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25세에 덕적 국수봉 신령인 최영 장군을 몸주신으로 모신 뒤 한결같이 무속인의 길을 가고 있는 김매물 만신을 그의 오랜 터전인 인천 신기촌에서 지난달 31일 만났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평택 대추리와 용산에서 굿을 했다는 그는 용산에 재차 찾지 못한 것을 못내 미안해했다.
“춤도 노래도 배워본 적 없어요”
이원재(원재) 황해도굿으로 상당히 유명하시잖아요. 굿을 잘하고 영험한 큰 무당으로 덕적에서 이름을 날리셨다고 하던데.
김매물 황해도굿은 특별히 굿을 할 때 그 집에 가서 많이 영검을 주어서 죽을 사람을 살린다든지, 아픈 사람들을 살려내요. 내가 그렇게 많이 살려서 덕적에서 나보고 대통령 상 타도 되겠다는 소리도 들었어요.(웃음)
▲ 김매물 만신 |
원재 춤도 유명하시던데요. 굿하는 분들 말고도 전통예술 하는 분들이 선생님 춤사위, 발디딤이 대단하시다고 하더라고요.
김매물 춤은 그 전에 잘 췄어요. 갓 신 내려서 한 20년 넘도록 작두에서 긴 춤을 추면 옛날 노인 할아버지들이 저를 보고 ‘저 아이는 배운 것도 없고 어디 굿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보아서 저 춤을 저렇게 잘 추냐’ 그랬어요. 젊은 사람들은 ‘앞을 보면 인물이 없어서 안 업어가겠는데 뒤를 보면 업어가겠다’고 했고요.(웃음)
원재 굿할 때 추는 춤은 다른 무용이나 예술하고 또 다르잖아요. 연습을 따로 하시나요?
김매물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요, 그냥.
원재 노래나 춤을 배운 적도 없어요?
김매물 굿춤은 장구가 ‘쿵딱쿵딱’ 들어가잖아요. 그럼 본인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으쓱 해요. 그럴 땐 잘돼요. 노래도 남들은 무당 내리면 흥얼거리면서 외우기라도 하는데 난 꿈에도 외우고 흥얼거리는 걸 못 해봤어요. 하면 하고 못하면 못하는 거지 인력으로 하려고 하면 신경이 쓰여서 안 되더라고요.
▲ 이원재 문화연대 활동가 |
원재 스물다섯 살, 그러니까 1969년에 내림굿을 받으셨다고 하던데, 무녀라는 특별한 직업을 갖고 계신 거잖아요.
김매물 무녀를 평생 했으니 나는 우스갯소리로 이걸 직업이라고도 해요. 하지만 사실 직업이라 할 수 없죠.
원재 무당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김매물 힘든 건, 제가 어디서 굿을 했는데 그 집에 무슨 사고가 났을 때, 그러면 내가 죽은 것보다 더 속상해요. 그게 제일 힘들죠. 아픈 사람 굿하러 갈 적에도 안 나으면 어떡하나 걱정해요. 병원에서 암이라고 해도 살 사람은, 정말 엉망진창인데도 이상하게 나아요. 무신들 말로 정말 하늘이 놀란다고, 그런 때는 기분이 좋아요. 병원에 다 다녀도 못 산, 죽을 사람이 살았으니까.
“굿하려고 용산을 들여다보니 껌껌하더라고요”
원재 2005년도에 대추리 평택 미군기지에 가셔서 굿을 하셨잖아요. 2009년에 용산참사 현장에서도 하셨고. 그런 곳에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김매물 평택 갈 적에는 우리 풍물놀이 하는 사람이 ‘선생님 대추리에 미군부대가 왔는데, 안타까우니까 마음으로 응원이라도 할 겸 가서 놀이 좀 해주자’ 그래서 갔어요. 가니까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 그런지 미군부대에서 이미 정착을 했더라고요. 암만 해도 그 사람들이 이기죠. 그래도 ‘좀 힘들어도 될 수 있는 대로 믿어보자’ 하고 가서 했어요. 용산은 혼신들이 불쌍하잖아요. 아버진 죽고 아들은 형무소 들어가 있고. 처음엔 송장 썩을까봐 걱정했는데 이번엔 얼까봐 걱정한다고... 가서 영혼이라도 달래주고 가족들 마음이라도 위로해주자고 해서 갔죠.
▲ 2009년 3월 두 달째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있는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남일당 앞에서 열린 원혼 위령제 모습.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원재 대추리나 용산은 언론에도 나오고 정치적인 문제였는데 부담스럽지는 않으셨어요?
김매물 그렇게 부담 갖지는 않았어요. 우리는 단지 신을 갖고 영혼이랑 가족들 마음을 달래주러 간 거니까 큰 문제라고 생각은 안 했어요. 전에 서대문 형무소에 갈 때도 사람들이 귀신 많은 데 갔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랬었어요. 근데 아무려면 신령님이 나 죽을 데 데려가겠어요?(웃음)
원재 이전에도 사회 문제 관련해서 굿을 하신 적이 있으셨나요?
김매물 그 전에 다른 데도 다녔는데 잊어먹은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미선이 효순이 때도 했네요.
원재 큰 시위 있을 땐 다 참여하셨네요.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분들 굿할 때랑 사회 문제로 참여 하실 때 사이의 차이가 있나요?
김매물 개인적인 굿은 허물없이 하는데, 큰 데 갔다 오면 책임이 더 많고 신경이 더 쓰여요.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사람 일은 모르니까. 신명한테도 그렇고 책임자들 편안하고 원망 없이 잘 되게 해달라고 집에 와서 속으로 그렇게 빌어요. 그런데 대해서는 책임이 따로 있죠.
원재 그럼 용산 갔다 온 날은 마음이 어떠셨어요?
김매물 불안했죠. 굿을 잘못해서 불안한 게 아니라 죽은 혼신들이 아쉬워서. 불난 데를 가서 보니까 높은 데서 죽었는데 거길 못 올라가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1층에만 들어갔어요. 가면 사람도 쉬쉬하고 무서운 데가 있고 아무렇지 않은 데도 있거든요. 용산은 굿하려고 들여다보니까 껌껌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근데 굿을 하고 나니까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래도 불에 타서 죽은 생각을 하고 냉동고에 들어가 있다니까 며칠 동안 한참을 눈에 선했어요.
▲ 2009년 3월 용산 남일당 앞에서 열린 원혼 위령제.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원재 그래도 선생님이 굿해주고 가셔서 유가족 분들 마음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
김매물 재차 못 해준 게 아쉬워요. 송장 내갈 적에 굿 한 번 더 해달라고 하는 걸 내가 못 갔거든요. 우리 무속은 신체를 자꾸 보면 안돼요.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셔도 못 봐요.
원재 굿 하시면서 체력적으로 힘든 건 없으세요?
김매물 작년 여름부터 앉았다 일어날 때 힘들어요. 그래도 아직 굿하면서 힘들단 생각 안 해봤어요.
“굿을 인정해주는 건 좋지만, 예술은 아니예요”
원재 요즘은 굿이 예술로도 인정받고 있잖아요.
김매물 그게 마땅치 않아요. 신은 신이고 예술은 예술이지, 굿이 왜 예술이에요. 굿이랑 예술은 다른 건데 이제 다 예술로 치잖아요.
원재 그런데 2004년도에 국립국악원에서 공연하셨잖아요. 기존에는 국립국악원에서 정악이나 국립국악만 했었는데, 당시 황해도굿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해준 굉장히 큰 사건이었죠. 그때 어떠셨어요?
김매물 너무 좋았죠. 전에 굿하면서 작두 타는데도 작두를 빼가는 걸 봤거든요. 그런데 연구자나 교수들이 우리 뿌리를 캐서 무속을 이만큼 올려준 것이 너무 좋고, 그런데서 무당이 굿을 하니 너무 좋았어요.
원재 공연 때 굿하는 건 평소와 다른가요?
김매물 처음에는 무대에 선다는 게 어색하고, 이게 내가 해나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내가 가서 어떻게 해야 이 구경 온 일반 사람들이 기뻐하고 반가워하고 좋아할까, 이런 것도 신경 쓰이고. 공연 시간을 정해주니까 굿을 단축해야 해서 그것도 아쉬워요. 근데 한해 두해 넘어가니까 ‘이것도 무당이 하는 일이구나’ ‘다 하게끔 돼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좀 나아졌어요. 하다 보니까 시간도 단축이 되더라고요.
원재 그렇게 한 ‘세계 최초 공연’이 참 많으셔요. 독일, 일본, 러시아에서도 하시고, 락밴드랑 굿 음악 페스티발도 하시고, 경기문화재단에서도 크게 하셨어요. 근데 왜 굿이 예술로 보여지는 건 싫으세요?
김매물 예술은 무용하고 춤추는 사람일 뿐이죠. 근데 우리는 신을 갖고 역할해요. 무당은 영검해야 하죠. 그래서 우리 무속은 이왕이면 신의 신령님 쪽으로 가는 게 맘이 좋아요. 무대에서 공연하는 걸 그르다고는 안 보지만 신으로 만족을 느끼는 게 더 좋은 거죠.
원재 그래도 굿을 미신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문화적으로 인정받아서 장점도 있지 않나요?
김매물 사실은 좋아요. 예술로 인정받아서 무속인들이 이렇게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것도 맞고요. 전 같으면 우리가 무대 올라가서 예술 소리도 못 듣고, 할 수도 없는 문젠데 진짜 젊은이들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선생님들, 박사들이 뿌리 캐내는 작업이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술로 공연도 할 수 있는 거죠.
원재 앞으로 바라시는 게 있다면 뭔가요?
김매물 세월이 그래서 그런지 너무 다난해요. 백성도 많고 무속도 많고 종교도 많고 절도 많고. 그래도 서로 헐뜯는 갈등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편안히 싸우지 않고 살고, 무엇보다 전쟁만 없으면 좋겠어요. 우린 다 살았는데 아이들이 걱정이죠. 그 걱정이 제일 많아요. 잘살고 못사는 건 자기 복이지만 제발 전쟁 없게 해달라고, 장군님께 혼자 많이 기도해요.
인터뷰_이원재 문화운동가. 문화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상상력과 지구력의 힘을 믿는다. “새로운 시대를 겨누어 변함없이 날카로운 질문과 실천을 던지는 노장을 꿈꾼다.
정리_김도연 민중언론 참세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