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은 ‘나쁜 남자’ 같은 나라?
▲ 내가 홈스테이 하던 남부 농통 마을의 가족들 |
태국에 처음 간 건 2003년 1월. 이때의 경험은 지금까지 열 번 가까이 태국을 오가며 여행하게 된 첫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학생으로 태국 자원 캠프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로 한 나는 태국 남부 팟탈룽 지역으로 갔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은 매일이 지겹도록 똑같은 것이었지만, 몇 가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겨주었다. 짧은 만남 동안에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 한밤중 친구들과 함께 소형 트럭 뒷자리에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며 올려다 보았던 하늘에 참깨알 같이 박힌 별들,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잠을 이룰 수 없어, 인생을 돌아보며 결국 단 한숨도 이루지 못했던 어느 밤. 밭에서 파인애플을 무 뽑듯 뽑아 잘라 먹던 기억 등. 바로 1년 뒤, ‘테러와의 전쟁’으로 태국 남부 지역 사람들이 끔찍한 죽음을 겪을 때, 쓰나미로 수천 명이 사라져갔을 때, 나는 “빤” 언니와 “누이”, “쌈판”, “쓰챠이”, “싸카린” 의 얼굴을 떠올렸다.
태국과의 인연, 그리고 슬픔들
▲ 태국 시내 중심가 가려진 곳의 빈민가 중심에 있는 보육원에 다니고 있던 아이들. 밝은 아이들의 모습이 예뻤다. |
Everything will be okay!
▲ 국왕의 안전을 기원하는 문구를 뒷 유리에 부착하고, 군인 인형을 붙이고 운행 중인 택시. 차량 뒷유리의 안쪽으로는 실물 크기의 두개골 해골 뼈모형이 꽃과 함께 놓여 있다. |
빈익빈익빈익빈, 부익부익부익부!
태국의 빈부 격차와 상-하 계급 간 문화 격차는 상상을 초월한다. 언젠가 대학에서 주최한 세미나 자리에서도 새파란 대학생 참가자들의 시중을 들며 내내 잔심부름을 하는 어르신들의 낮은 자세와 그 분들을 하인 다루듯 대하는 교수들의 태도에 놀란 적이 있다. 한번은 번화가의 바로 뒤에 있는 쪽방촌에 가보았는데, 문조차 없이 여러 칸의 나무 칸막이로 분리해 둔 좁고 긴 공간에 한 칸에 한 가족씩이 갇혀 살고 있었다. 그들을 관찰하듯 보고 있는 것 같은 미안함에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었다.
태국은 가난하게 태어나서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적 성공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과 다름없는 사회다. 월급을 받으면 저금통장에 차곡차곡 모으며 미래를 꿈꾼다는 가난하지만 꿋꿋한 모습의 젊은이를 찾기 어렵다. 어차피 그렇게 돈을 모으기가 어렵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한 달을 꼬박 하루에 8시간씩 일했을 때 벌 수 있는 돈은 20만원 내외, 월세를 내고 나면 입에 풀칠만 할 수 있는 정도다.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은 부자로 태어나는 것 뿐 이라고들 생각한다. 태국에는 ‘하이쏘’(Hi-So,상류층), ‘로우쏘(Low-So,하층)’ 라는 말이 존재하고, 매일 그들의 대화 속에서 일상적으로 쓰인다. ‘미드-쏘’ 같은, 중간을 나타내는 말은 없다. 외국 주재원들이 중산층 같은 삶을 누린다.
화해는 언제쯤?
▲ 지난 5월 방화로 불탄 쇼핑몰 공사 현장의 외벽을 둘러싸고 있는 현수막, 그리고 그 주변을 걷고 있는 빨간셔츠 시위대의 모습 [출처: Facebook Tracy Vanity] |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구성원의 대부분인 빨간셔츠 시위대가 방콕 최대의 쇼핑지구 라차프라쏭 교차로에서 시위할 때 태국의 하이쏘들은 그들을 증오의 표정과 말과 몸짓으로 대했다. 그들의 여가공간을 장악하고 쇼핑에 불편을 끼치는 빨간셔츠 시위대를 물소떼라 불렀다. 작년 4월의 비극은 시위대에 대한 ‘조처’를 반기고 묵인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이들이 취미와 여가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취미 따위 생각해 보지도 못했을 만한 몇몇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 독일인 ‘페터’씨의 연날리기 모습 [출처: The Nation 2010년 8월 10일자 기사 German flies message of Thai reconciliation] |
10월, 다시 방콕을 방문한 나는 빨간셔츠의 시위 DVD 하나를 사다가 열어 보았다. DVD 속에서 그들의 리더 중 한 사람인 짜투펀이 연단에 올라가서 이렇게 말한다. “정의가 없다면, 우리는 평화를 추구해서도, 화해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나는 이어지는 수천의 우렁찬 함성과 박수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몫과 우리의 몫
빨간셔츠에 대한 평가는 이 글에서 할 수 없고, 그것이 이 글의 목적 또한 아니다. 사실, 빨간셔츠들을 한 덩어리로 묶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들을 몽땅 묶어 로우쏘라고 하기도 어려운 면이 있다. 태국에는 ‘One Soi One Red'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이것은 ’한 골목에 한 빨간셔츠 그룹‘ 이라는 뜻이다. 방콕에만 300개 이상의 그룹이 있다는 말도 있다. 이들 중에는 친탁신파도 있고, 반탁신파도 있다. 친국왕 그룹도 있고, 반국왕 그룹도 있다. 심지어 한 그룹 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국왕과 탁신에 대한 견해를 둘러싸고, 그리고 시위의 방식을 둘러싸고 이견과 마찰이 있다. 이렇게 많은 다른 그룹들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것은, 국민 다수의 민의에 따른 선거로 집권하지 않은 현 정부에 대한 반대, 그리고 학살된 동료들에 대한 분노와 비판, 수감된 정치범들에 대한 석방 요구 정도일 것이다.
오늘 8만 명 이상의 시위대가 민주기념탑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태국을 방문하는 우리들 대부분에게 태국은 그냥 여행지일 수 있다. 싸움이거나 화해이거나 모든 정치적 결정은 태국인 자신들이 할 일이다. 그러나 거기 사람 사는 모습, 사람들 목소리, 웃음과 절망, 기쁨과 눈물 등은 그래도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이었으면 좋겠다.
* 박주희 님은 태국과 태국 사람들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 <방방곡곡99절절>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www.glocalactivism.org]가 기획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