수의 오독”이라고 지적했다. 박유하 교수는 “화해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양쪽 간의 기본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올바르게 알아야 대화가 시작된다. 기본적으로 정보의 지평을 똑바로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 간이건 사람 사이건 ‘화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정보 습득이 우선이다. 귀를 기울여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 정보를 취득하고 이해하는 데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 깊어진 감정의 골은 같은 편을 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화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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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한수진

    박유하에 대한 감정적이지 않은 학술적 비판이 왜 없습니까...얼마나 많은 역사학자, 여성학자들이 이 책을 '학술적'으로 논파했는데요. 그리고 박유하의 책은 단순히 다양한 층위를 살피자는 게 아니라 '위안부와 일본 제국주의가 적대적 관계에만 있던 게 아니다' '일본에는 법적 책임이 없다'는 명확한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책이고 이건 책에 써있어요. 제발 제국의 위안부와 이에 대해 전문가들이 기고한 숱한 서평들을 몇 개라도 읽어보세요.
    그리고 도대체 진보민중언론의 기자가 어떻게 피해자와 연대주체들의 분노를 비이성으로 몰아가고 최소한의 공감을 보여달라는 호소를 '운동 감성'이라고 폄하합니까? 강간을 화간으로, 제국주의의 피해자들을 제국주의의 부역자로, 피해자를 헌신적으로 지원해온 활동가들을 국가주의 정치꾼으로 묘사하는데 "화가 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요? 노동자들이 조중동, 종편에 분노해서 시위해도 담론을 담론으로 반박하지 않는다며 비이성으로 몰아가실 거에요? 민족주의 비판에 도움이 된다면 2차 가해도 감싸줘야 합니까? 어떻게 피해자 관점이 이렇게 손톱만큼도 없어요?

  • 정확한 비판

    류한수진님, 그렇게 많은 역사학자, 여성학자들이 '학술적'으로 논파한 것을 본 적이 없네요.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류한수진'님을 비롯하여 '전문가'들이 '기고한 숱한 서평'을 보면, 박유하의 책을 두고 '일본의 법적 책임이 없다'고 요약해서 박유하가 일본을 면죄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이건 악의적인 오독입니다. '범죄(Crime)'와 '죄(Sin)'에 대한 기본적인 구분조차 없는 판단이지요. 책을 다시 읽으실리 없으니 인용해 둡니다. "시스템이 비인륜적이라고 해서 곧바로 그것을 ‘범죄’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시스템 자체를 바꾸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정해진 규칙에 반하는 행위를 ‘범죄’라고 말한다.위안부를 대상으로 한 강간이나 폭력이 공식적으로는 금지되고 있었으니(『강제 5』, 36쪽), ‘국가’가 그 범죄를 저질렀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시 말해 국가로서의 ‘발상’과 기획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는 있지만, 위안부의 고통이 물리적으로는 업주나 군인에 의한 것인 이상 군인들의 이용을 ‘국가범죄’로 규정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제국,217) 이와 같은 한계를 받아들이며 기존의 일본의 보상의 한계를 지적하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했으니 잘못했다고 '국회 결의'(제국,271)를 요구하는 책이 <제국의 위안부>입니다. 피해자들에 대해 제대로 '공감'하시고 그분들의 아픔을 끌어 안으시려면 앞으로의 운동에 <제국의 위안부>를 적극 반영하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 류한수진

    RISS나 DBPIA, 접속할 여력이 안 된다면 네이버에라도 제국의 위안부 한 번 쳐보세요. 쏟아져나옵니다. 아예 이 책만을 다루는 비판서도 두 권이나 있어요. 왜, 전부 다 오독이라고 하시게요? 읽어는 보셨어요? 이쯤 되면 거의 신앙에 가깝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님이 박유하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부정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님이 '면죄가 아니다'라며 인용하는 그 문단들조차 위안부가 국가범죄였다는 걸 부인하고 범죄가 아닌 (도의적) 죄만 있다고 주장하고 있잖아요. 그게 바로 일본 국가의 법적 책임을 '면죄'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만 배상이 아니라 원조(아시아평화기금)를 받고 화해를 해줘야 한다는 게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 아녜요. 체계적 국가범죄로서 위안부의 성격을 명확히 하고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 이런 주장을 수용해서 어쩌라는 겁니까?

    더구나 실제 당사자의 목소리를 부정하면서 '자발성'이니 '위안자로서의 긍지' 같은 표상을 피해자들의 경험에 억지로 덧씌우는 것이 어떻게 피해자들에게 공감하는 길이에요? 설마 당사자들이 뭘 잘 모르고 정대협에 휘둘리고 있다는 소리를 하시려고요? 그거 피해당사자에 대한 일종의 혐오인 것 아세요?

  • ㅋㅋ

    얼굴 울그락푸르락 사고정지해서 하던 소리 되풀이하는건 이놈을 특징인가 보네. 그래 네이버에 검색해서 나오는 긍정적인 서평이나 일본 리버얼 측의 평가는 그들이 다 바보여서냐? 하여간 언제가 되면 자기 눈이 비뚤어진 걸 깨달을건지 ..

  • 정확한 비판

    화가 난 비판자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이가 좋았던 것 같으니 가해자를 단죄하고 처벌하려는 것을 그만두고 화해하라고 말하’고 있다고 <제국의 위안부>를 읽습니다. 안이한 단순화와 왜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어요. 화가 나는 게 당연합니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병사와 위안부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집에서 건져 올리는 일을 하는 것은 대중적으로 중심화된 서사(‘일본군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성노예’가 되었다’)에 균열을 내고 일본의 책임에 물타기를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일본=가해자’, ‘조선=피해자’라는 단순한 틀만으로는 제국-식민지의 복잡한 구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을 뿐더러, 일본에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도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효과적인 서사 구조라고 한다면 20년이 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리가 없겠지요.

  • 정확한 비판

    민족적인 시각에 입각한 가해자/피해자의 이항대립의 틀에 대상자들을 밀어 넣는 일은 어디까지나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함입니다. ‘법적 책임’이라는 말이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만능 열쇠인 것처럼 이야기들을 하지만, 법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누가 빠져나가도록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해요. 법적으로 도망갈 구멍을 다 만들어 놓은 일본제국을 상대로 ‘법적 책임’을 운운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그 긴 시간이 말해주죠. 그리고 가해주체, 피해주체를 명확히 해야만 물을 수 있는 법적인 틀 때문에 순수한 가해자성/피해자성의 틀 안에 들어가지 않는 증언을 어쩔 수 없이 침묵시키는 일이 증언하신 할머니에게 진정한 ‘2차 피해’를 가하는 것은 아닌지 차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또한 아시아여성기금으로 대표되는 사죄와 보상(‘도의적’, ‘도덕적’, ‘윤리적인 책임’)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법적 책임’만을 고집하는 심리에 대해서도 자문하길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 일본 정부를 ‘법적’으로 굴복시키는 것과 일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할머니들을 자기들의 전쟁에 ‘수단’으로 써서 미안하다’고 사죄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줄 것인지를 말이지요.

  • 정확한 비판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는 말하고 있습니다. 위안부를 일본군 병사와 ‘사이가 좋’을 수 밖에 없도록 비극적인 상황을 만든 것은 일본이 짜놓은 ‘제국-식민지’라는 틀이며, 그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비판해야 일본을 움직일 수 있다고요. 이렇게 식민지 국민들에게 불행과 분열을 가져온 ‘식민지배’의 피해상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은 곧 국제적으로 사죄된 적이 없는 식민지주의의 ‘악행’을 명확히 하는 일입니다. 이런 식의 새로운 접근은 지금까지 ‘전쟁’ 배상 문제로만 다루어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의 위안부 피해 보상 논의에 숨통을 틔워 줌과 동시에,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지배하는 기간에 희생당했던 많은 사람들--식민지화 과정에서 진압된 동학군, 수감/살해된 독립운동가들, 관동대지진 당시 살해된 수많은 사람들, 그 밖에 ‘제국 일본’의 정책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거나 가혹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제국의 위안부>, 262쪽)에 대해서도 사죄를 요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서도 ‘다른 전前 ‘제국’ 국가들보다 일본이 한 발 앞서 과거의 식민지화에 대한 반성을 표명’(<제국의 위안부>, 263쪽)함으로써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테니 책임을 다하라고 얼르는 것이죠. 때로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법입니다.

  • 정확한 비판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1995년 일본 수상의 공식적인 사죄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의 연장선 상에서 발족된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기금 52억 중 46억 엔 이상, 약 90%를 일본 정부가 지원하고 성실하게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노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애매’한 ‘보상 태도’(이상, <제국의 위안부>, 266쪽)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지요. 그러한 ‘보상 태도’가 일본 국민들의 사죄 의식과 외교관의 지지, 성의 속에서 10년 동안 실시해온 아시아여성기금의 실패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 정확한 비판

    뿐만 아니라 <제국의 위안부>는 아베 수상의 책임 회피성 발언과 일본 정부의 무관심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데요. 책을 안 보실 것 같으니 인용을 해드리지요.

  • 정확한 비판

    그러나 아베 수상은 피해자의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아베 수상은 “20세기는 인권이 세계 각지에서 침해당한 세기였는데,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산케이 신문』, 2007. 4. 27.)라면서 잘못은 일본만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했다. 다른 나라의 ‘책임’까지 환기시키려는 말은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책임 회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제국의 위안부>, 268쪽)

  • 정확한 비판

    무엇보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기금 해산 이후에 일본 정부가 더 이상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데에도 원인이 없지 않다. 한국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여전히 데모가 이어졌던 이상 무시로만 일관할 것이 아니라 사태를 타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했다.(<제국의 위안부>, 270쪽)

  • 정확한 비판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섭얼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스피박의 질문을 다시 한번 차분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자신이 대변하고자 한 위안부 피해자, 혹은 목소리의 경계선 밖으로 새어 나가는 피해자 할머니들과 목소리는 진정 없는지를요. 혹시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새어 나가버려도 되는지 화를 내기 전에 생각해 보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뿐만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텍스트도 정확하게 읽는 것이 중요해요. 그것은 무엇에 분노해야 할지 정확히 알려주고 '비난'이 아닌 '비판'으로 자신을 이끌어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