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성이 하얀 천, 비누, 비닐시트를 가방에 쑤셔 넣는다. 이틀 동안 갈아입을 옷가지와 간단히 먹을 케이크도 준비한다. 아무런 말도 서로 하지 않는다. 화면은 흔들리고 숨소리는 거칠다. 어두운 회색거리, 뭔가가 뒤에서 쫓아올 것만 같은 분위기, 겁에 질린 두 여성. 카메라는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선으로 한 여성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그녀는 낙태시술을 받을 그녀의 친구를 도울 것이다.
1987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하의 루마니아. 낙태는 불법이고 이 사실이 발각되면 낙태를 시술한 사람은 물론, 시술을 동조한 사람, 시술을 받은 사람 모두 5년~10년의 감옥행이다. 하지만 원치 않은 임신을 했다면?
0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4개월, 3주, 그리고 2일' 은 3.8 세계 여성의날 1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볍지 않은 문제를 툭하고 내던져준다. 낙태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과 구조의 문제'라고 말이다.
낙태는 여성의 몸에 대한 정치적, 철학적 물음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1년에 약 150만 건의 임신중절 시술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하루에 4천여 건의 임신중절 시술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고, 비혼여성의 임신중절 시술까지 포함한다면 수치는 배로 뛰게 된다. 여기에 태어날 태아 6명중 1명이 임신중절로 사라지고 있다는 통계결과까지 보태지면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몸가짐 제대로 하지 못한 나이 어린 젊은 것들이 결혼해서 애를 낳을 생각은 안하고 애를 지워 '낙태천국'이라는 오명을 씌우고 있다고 힐난한다. 윤리규범과 도덕은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살인을 하고도 뻔뻔하다며 손가락질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임신중절 수치에 관심이 있을 뿐, 그로인해 겪어야 하는 여성들의 비극에는 관심이 없다. 불법낙태시술로 죽어가는 여성이 전 세계적으로 7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도, 임신중절 시술을 받을 돈이 없어 허름한 뒷골목 방에서 불법시술을 받다 죽어가는 미성년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현행법상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낙태는 빈번하게, 그리고 대개 합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낙태를 둘러싼 논쟁은 허용과 금지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저, 인구정책에 따라 금지나 허용, 부분적인 합법화의 논쟁으로만 국한되었다. 낙태의 문제는 여성의 몸과 자기결정권에 따른 정치적, 철학적 물음이기보다는 그저 사회구성을 위한 사회적, 정책적 물음일 뿐이었다. 장애여성의 출산의 권리를 제한하는 현재 모자보건법상의 낙태허용범위에 대한 문제제기를 묵과하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낙태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다시 떠오른 화두 바로잡기, 허용과 금지를 넘어
지난 13일 보건복지부가 현행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위한 공청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의료계와 주류여성계가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명시된 5가지 낙태 허용 사유(위생학적·유전학적, 강간·준강간에 의한 임신, 전염상 질환이 있는 경우, 혼인할 수 없는 혈족·인척간 임신, 모체의 건강을 심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 '사회 경제적 사유'를 포함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주류 언론과 보수주의자, 종료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생명의 존엄성을 이유로 들었다. 다시 수면위로 오른 낙태를 둘러싼 논쟁이 윤리규범과 도덕의 논쟁으로 변질되며 허용과 금지의 문제로 접근되고 있는 셈이다.
낙태에 대한 접근은 여성의 자율권, 행복추구권, 몸에 대한 통제권과 재생산권을 아우르는,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스스로의 권리를 획득하고 확대시키는 기초적인 바탕이다. 하지만 낙태에 대한 옹호, 지지의 담론 형성이 여성의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여성의 자기결정권, 선택권은 공허한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 그 껍데기에 신자유주의시대 국가의 폭력적인 인구정책 - 저출산대책, 일과 가정의양립 - 이 채워진다면 낙태권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는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낙태금지법과 관련한 모든 논의는 생명윤리의 문제도 아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재구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 우리가 낙태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
'4개월, 3주, 그리고 2일' 의 주인공인 오띨리아가 남자친구의 어머니 생신에 초대받아 남자친구네 집에 갔을 때, 오띨리아는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임신하면 어떻게 할거냐'고 묻는다. 남자친구의 대답은 '임신했어? 하지도 않은 일을 왜 이야기해?'이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 임신과 출산, 낙태의 문제는 철저하게 여성의 문제로 치부된다. 남성이 친구들과 떠들고 술 마시고, 책을 볼 때에도 여성은 날짜를 계산하며 혹시 임신하지는 않았나하는 불안에 떨어야 한다.
그래서 낙태의 문제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이다. 여성의 행위를 가로막는 것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구조적 불평등'이 그 깊이 자리잡고 있음에도 그것을 철저하게 은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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