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산들을 통해 알게 된 나라 네팔, 그저 한국에 노동을 하러온 네팔 이주 노동자가 있다는 정도 그리고 유명한 산이 있다는 것 밖에는 몰랐던 그 나라를 그렇게 산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지극히 일부분이겠지만.....‘’
네팔은 2008년 왕정을 폐지하고 네팔 연방민주공화국이 되기 전 갸넨드라가 물러나기까지 오랫동안 왕정을 실시한 나라였다. 불교의 발상지인 룸비니가 중남부에 위치해 있으나 불교가 주된 종교가 아니라 힌두교가 국교이다.
▲ 네팔 아침 산의 풍경 |
근대이후 라나 독재 가문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제왕정에 대한 불만과 저항은 1990년에 이르러 국민운동(Jana Adolan)이라 불리는 대규모 저항이 일어났다. 특히 마오주의자(Maoosit)들은 인민전쟁을 선포하고 원주민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왕정특권폐지, 공화제확립, 사회주의적 경제 개혁 등을 내세우며 국토의 40%까지 장악하여 결국 네팔정부가 2001년 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지속된 왕정은 많은 부정과 부패를 낳았고, 정부와 마오주의자와의 갈등은 정치적 불안이 지속되는 원인이 되었다. 네팔에 가게 되었던 그 당시 2006년에 총선이 시작되기 전 그 즈음이라 번다(파업)이 빈번하였으며 통행금지와 정부군과 마오이스트간의 충돌로 외신을 통해 나오는 뉴스는 심상치 않았었다. 주변에선 근심어린 시선을 보내 그곳에 연락을 해보면 늘 상 있는 상황이라 괜찮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마치 우리나라가 남과 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가끔씩 벌어지는 충돌로 나라 밖에서 보면 전쟁이 있을 것 같은 위험상황이라 말하지만 우리네 일상은 너무도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모습과 같았다. 몇 번에 걸친 상황을 점검한 후에 네팔을 향해갔다.
▲ 히말라야산의 봉우리들 |
인류의 가장 오랜 교통수단인 걷기는 두 발의 근육을 수축 이완시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걷는다. 이 지독하고도 단순한 행위인 걷기를 한참 동안하게 되면 이것이 수행 또는 명상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전에도 산을 걷다보면 산 아래서 가졌던 온갖 상념들이 걸은 후 털어낸 경험들이 들다보니 10여일 이상 매일 반복하여 하루에 10시간 정도 걸으니 걷는 자체가 내겐 수행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걷는 것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오직 두 발에 의지해야 한다. 긴 시간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한계를 받아들일 때 자기 스스로가 보다 더 투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이 분명 히말라야가 트래커들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차분히 홀로 걸을 때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10여일 이상 나와 같이 걸어준 이는 네팔인 구릉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가깝게 만난 네팔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에 온 경험이 없지만 한국말을 조금 하였던 친구였다. 그곳에서 많이 배워도 취업의 기회가 없어 한국에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하여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인 트래커들을 안내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그와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서 소통을 하며 그렇게 산에서 지냈다. 구릉과 함께 한 것은 홀로 오랜 시간동안 알지 못하는 곳을 걸어야 하는 부담을 덜고 나름 생각해낸 착한여행을 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 트래킹 중에 쉬어갈 수 있는 롯지 [출처: 김은혜] |
네팔인들의 주식은 달밧이다. 달은 렌즈콩(Lentil)을 이용해 만든 스프로 단백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가난한 자들의 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밧은 밥이며 여기에 타르까리라고 하는 야채볶음(감자 등으로 만든)과 무청 비슷한 맛의 채소인 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보통의 네팔인들은 달밧을 주로 먹는다. 최소한의 거부감이 없이 트래킹 동안 달밧을 즐겨 먹었다면 트래킹의 반은 성공하였다고 한다. 현지식을 즐겨 먹기는 쉽지 않은 부분이다. 보통 롯지의 식당에서는 안내자인 가이드와 포터들은 달밧을 즐겨 먹고 트래커들은 서양식 음식들을 먹는다.
▲ 트래커를 위해 산 아래에서부터 물건과 짐을 망태기에 넣고 올라오는 사람들 [출처: 김은혜] |
그렇게 마을길과 산길, 계단식 밭길을 따라 먼지가 폴폴거리는 길을 오르락 내리락 걷다 오가며 마을사람들을 만난다. 그곳에서 만난 어린이들은 모두 때국물이 줄줄 흐르는 옷에 신발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지만 그들의 눈망울만은 너무나 맑아 보는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이 너무나 가진 것이 많은 모습에 슬그머니 눈을 내리고 발끝만 쳐다보았다. 그들은 만나는 모든 이에게 “나마스떼”라고 인사한다. 열 번 백번을 만나도 “나마스떼”한다. 나마스떼는 그대안의 신에게 경배를 이란 뜻을 가진 이 인사는 들어도 들어도 정겹게 들려오는 인사이다. 그렇게 마을사람뿐 아니라 오고가는 트래커들도 만나면 서로 나마스떼하며 인사한다. 산에 오르기 전 산에서 마오이스트를 만나면 통행세를 내야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무장을 한 그들을 만날까 두려웠었는데 그때가 총선을 대비하는 기간 중이라 대부분의 마오이스트들이 산을 내려간 상태라 그들을 만나지 못했고 통행세도 내지 않았다. 덕분에 아주 맘 놓고 호젓하게 걸었었다.
▲ ‘나마쓰떼’라고 인사하며 늘 반겨주던 아이들 |
약 보름간 오로지 걷기를 통한 트래킹은 극기 훈련도 아니고 어디를 얼마 만에 다녀왔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느림의 미학의 배우고 산으로 올라갈수록 모든 것이 불편하고 부족함 속에서 그것을 감수하는 것을 배운다. 그 불편함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고 내려온 후 다시 산을 바라보면 그곳이 다시 그리워진다. 베이스캠프 롯지 식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쳐주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던 시간들은 아주 소중한 추억이다. 설산에서 맞이한 아침의 그 찬란한 히말라야의 광경은 아직도 나의 가슴 가득히 담겨져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을 것 같다.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내가 그곳에 있는지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몽롱함 속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음성 “나마스떼”
* 김영미 님은 수원이주사목부 엠마우스 노동상담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그동안 <방방곡곡99절절>을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15회로 연재를 마치고 차후 더 좋은 기획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www.glocalactivis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