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에서 발행하는 교과서를 뜻하며, 국가의 독점적 지위를 활용한다. 특히 국정교과서가 존재하는 경우 반드시 국정교과서를 사용해야 한다”라는 게 백과사전의 설명이다. 이것은 선택과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논란은 2003년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발행 검정화와 2010년 중학교 역사 교과서 및 한국사 교과의 검인정 교과서 체제 개편 때부터 대두되었다. 특히 이 문제는 2013년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 사태를 기점으로 다시 불거져 나왔는데, 2013년 교학사 교과서 채택과 관련해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면서 문제가 본격화 되었다.
2013년 한국사 검정교과서 사태 당시, 전국 고등학교 동문회와 지역단체 등은 뉴라이트 진영에서 제작한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채택 철회 운동을 전개했다. 특이한 것은 이것이 소위 말하는 좌파의 반발이라기보다는 보수나 진보가 아닌 동문회와 학부모회 등이 중심이 되어 바람직한 교과서에 대한 논쟁이라는 성격이 크다. 이후 여당인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교학사 교과서 살리기 운동이 전개되었고, 2014년 1월 8일 교육부는 교학사 교과서 채택 철회 과정에서 ‘외압이 있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같은 날 새누리당에서는 역사 과목을 종전의 단일 국정교과서로 되돌리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앞서 2008년 9월 뉴라이트는 금성출판사에서 출간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 되었다며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이 과정에서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과 집권여당인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의 국정화 움직임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4대 개혁의 화두를 던지며 혼란을 부추기는 와중에 멈칫거리던 교육부는 청와대의 압력으로 서둘러 지난 11월 3일 확정고시를 했고, 지금은 집필진 구성을 완성해가고 있다.
그러나 국정교과서는 이미 시작되었다
수능 연계 교재인 EBS교재는 교육부의 압력으로 그 내용이 바뀌었다. 국정교과서가 아니어서 교육부가 관여할 대상도 아닌데 초판본이 수정되었다. 지난해 9월 2일자 언론에 보도된 수정 부분은 첫째 ‘박정희 정부가 반공을 국시로 정하고 국회를 해산했다’였는데, 교육부의 주장은 국회 해산은 자주 있는 일인데 이를 알 필요가 있겠냐고 수정을 요구해 다른 내용으로 바뀌었고, 둘째, ‘박정희 정권이 국가 안보와 경제 성장을 구실로 유신헌법을 공포했다’고 적혀있는데 교육부가 삭제를 요청해 출판본에는 없어졌고, 셋째 간첩으로 몰려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의 문제도 교육부가 더 중요한 사람으로 바꾸라고 요청해 이승만 관련 문제로 변경되었으며, 넷째 노동운동가 전태일 동상의 사진도 교육부가 삭제를 요청해 경부고속도로 사진으로 대체됐다. 검인정교과서도 이런 일이 생기는데 국정교과서의 결과는 국제사회에서도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국제적으로 자유발행제가 대세인 상황에서 국정교과서 제도는 독재 정권하에서나 채택하며, 암울했던 70년대의 장발 단속과 짧은 치마 단속, 금지곡 지침 등을 연상케 한다.
검인정과 국정화가 마치 이념 대결인양 진보와 보수의 전초전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정부와 집권여당은 민중을 지역별로 가르고 세대를 분열시키는 반역의 정책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다. 여기에 사실이나 진실과 정의는 실종됐으며 오로지 정치적 야욕만 꿈틀거리고 있다. 그간 사활을 걸고 결판을 낼 것 같던 새정치민주연합은 민생을 앞세워야 한다는 새누리당의 압박으로 국회 정상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정략적 판단인지는 모르지만 진실과 허구의 쟁점에서 역사를 수십 년 전으로 되돌리려는 역사적 음모를 국회정상화 카드에 어쩌지 못하는 것은 현 시기 야당의 태도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야당은 국정화 반대를 끊임없이 외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정치권에서 국정화 교과서는 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
이 와중에 문화일보는 대북 소식통을 인용해 “북한 통일전선부와 정찰총국 등 대남공작기관은 최근 조총련 등 해외 친북 단체와 국내 친북 조직 및 개인에게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에 대한 반대투쟁과 선동전을 전개하도록 지시하는 지령문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지침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북의 지침을 받을 세력이 남쪽에 있는지도 의문이고 집권세력에게 불리한 쟁점만 생기면 북한을 끌어들이는 유치함에 구역질이 날 뿐이다. 정치적으로 분단을 구실로 진보와 역사학자는 빨갱이, 보수는 애국으로 색깔을 덧씌울 수 있는 능력과 기술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뿐이다. 색깔론을 앞세우는 허접한 정치는 진실과 정의는 실종되고 오로지 정치적 야욕만이 꿈틀거릴 뿐이다.
진보세력의 국정교과서 반대 입장은 검인정제 찬성으로 비친다
국정화는 보수, 검인정제는 진보의 주장처럼 통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검인정제는 진보의 담론이 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검인정제는 민간에서 출판을 하되 정부가 심의권을 가지고 교과서 내용에 개입할 수 있는 제도다. EBS교재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검인정하에서 전태일이라는 이름조차도 지워버리지 않았는가. 전태일 동상은 박근혜 씨가 대통령 후보 시절 꽃묶음을 들고 추모를 했던 pq곳이다. 당시 박근혜의 행보는 전태일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표를 얻기 위한 꼼수였지만, 전태일은 노동자의 정신이며 상징이기 때문에 전태일을 방문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한 명의 노동자라도 교과서에 기록되는 꼴은 못 보겠다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게 대통령 박근혜의 본질이라는데 어찌하랴.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배 권력은 국정화가 되지 않았어도 계속해서 교과서 내용을 바꿔 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국정화 반대만 외치는 것은 검인정을 사수하겠다는 주장으로 비춰지기에 좋아 보이지 않는다.
역사의 주인은 노동자계급이다. 그 근거는 사회발전의 원동력, 생산의 주역, 역사의 주체 등 다양한 이유들을 들이댈 수 있다. 특히 여야를 막론해 여론을 중시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지배계급의 시각으로 본다고 해도 노동자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 노동자는 이 사회와 역사의 주인이다. 1500만 노동자가 세상을 멈출 수도, 투표를 통해 권력을 바꿔낼 수도, 체제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다. 그런데 역사와 사회, 생산의 주역인 노동자의 이름이나 흔적조차도 역사교과서에서 빼버리는데, 검인정이라 해서 용납될 수 있는가.
세상을 변화 발전시키기 위해 일하며 치열하게 투쟁했던 투쟁 정신과 산업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아왔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에 어떻게 작동되었으며 그에 따른 모순은 무엇인가. 장시간 노동에 노출되며 산업재해로 병들고 죽은 노동자, 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된 노동자, 죽음의 원인조차도 가려진 민중들의 의문사가 꼬리를 물고 있는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1차 산업의 주역인 농민들의 피땀은 고도 성장의 역사에서 어떻게 서술되어야 하는가. 노동자의 희생을 딛고 자라난 독점재벌의 실상과 자본주의의 본질도 기록되어야 균형 잡힌 역사이다. 민중들의 사실적인 모습과 삶의 흔적이 역사적으로 모조리 지워지고 허접하고 반역의 정치인이 영웅으로 부각되는 교과서는 교과서가 아니라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도구에 불과하다.
검인정보다 자유발행제에 초점을 맞추자
필자는 헌법기관을 좋아하진 않지만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헌법재판소가 교육적 가치에 가장 부합하는 교과서 제도로 국정도 검인정도 아닌 자유발행제를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그 대목은 “국정제도보다는 검인정제도를, 검인정제도보다는 자유발행제를 채택하는 것이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며 헌법의 이념을 고양하고 아울러 교육의 질을 제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고 교과서에 대한 결론을 내린바 있다. 지배권력,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그토록 칭송해마지 않는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처럼 노동자들은 검인정제가 아니라 OECD국가들이 대부분 채택하고 있는 자유발행제를 주장해야 한다. 자유발행제를 통해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서술하고 노동의 가치를 알게 하며, 1차 산업의 주역이었던 농민들의 삶과 아픔을 학생들에게 학습하게 하는 것이 불순한 의도일 수 있을까.
역사란, 기록과 사실 사이에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의 연속이다. 따라서 역사는 인물탐구가 아니며 연표만 나열하는 것도 아니다. 역사는 우리들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적 상황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가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사실이 없는 역사는 뿌리도 생명력도 없는 무의미한 것이 될 뿐이다. 역사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더라도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기록하느냐에 따라 매우 주관적 관점에서 서술될 수밖에 없지만 민중사관이 반영되지 않은 교과서는 지배계급의 담론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의 역사가 생략된 한국사 교과서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현재 검인정교과서조차 역사의 주체이며 사회의 주인인 노동자 민중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 왜곡되고 가려지고 지워진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인정하면서도 국정화 반대만 외치는 것에 허전함이 자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정화 교과서를 반대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집필되고 서술될 자유발행제라는 요구가 강조되어야 한다. 당장은 거대한 자본과 권력에 부닥치더라도 노동자계급의 삶과 흔적이 담긴 교과서를 끊임없이 주장해야 한다. 국정화 반대와 검인정을 비판하고 자유발행제를 주장하되 그 속에 노동자 민중의 역사가 녹아나고 교육되는 게 진정한 교과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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