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로는 첫 여행이라 같은 스페인어권이지만 남아메리카의 나라들과 비교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따뜻한 기후 때문인지 도미니카 사람들은 외지인에게 상당히 개방적이고 친절한 편이었고, 과연 일상생활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어디에나 춤과 음악이 넘쳐나는 것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방송제작을 위한 여행이라 혼자 움직이며 개인적인 관심사를 따라가 볼 여건은 못 되었지만, 아직 많은 한국인들이 찾지 않는 이 나라를 들여다볼 수 있는 몇 가지 점들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콜럼버스의 흔적을 찾아
▲ 에스파뇰라 섬 지도 |
에스파뇰라 섬은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기 위한 길목으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16세기 초반 잠깐의 영화를 누리다 그 지위를 잃었다. 그래서인지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멕시코나 페루처럼 식민지 시절 건물이나 유산이 많이 없는 편이었고, 소나 꼴로니알(zona colonial: 식민지 구역)이라 불리는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오랜 건축물들을 조금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도 산토도밍고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인이 최초로 세운 도시다 보니 그곳 건물들엔 아메리카 대륙 최초라는 수식어는 빠지지 않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첫발을 디딘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인 1992년, 도미니카 공화국 정부는 콜럼버스 기념 등대(Faró a Colón)라는 큰 기념관을 지어 건물 한 가운데에 콜럼버스의 유해가 든 상자를 안치했는데, 사실 스페인과 도미니카 공화국 사이에는 콜럼버스 유해의 진위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해왔다. 에스파뇰라 섬에 묻히고 싶다는 콜럼버스의 바람에 따라 아들 디에고는 1509년 총독으로 부임할 때 아버지의 유해를 산토 도밍고로 가져왔다.
▲ 콜럼버스 기념 등대 안의 콜럼버스 유골함 |
스페인은 스페인대로 세비야에 있는 유해가 콜럼버스의 것이라는 것을 DNA검사를 통해 확정했고, 도미니카 공화국은 거대한 기념관까지 지어 그의 유해를 두었으나 DNA검사는 거부하고 있다.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어디 있으나 큰 상관있을까 싶은데, 콜럼버스의 존재가 지니는 상징성이 크다보니 스페인이나 도미니카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또 쉽게 양보할 수는 없는 문제인 것 같다.
쌀이 주식이어서 편안했던 여행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쌀을 주식 수준으로 많이 먹기 때문에 여행이 수월한 편이었다. 그곳에서는 점심식사는 대부분 쌀밥에 다양한 요리나 곁들이 튀김을 같이 먹는다. 그리고 쌀밥에는 항상 아비추엘라(habichuela)라는 강낭콩 소스가 따라오고, 식용바나나인 쁠라따노(plátano, 영어로는 plantain)을 튀긴 또스똔(tostón) 역시 빠지지 않는다.
▲ 현지에서 먹은 식사. 쌀밥, 콩소스 아비추엘라, 바나나 튀김이 보인다 |
아이티와의 불편한 동거
에스파뇰라 섬 하나를 두 나라가 나누어 살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관계가 쉽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원래 섬 전체는 콜럼버스 이후 스페인의 식민지로 존재했다. 하지만 해적들이 출몰해 주민들과의 밀무역이 늘어나자 식민지 당국은 섬의 서쪽에서 사람들을 철수시켰고, 그때부터 부커니어(buccaneer)라고 불린 프랑스 해적들이 섬의 서쪽을 장악해 프랑스는 힘이 약해진 스페인에게 섬의 일부를 요구했다. 스페인은 1697년 리스윅 조약을 통해 섬의 서쪽 1/3을 가량을 프랑스에 양도했고, 1795년 바실레아(바젤) 조약을 통해서 에스파뇰라 섬 전체를 프랑스에 양도한 기간도 있었다. 1821년 도미니카는 공화국은 ‘아이티 에스파뇰라’(스페인계 아이티라는 뜻, ‘아이티’는 타이노 원주민들이 섬을 부르던 토착 이름이다)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지만 흑인 노예들의 혁명으로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아이티가 이듬해 이들을 점령했고, 아이티의 지배는 1844년까지 이어졌다.
두 나라 사이에 잊을 수 없는 비극이 있는데 이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였던 라파엘 트루히요(Rafael Trujillo)가 저지른 아이티인 학살사건이다. 1930년에서 61년까지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치한 독재자 트루히요는 반아이티주의자로서 37년 군인들을 동원해 국경지역의 아이티인들과 아이티인들을 부모로 둔 도미니카인들을 대량 학살, 2만에서 3만명의 아이티인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는 공식적으로 만 팔천 명의 아이티인들이 학살당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한 사람당 ‘29달러’씩, 총 52만 2천달러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프랑스어와 크레올어를 쓰는 아이티인들에게 ‘뻬레힐’(‘뻬레힐’은 파슬리라는 뜻) 이라는 스페인어 단어를 발음해보게 해 아이티인이라는 것을 가려내 죽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뻬레힐 학살’이라고 불린다.
▲ 두 나라의 국경 마을 히마니에서 열린 장터에서 본 아이티인들 |
최근 두 나라 사이의 아이러니는 2010년 1월 지진으로 인해 아이티의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물자 생산이 중단되자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해 국제 원조물자가 공급되고 생필품에 대한 대 아이티 수출이 늘어나면서 도미니카 공화국 경제에 큰 동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나 가까이 있는 미국과 리조트 투어
실제 이 나라에 가보니 관광책자나 가벼운 안내서에서 말해주지 않는 점이 있었는데, 그건 나라 전반에 미국식 문화가 엄청나게 침투해있다는 점이었다. 접한 책들이 대부분 영어권 저자들의 책이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의식도 없고 언급도 없었던 듯하다.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인데 헤어질 때 ‘바이바이’로 인사를 하고, 산토도밍고 국제공항에는 도미노 피자 체인점이 있어서 놀라기도 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유독 야구의 인기가 높고 많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배출하는 것도 미국과 미국문화와의 인접성 때문이다. 유럽에서 건너 온 축구가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는 남아메리카와 달리 미국과 가까운 카리브해 나라들인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 등에서 야구를 훨씬 많이 하는 것을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중미, 카리브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과 남미에 압도적인 유럽 문화의 영향이 확연히 비교되기 때문이다.
공항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관광객이 넘치고 이들 대부분은 도미니카 인들의 실제 삶을 알 필요는 전혀 없이 바로 멋진 해안가에 자리 잡은 리조트로 직행, 며칠간 휴가를 누리며 해변과 햇살을 즐긴다. 리조트는 숙박비에 모든 음식과 술값이 다 포함되어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니 ‘가상의 천국’인 리조트에서 원없이 먹고 마시며 수영과 선탠을 즐기다 다시 공항으로 직행해 자국으로 돌아가는 관광이 매우 널리 퍼져있다.
▲ 도미니카 공화국 페데르날레스의 오염되지 않은 해안 |
북미가 도미니카 공화국을 ‘가상의 천국’으로 소비하듯 도미니카인들 역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미국을 생활의 기반으로 삼고, 그 문화를 수용한다. 도미니카 상류층은 비행기로 서너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플로리다나 뉴욕을 또 하나의 집으로 삼아 살아가고, 그럴 여력이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불법이든 합법이든 미국에 직업을 구해 정착하는 것을 큰 성공이자 기회로 여긴다. (후안 루이스 게라의 메렝게 곡 “Visa para un sueño꿈의 비자”의 가사를 보면 미대사관 앞에서 끝없이 줄서서 하염없이 미국비자를 기다리거나 이것도 실패하면 바다를 통해 밀입국을 시도하다 상어 밥이 되는 자국인들의 처지를 슬프고 코믹하게 이야기한다.) 도미니카 공화국 어딜 가나, 특히 식당에서 1회용품 쓰는 습관이 매우 널리 퍼져있어서 미국과의 빈번한 접촉 때문에 이런 것마저도 미국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며
열악한 도로사정, 자국 산업이 취약해 사람들 소득 대비 물가가 비싼 것 등 고질적인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도미니카 공화국은 20세기 초중반의 뜨루히요 독재기를 지나 2000년대 이후 경제적, 정치적 안정을 구가하는 듯 했다. 천편일률적인 리조트 투어를 하는 북미인들의 존재는 유쾌하지는 않아도 관광업을 중요한 수입으로 하는 카리브 해 나라로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일테고, 매우 훌륭한 자연환경이 있으니 좀 더 다양한 관광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해보였다. 개방적이고 친절한 사람들, 매력적인 음악과 춤 이 있어 ‘지구상에 이렇게 다른 자연 환경 속에서 다른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하는 것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여행이었고, 그 점 하나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오랫동안 신선하게 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정승희 님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스페인어와 중남미 문학을 전공했고, 4년간 칠레에서 중남미 문학을 공부하고 생활하는 동안 중남미 사회, 역사, 원주민에 실질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중남미 문화와 소식을 전하는 블로그 blog.naver.com/yupanqui를 운영 중이다.
* <방방곡곡99절절>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www.glocalactivism.org]가 기획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