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 해결을 위해 시작된 희망버스는 쌍용자동차로 달려가고 있다. 오늘로 쌍용자동차 천일이다. ‘희망 뚜벅이’는 재능교육 학습지교사 천오백일 농성장에서 지난 1월 30일 출발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 발걸음’은 12박 13일 동안 천릿길을 걸어 쌍용자동차에 도착하였다.
희망 발걸음 첫날, 대학로 인근 이화사거리에서 ‘희망’의 깃발을 접고, ‘희망’의 몸자보를 떼지 않으면 인도로 걷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며 경찰은 ‘희망 뚜벅이’들을 추운날 길바닥에 옴짝달싹도 못하게 감금하였다. 다섯 시간 동안 바들바들 떨면서 ‘희망’을 벗을 수 없다며 버틸 때, 내 메일에는 ‘희망텐트’가 보낸 스무번째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죽음의 소식이 날아왔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천오백일을 하루 앞둔 날, 또다시 스물한번째 죽음의 소식이 ‘희망텐트’에서 날아왔다.
더 이상의 죽음은 안 된다고, 50년만의 맹추위에 시멘트 바닥에 침낭을 둘러쓰고 잠을 자고, 젓가락질도 힘들 정도로 꽁꽁 언 손으로 찬밥덩이를 목구멍에 쑤셔 넣으면서 절망의 땅을 뚜벅뚜벅 짓누르며 걸었건만 죽음의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쌍용자동차의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희망퇴직자’다. 희망의 이름으로 일터를 떠난 이들이다. 하지만 일터를 나서는 순간 자신의 삶에서 희망이 퇴직한 거다. 먹고 살아보겠다고 일자리를 찾아 떠돌았지만 한순간에 수천 명이 자그마한 도시 평택에서 실직자가 쏟아져 나오니 들어갈 일터를 찾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날일을 하고, 대리운전을 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보지만 먹고 사는 일은 녹록치가 않다. 인력시장에 나갔으나 ‘공친 날’은 작업복을 담은 가방을 축처진 어깨에 메고 한 손에는 소주병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부부싸움은 잦아지고,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그 의지를 이 사회는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이들은 전쟁과 같은 지독한 정신적 상처를 받았다. 어제까지 작업장에서 쉬는 시간이면 함께 족구를 하던 이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렸다. ‘죽은 자’에 이름이 오른 정리해고자들은 살겠다고 죽도록 싸워야 했고, ‘산 자’가 된 이는 죽지 않기 위해 죽도록 일해야 했다.
산 자와 죽은 자로 노동자를 갈라치기 한 이들은 죽은 자를 공장에서 내쫓기 위해 산 자의 손에 쇠파이프와 새총을 쥐어주고 어제의 동료였던 죽은 자를 겨누도록 했다. 그것도 잔인하게. 조립 1공장의 죽은 자가 저항하는 곳에는 조립 1공장의 산 자를 보냈고, 프레스 공장의 죽은 자가 싸우는 곳에는 프레스 공장의 산 자를 보내는 식이었다. 마스크를 했지만 어찌 모르겠는가. 십 수 년을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장에서 함께 웃고 울었던 이들인데.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77일간의 공장 파업이 있는 동안 공장 안에 있던 조합원의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료의 가족이 숨진 오늘만은 돌을 던지지 말고, 너트를 새총에 달아 쏘지 말고, 서로 욕하지 말고, 오늘 하루만은 조용히 떠난 이를 추모하자고 외쳤다. 하지만 그날도 오 필승 코리아, 노래를 방송차에서 틀고 새총을 쏘아댔다.
평택시가 나서고, 국회의원들이 나서 ‘노사대타협’ 합의서를 쓰고 정리해고자의 77일간의 농성은 끝났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합의서에 노동자를 대표해서 사인을 했던 한상균은 아직 감옥에 있다. 실제 경영을 파국으로 이끌었던 경영진이나 이 파국을 만들었던 상하이차 매각의 추진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오로지 노동자만 희생을 감당했다.
이제 쌍용자동차의 생산량은 정상화가 됐다. 하지만 복직시키겠다고 합의했던 ‘무급 휴직자’들에게는 약속날짜가 지났건만 어떠한 대책이나 하다못해 입에 발린 변명조차도 없이 길바닥에 내팽개쳐 두고 있다.
희망퇴직자나 무급휴직자만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다. 쌍용자동차 스물한 명의 희생자 명단에는 ‘산 자’들도, 공장에서 일한 이들도 목숨을 잃었다. ‘노동유연화’ ‘구조조정’ ‘정리해고’란 단순히 경제이론서의 활자가 아니다. 바로 노동자의 삶, 생명을 품은 말들이다. 이 단어들 앞에는 노동자의 생명이 달려 있다. 구조조정 대상자든 아니든 이 과정을 거치는 자체가 노동자에게는 상처다. 매일 아침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며 출근 선전전을 하는 동료들을 옆 눈으로 흘낏 거리며 출근카드를 찍으며 공장에 들어서는 노동자의 가슴에는 날마다 생채기 하나씩이 그어지는 것이다.
희망퇴직자나 정리해고자의 삶에 대책을 세우겠다고 떠벌리던 정치인과 공무원은 스물한 명의 생명이 줄을 이어 떠나건만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수천 명의 희망퇴직자, 무급휴직자, 정리해고자가 지금 어느 곳에 어찌 사는 지 주소조차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홀로 골방에 앉아 술병을 비우며 스스로 자신의 간을 헤치며 죽음의 길로 가는 이가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어떤 이는 천정에 자신의 목을 맬 줄을 매달아놓고 갈등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농약병을 들고 떨리는 손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있을 텐데 말이다. 지금이라도 이들의 사는 곳이라도 파악해야 하고, 전화 한 통이라도 걸어야 한다. 그래야 이 죽음의 행렬을 막을 수 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그의 가족까지 합하면 이십만 명에 이른다. 이십만 명의 생명이 걸린 문제다.
정혜신 박사가 나서서 심리치유센터 ‘와락’을 만들었다. 죽음을 생각했던 이들을 보듬고, 그들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있다. 해고자나 퇴직자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단다. ‘자살놀이’를 하며 노는 아이들도 있단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의 투쟁은 복직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저항이다. 더 이상 동료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어 저항하는 것이다. 저항으로 자신의 상처와 동료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다. 때론 경찰의 방패에 머리를 쥐어박기라도 해야 그 분을 삭이고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다가올 총선이 끝나면, 대선으로 정권이 교체되면 해결될 거라고 이들의 저항을 ‘괜한 희생’이라며 말리거나 충고한다. 하지만 스무 명이 넘는 생명을 천일 사이에 가슴에 장례를 지내야 했던 이에게는 이 충고는 ‘욕’과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죽음의 경계 앞에서 휘청거리는데 어찌 ‘선거 후’만을 기다리고 있겠는가.
쌍용자동차의 한 노동자는 트위터에 스물한번째 죽음을 접하며 이제는 숫자 세기를 멈추고 싶다고 했다. 숫자 세기만이 아니라 죽음을 멈춰야 한다. 이 죽음을 멈추는 길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의 투쟁만으로, 아니면 심리치유센터 ‘와락’만으로, ‘희망버스’ 시즌2인 희망발걸음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정부가 나서고, 여야를 떠나 정치인이 나서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가 나서고, 이 사회를 이루는 모든 시민이 나서야 할 때다. 이에 앞서 쌍용자동차 경영진들이 이제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무급휴직자와 정리해고자에 대한 복직과 더불어 희망퇴직자의 삶도 껴안아야 한다.
‘희망 뚜벅이’ 연재를 마치며 희망과 기쁨으로 넘치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우울하고 어둡고 절망스럽고 참담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희망이란 절망을 인식할 때 가능한 말이다. 이 절망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죽음이다. 절망을 알 때 희망이다.
이천십이년, 계속 고치기를 거듭하는 시로 희망 뚜벅이 십이박 십삼일의 기록을 마감한다.
그래도 희망이다
희망을 보려거든
저 겨울산 헐벗은 나무를 보라
홀 몸뚱이로 서서
이 겨울을 날 수 있는 까닭은
함께 헐벗고 선 나무들끼리
자신의 팔 뻗어 가지와 가지를 맞대고
서로를 찾는 발걸음으로 뿌리와 뿌리를 얽히고설켜
숲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배불러서 희망이 아니다
춥고 배고픔을 함께 견뎌 낼 벗이 있어
겨울나무는 제 살갗 터뜨려 연둣빛 새순을 움틔우지 않는가
아름다운 세상도 마찬가지다
아픈 이들이 없는 세상이 아름다운 게 아니다
고통 받은 이들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한 발짝 한 발짝 함께 걷는 이들이 넘쳐 날 때
아름답다
참 아름답다 말하는 것이다
패배나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무수한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게 희망이다
숱한 절망을 깨는 몸짓이 바로 희망이다
희망은 절망의 가슴과 가슴이 한데 포개져
또박또박 걷는 발자국 소리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천구 년은 야만이었다 서울 한복판 용산에서 공권력은 건물이 아닌 삶을 철거하였다 그해 여름도 야만이었다 평택 쌍용자동차에서 자본은 공장이 아닌 목숨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리고 해가 오고 해가 가기를 세 해를 거듭했다 용산은 또 다른 용산을 잉태하였고 쌍용은 또 다른 쌍용을 출산하였고 야만은 더 큰 야만으로 삶터와 일터를 뭉개고 있다 아파하라 분노하라 저항하라 점령하라 구호 요란하지만 절망의 신음이 끊이질 않는다 스무번째 스물한번째 죽음이 이어진다 천일의 시간이 흘렀건만 공장 굴뚝 연기 뿜어나건만 절망의 행렬은 더욱 길어지고 지금도 홀로 골방에서 술병을 기울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휘청이는 이 넘쳐난다 저항 없는 권력교체 광풍에 절망의 신음은 길바닥 낙엽과 함께 뒹군다 그래도 희망이다 그래도 희망이다 말할 수밖에 없는 이 겨울이 야속하고 다가올 봄이 서럽게 떨린다
- 오도엽
[필자주] ‘희망 뚜벅이’는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로 노동자들이 고통을 겪는 재능교육서 쌍용차까지 대표 사업장 16곳을 찾아갔습니다. 1월 30일부터 13일 동안 걸어 다니며 희망을 기록했습니다. 지금껏 희망 뚜벅이와 함께 해준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