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2년 12월, 18대 대통령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후보들의 각종 정책이 난무하는 가운데 트위터를 이용해서 언론사 기사에 덧글을 달려고 했다. 그랬더니... 실명인증을 받아야 한단다. 이건 또 뭔가? 인터넷 실명제가 폐지됐다고 하더니 어찌된 일일까?
그랬다. 인터넷 실명제는 폐지 된 것이 아니었다. 지난 2004년 3월, 총선 직전에 최초로 시행된 인터넷 실명제로 선거때마다 언론사와 대형포털 인터넷 홈페이지에 본인 실명인증을 거쳐야 글을 쓸 수 있게 했다. 애초에 인터넷 실명제는 선거시기에 적용되던 인터넷 실명제였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인터넷 실명제가 시작되던 이때는 블로그가 그해 10대 뉴스에 꼽힐 만큼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블로그가 처음 도입된 이후 2년만에 벌어진 일이다. 블로그가 처음 시작되던 2002년에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는 대선에서 젊은 층의 폭발적인 호응을 인터넷으로 모아 내 극적으로 당선됐다.
이처럼 그 무렵 인터넷은 대선 당락을 좌우할 만큼 영향력이 커졌다. 이후 1인 미디어라는 블로그 등이 우후죽순처럼 확산되면서 인터넷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시기 정치적 의사를 규율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바로 인터넷 실명제다.
인터넷의 영향력이 확대될수록 통제도 더 강력해졌다. 인터넷의 힘으로 당선된 노무현 정부는 인터넷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선거시기에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한 이후에도 인터넷의 영향력이 줄어들 줄 모르자 정부와 정치권은 인터넷 실명제를 더 확대하려고 했다.
정부당국은 인터넷 악성댓글을 문제 삼으며 연예인과 청소년들이 자살할 때마다 자살 원인을 악성댓글로 몰아가며 이를 규제하고 실명확인을 강화하는데 몰두해 왔다. 결국 2006년 말, 정부와 국회는 정보통신망법을 개정해 하루 평균 방문자 30만명 이상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본인확인제(실명제)를 의무적으로 시행하게 했다.
하지만 인터넷 공간은 더 커져만 갔다. 정권이 바뀌고 2008년 광우병 촛불정국이 발발하자 인터넷과 SNS 공간은 사회변화의 소통 중심으로 굳건히 자리잡게 되었다. 촛불에 데인 이명박 정부는 2009년 1월 인터넷 실명제 대상을 더 확대해 하루 평균 방문자 10만명 이상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하게 만들었다.
이런 실명제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선거시기 인터넷에서 의사소통이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시기에도 표현의 자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악성댓글 때문이라던 연예인과 청소년 자살문제도 인터넷 실명제가 전면화 된 이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또 주요포털과 언론사 사이트 등에서 본인확인을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용인하는 바람에 국민 대다수의 주민등록번호가 해킹되어 팔려나갔다. 2008년 옥션에서 1800만 명, 2011년에 SK커뮤니케이션즈에서 3500만 명, 올 들어 지난달에 KT에서 87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 사실상 전 국민의 주민등록번호가 공개돼 있는 상태다.
이 상황에서 헌법재판소가 23일 하루 평균 10만명 이상 접속하는 대형 인터넷 사이트의 실명제에 대해서는 위헌 판결을 내렸다. 헌재의 논리는 간단했다.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된 이상 허위로 작성하는 경우 본인 식별이 어려워 인터넷 실명제가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헌재의 판결이 알려지자, 인터넷 실명제가 폐지됐다고 많은 사회단체들과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 인터넷 실명제는 폐지된 것이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0년 <참세상>이 제기한 “선거시기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서는 찬성5, 반대3으로 합헌 판결을 내린바 있다. 위와는 전혀 다른 논리로 선거시기에 인터넷 실명제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23일 위헌판결과 이것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헌재는 일반적인 인터넷 실명제는 안되지만 선거시기에 실명제는 여전히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까다로운 절차와 요건을 전제로 정리해고제도가 처음 도입된 후, 이를 더 완화해 아무 때나 정리해고 할 수 있도록 법을 새로 만들었다고 하자. 그런데 헌재에서 아무 때나 정리해고 시키는 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고 해서 정리해고제도가 폐지됐다고 할 수 있을까? 인터넷 실명제를 둘러싼 지금의 상황은 이와 같다.
헌재가 위헌 판결을 내리자, 다행스럽게도 중앙선관위는 인터넷 선거 실명제에 대해서도 폐지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올해 1월, 4.11 총선을 앞두고도 중앙선관위는 국회에 인터넷 선거 실명제 폐지 의견을 냈었다. 그런데도 실명제가 폐지 또는 약화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더 강화된 채로 시행됐다.
지난 4.11총선에서 선관위는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작성된 덧글도 실명인증이 안될 경우 게시하지 못하게 했다. 반쪽짜리 헌재 판결대로 간다면, 이번 대선에서도 실명제는 유령처럼 살아나 인터넷과 SNS 공간을 옥죄는 올가미가 된다.
축배를 들기에는 너무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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