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태국: 레드 셔츠 운동에 관한 단상

[방방곡곡99절절](13) 태국에 가다

우리 태국 가자!! 응?

어제 친구 한 명과 전화 통화를 했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꼭 해외여행을 가는 해외 휴가 마니아다. 고등학교 때부터 촘촘히 용돈을 모아 그 돈으로 여행을 가는 친구다. 안 가본 대륙이 없다. 친구는 이번에 쌓아 두었던 휴가를 5월까지는 꼭 쓰라는 회사 측의 권고를 받았단다. 그래? 그럼 내가 5월 연휴에 태국에 함께 가자고 했다. 친구의 대답은 절대 NO! 태국에 가 봤는데 도무지 자기 ‘취향’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러운 거리, 바가지만 씌우는 택시 기사, 맞지 않는 기후와 향신료가 가득한 음식......게다가 영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굳이 아시아 나라여야 한다면 좀 깨끗한 싱가폴이나 홍콩, 아니면 아예 이번에는 터키나 그리스 쪽으로 갈까보다 한다. “태국 알고 보면 괜찮은데.......” 라며 설득을 해본다. “맛있는 음식도 정말 많은데 네가 맛보지 못한 거야, 바가지 택시기사는 한국에도 있고, 태국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은데 넌 하필 태국에서 그런 사람들만 만난 거야.... 그리고 나랑 같이 가면 정말 재미있고 깨끗하고, 즐거운 곳으로만 안내할 거고 통역도 해줄 거야...” 이렇게 꼬드겨 보지만 결국엔 NO!!!다. 왠지 섭섭하다.

태국은 ‘나쁜 남자’ 같은 나라?

  내가 홈스테이 하던 남부 농통 마을의 가족들
태국에 대해 이런 반응을 보인 친구는 이 친구가 처음이 아니다. 작년 8월 태국에서 열린 세미나에 동행한, 태국을 처음 가본 한 친구는 기후와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일주일 내내 앓기도 했다. 그래도 나에게만은, 태국은, 가끔 미울 때도 있지만 결국 미워할 수 없는 그런 나라다. 사람들이 “왜 나는 태국을 좋아하는가?” 라고 물으면 나는 태국이 ‘나쁜 남자 같은 매력’을 가진 나라라고 말한다. 태국에는 ‘맛있는 음식’ 도 있고, ‘저렴한 물건’ 도 있고, ‘맛사지’도 있다. 하지만 사실 내가 맨 처음 태국을 좋아하게 된 건 아마 내가 태국을 ‘사람’을 통해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태국에 처음 간 건 2003년 1월. 이때의 경험은 지금까지 열 번 가까이 태국을 오가며 여행하게 된 첫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학생으로 태국 자원 캠프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로 한 나는 태국 남부 팟탈룽 지역으로 갔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은 매일이 지겹도록 똑같은 것이었지만, 몇 가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겨주었다. 짧은 만남 동안에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 한밤중 친구들과 함께 소형 트럭 뒷자리에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며 올려다 보았던 하늘에 참깨알 같이 박힌 별들,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잠을 이룰 수 없어, 인생을 돌아보며 결국 단 한숨도 이루지 못했던 어느 밤. 밭에서 파인애플을 무 뽑듯 뽑아 잘라 먹던 기억 등. 바로 1년 뒤, ‘테러와의 전쟁’으로 태국 남부 지역 사람들이 끔찍한 죽음을 겪을 때, 쓰나미로 수천 명이 사라져갔을 때, 나는 “빤” 언니와 “누이”, “쌈판”, “쓰챠이”, “싸카린” 의 얼굴을 떠올렸다.

태국과의 인연, 그리고 슬픔들

  태국 시내 중심가 가려진 곳의 빈민가 중심에 있는 보육원에 다니고 있던 아이들. 밝은 아이들의 모습이 예뻤다.
이후 이런 저런 계기를 만들어 태국을 꼭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씩은 여행하게 되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고 태국의 ‘빈민회의’라는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아예 태국의 시민운동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태국어도 배웠고, 더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태국에서는 많은 가슴 아픈 일들이 벌어졌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마약과의 전쟁으로 또 많은 사람이 죽었다. 2005년에는 쓰나미로 또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6년 쿠데타 발발 이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 꼭 1년 전 오늘 2010년 4월 10일, 정부가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또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잡아 가뒀다. 내 친한 친구들은 둘이 함께 근처를 지나다가 시위 진압 과정을 목격했고, 총알들을 피해 자동차 밑에 숨은 채로 총알이 다른 사람의 몸을 뚫는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시내에 사는 다른 한 친구는 자신의 창 너머로 또 다른 죽음을 목격했다고 했다. 이 광경은 통째로 친구들의 휴대폰에 찍혀 페이스북을 통해 나에게도 날아왔다. 이 모든 상황이 나에겐 남의 나라 일이 아니고, 이 모든 죽음이 숫자로써가 아닌 이름으로, 얼굴로 다가온다는 것은 편치 않은 일이었다. 아무튼, 이 참사가 발생한지 4개월 뒤인 지난 8월, 나는 다시 태국을 방문했다.

Everything will be okay!

  국왕의 안전을 기원하는 문구를 뒷 유리에 부착하고, 군인 인형을 붙이고 운행 중인 택시. 차량 뒷유리의 안쪽으로는 실물 크기의 두개골 해골 뼈모형이 꽃과 함께 놓여 있다.
8월에 방콕에서 만난 한 한국 친구는, 태국에서 10년째 거주하고 있지만, 4월 참사 이후 방콕에 알 수 없는 긴장이 느껴진다고 했다. 지상철 역마다 아직도 군인이 교대로 상주하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잡은 택시 안에는 그가 레드셔츠임을 보여주는 기사와 선전물 등이 택시 내벽 가득 붙어있었다. 택시를 잡을 때 함께 있었던 친구는 괜찮다며 내부가 이상해 보이는 택시를 타고 간 내가 걱정되어, 집에 잘 도착했냐고 전화까지 했었다. 후에 따로 길에서 마주친 택시는 반대로 ‘Long Live the King' 이라는 노란색 슬로건을 차 뒤에 걸고, 앞뒤에 군인 모양 인형을 붙여놓고 운행 중이었다. 이렇게 현 정부를 둘러싸고 양쪽으로 쩍 갈라진 국민들이 각자의 모양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모든 극단을 싫어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불타버린 쇼핑몰의 재건 공사 현장에 걸려 있던 현수막 문구처럼 “Everything will be okay!” 이기를 원하다 못해 믿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빈익빈익빈익빈, 부익부익부익부!

태국의 빈부 격차와 상-하 계급 간 문화 격차는 상상을 초월한다. 언젠가 대학에서 주최한 세미나 자리에서도 새파란 대학생 참가자들의 시중을 들며 내내 잔심부름을 하는 어르신들의 낮은 자세와 그 분들을 하인 다루듯 대하는 교수들의 태도에 놀란 적이 있다. 한번은 번화가의 바로 뒤에 있는 쪽방촌에 가보았는데, 문조차 없이 여러 칸의 나무 칸막이로 분리해 둔 좁고 긴 공간에 한 칸에 한 가족씩이 갇혀 살고 있었다. 그들을 관찰하듯 보고 있는 것 같은 미안함에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었다.

태국은 가난하게 태어나서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적 성공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과 다름없는 사회다. 월급을 받으면 저금통장에 차곡차곡 모으며 미래를 꿈꾼다는 가난하지만 꿋꿋한 모습의 젊은이를 찾기 어렵다. 어차피 그렇게 돈을 모으기가 어렵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한 달을 꼬박 하루에 8시간씩 일했을 때 벌 수 있는 돈은 20만원 내외, 월세를 내고 나면 입에 풀칠만 할 수 있는 정도다.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은 부자로 태어나는 것 뿐 이라고들 생각한다. 태국에는 ‘하이쏘’(Hi-So,상류층), ‘로우쏘(Low-So,하층)’ 라는 말이 존재하고, 매일 그들의 대화 속에서 일상적으로 쓰인다. ‘미드-쏘’ 같은, 중간을 나타내는 말은 없다. 외국 주재원들이 중산층 같은 삶을 누린다.

화해는 언제쯤?

  지난 5월 방화로 불탄 쇼핑몰 공사 현장의 외벽을 둘러싸고 있는 현수막, 그리고 그 주변을 걷고 있는 빨간셔츠 시위대의 모습 [출처: Facebook Tracy Vanity]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구성원의 대부분인 빨간셔츠 시위대가 방콕 최대의 쇼핑지구 라차프라쏭 교차로에서 시위할 때 태국의 하이쏘들은 그들을 증오의 표정과 말과 몸짓으로 대했다. 그들의 여가공간을 장악하고 쇼핑에 불편을 끼치는 빨간셔츠 시위대를 물소떼라 불렀다. 작년 4월의 비극은 시위대에 대한 ‘조처’를 반기고 묵인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이들이 취미와 여가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취미 따위 생각해 보지도 못했을 만한 몇몇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독일인 ‘페터’씨의 연날리기 모습 [출처: The Nation 2010년 8월 10일자 기사 German flies message of Thai reconciliation]
내가 체류 중이던 바로 그 8월, 태국 내 영문 일간지 은 독일인 ‘페터’ 씨의 독특한 세리머니를 소개했다. 태국을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그는 태국 민중들의 정치적 화해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은 대형 연을 일부러 독일에서 만들어 비행기에 싣고 태국까지 와서 날렸다.

10월, 다시 방콕을 방문한 나는 빨간셔츠의 시위 DVD 하나를 사다가 열어 보았다. DVD 속에서 그들의 리더 중 한 사람인 짜투펀이 연단에 올라가서 이렇게 말한다. “정의가 없다면, 우리는 평화를 추구해서도, 화해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나는 이어지는 수천의 우렁찬 함성과 박수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몫과 우리의 몫

빨간셔츠에 대한 평가는 이 글에서 할 수 없고, 그것이 이 글의 목적 또한 아니다. 사실, 빨간셔츠들을 한 덩어리로 묶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들을 몽땅 묶어 로우쏘라고 하기도 어려운 면이 있다. 태국에는 ‘One Soi One Red'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이것은 ’한 골목에 한 빨간셔츠 그룹‘ 이라는 뜻이다. 방콕에만 300개 이상의 그룹이 있다는 말도 있다. 이들 중에는 친탁신파도 있고, 반탁신파도 있다. 친국왕 그룹도 있고, 반국왕 그룹도 있다. 심지어 한 그룹 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국왕과 탁신에 대한 견해를 둘러싸고, 그리고 시위의 방식을 둘러싸고 이견과 마찰이 있다. 이렇게 많은 다른 그룹들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것은, 국민 다수의 민의에 따른 선거로 집권하지 않은 현 정부에 대한 반대, 그리고 학살된 동료들에 대한 분노와 비판, 수감된 정치범들에 대한 석방 요구 정도일 것이다.

오늘 8만 명 이상의 시위대가 민주기념탑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태국을 방문하는 우리들 대부분에게 태국은 그냥 여행지일 수 있다. 싸움이거나 화해이거나 모든 정치적 결정은 태국인 자신들이 할 일이다. 그러나 거기 사람 사는 모습, 사람들 목소리, 웃음과 절망, 기쁨과 눈물 등은 그래도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이었으면 좋겠다.


* 박주희 님은 태국과 태국 사람들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 <방방곡곡99절절>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www.glocalactivism.org]가 기획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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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성진

    태국의 오늘은 20,30년 전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더라도, 의회 권력을 뒤엎을 수 있는 힘이 태국 군부에게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젭니다. 그 군부의 힘은 태국 왕실에서 나온 다는게 문제의 본질이구요. 어차피 외국인들이 관심가지는 지역이야 방콕이나 파타야 정도이겠지만, 이산지역이나 타지역은 선거시 돈이 표가 됩니다. 총선을 치뤄봤자 의회의 권위는 쉽게 인정받을 수 없기에 총선이 문제의 해결점이 될 수도 없구요. 제가 느낀 태국문제의 해결책은, 현 푸미폰 국왕 서거후, 탁신이 군부장악과 함께 다시 정권을 잡아서, 왕실 권력 위에 서는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친왕정군부세력과 친탁신군부세력간의 내전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생각되구요. 하지만, 왕실에서 떠난 국민 다수의 마음이 탁신을 지지할 것이기에 탁신이 결국 권력을 잡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1년 동안 태국사람들과 정치얘기를 해보고 제가 내린 결론이고, 짧은 덧글로 정리하려니 글이 두서가 없습니다. 혹시 이글 읽으시고, 필요하시다면 gygaplex@hanmail.net 으로 연락주시면 조금 더 조리있게 설명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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