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민주노조, 무엇이 문제인가

[복수노조 기획](5) 공모된 시나리오+민주노조 운동의 관성화

복수노조와 함께 기존 민주노조 활동이 축소된 곳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우선 모두 금속노조 사업장이었다. 또 길게는 10년 동안 쟁의가 일어나지 않았던 곳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노조 활동가들이 하나같이 지적한 것은 ‘자본과 정부, 법까지 공조해 민주노조 무력화에 앞장섰다’는 외적 요인과 ‘민주노조 운동 내부의 안일함’이라는 내부적 반성이었다.

  노동청은 사측의 공격적 직장폐쇄를 용인했고, 노조의 쟁의행위를 불인정하는 식으로 기업의 편에 손을 들어주며 노동자들에게는 허울뿐인 노동청이 되고 있다. [출처: 뉴스민]

공모된 시나리오

정부는 타임오프제 도입, 복수노조법 시행을 통해 노조의 근간을 흔들었다. 노동청은 사측의 공격적 직장폐쇄를 용인했고, 노조의 쟁의행위를 불인정하는 식으로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경찰은 경비용역 직원들이 소화기를 분사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통령은 “연봉 7천만 원 받는 귀족 노동자들의 불법 파업”이라는 말로 선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자본과 정부, 법, 공권력의 공조 속에 회사들은 저마다 ‘경영상의 위기’를 카드로 내밀고, 노동자들을 갈라쳤다. 그 앞에서 민주노조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배재식 발레오만도지회 사무장은 “회사가 1년 힘들다고 경영상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동안 쌓인 이익은 어디로 갔나. 직장폐쇄는 노조를 깨는 게 목적”이라며 “고용노동부는 기업주를 지켜줄 생각이 먼저다. 우리가 어려움을 호소하는 문제는 질질 끌지만 사측의 요구는 즉각 처리한다”고 말했다. 발레오만도는 설 휴무 다음 날 새벽 오전 5시 38분 직장폐쇄를 포항노동지청에 신고했고, 불과 20여 분 뒤 직장폐쇄공고가 나왔다.

김성훈 KEC지회 수석부지회장은 “어용노조가 교섭권을 가져가면서 우리 노조는 파업권이나 단체행동권조차 행사하지 못한다. 게다가 단협 진행 과정도 공개하지 않았다. 단체행동권을 제약하는 것은 노조 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현행 복수노조법의 허점을 비판했다. 현행 복수노조법은 자율교섭과 교섭창구단일화 중 하나를 사측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정훈 상신브레이크 해복투 의장은 “불법적인 총회를 해서 금속노조를 탈퇴하고 기업노조를 설립해도 법원 판결이 완료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며 “금속노조가 존재하고, 기업노조를 인정할 수 있는 법적 해석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불법파견에서 나타난 것처럼 기업은 법 앞에 ‘쫄지’ 않는다. 시간을 끌어 노조 무력화를 완수한 후에 따라도 늦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에 대해 배재식 사무장은 “사실 지노위, 중노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히려 시간만 지연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검사든 판사든 해고된 사람의 아픔을 모른다. 시간을 질질 끌기만 한다”며 “노동전문 법원의 3심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조 운동의 관성화

노동법과 정부기관이 노동자를 외면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민주노조가 계속 무너지는 데는 외적 요인과 더불어 ‘민주노조 운동의 관성화’를 꼽으며 내부 반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회사의 회유와 협박에 쉽게 무너진 것은 민주노조 운동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출처: 뉴스민]

제2노조 간부 중 상당수는 민주노조 시절 대의원이나 간부를 맡았던 이들이다. 상신브레이크의 경우, 직장폐쇄 이후 금속노조 집행부가 사퇴했고 집행부 선거를 다시 진행했다. 그 결과 금속노조 탈퇴를 전면에 건 후보가 당선됐다. 많은 표차는 아니었으나, 민주노조 활동가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상신브레이크 현장에서 만난 노동자 김 모 씨는 “집행부를 장악하고 이 판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을 많이 조직하지 못했고, 깨진 상태”라고 말했다. 민주노조가 한 번 무너진 이후 힘을 모으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김 씨는 “선거에 이긴다고 해도 회사는 패를 또 가지고 있다. 그때 또 복수노조를 만들면 된다”며 “노조가 조합원의 권리에 기초해서 움직일 수 있도록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발레오만도지회 관계자는 “언젠가부터 투쟁해야 할 때 피하기 시작했다. 신규채용이 없어지면서 노조 운동이 고령화됐다. 노동자라는 스스로의 자부심도 점점 옅어졌다. 노조 간부는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하는 역할이 됐고, 노조가 깨질 때도 설마 노조가 없어질까 하는 안일한 생각도 하게 됐다”고 전한다.

이 관계자는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를 언급하며 “투쟁해야 하는데 대화로 풀려고 하고, 나도 금배지 달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노동자정치 세력화를 이야기하는데, 투쟁이 없어진 금배지 정치만 남았다”며 투쟁 없는 정치세력화 과정이 노조의 관성화를 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성기업지회 관계자는 덩치만 큰 산별노조의 관성화가 지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설명했다. “현대차라는 배후가 없으면 부품사의 노조 무력화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현대자동차는 임단협 시기에 부품사 사장들을 불러 모은다. 이 관계자는 “금속노조가 산별노조로서 파업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있나. 자동차 업계의 불황이 충분히 예고되고, 기업들이 공모하는 가운데 금속노조가 산별 역할을 제대로 못 했다”고 꼬집었다.

KEC지회 관계자도 “발레오만도가 깨질 때도, KEC가 깨질 때도 금속노조는 이를 계급적 사안으로 보지 못했다. 87년 이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노조 하나다. 이게 파괴되는데, 개별 노조의 문제로만 인식했다”며 복수노조 시대에 노동운동의 대응이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어 “노동자들이 힘의 관계에 굴복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어용노조라도 죽는 건 마찬가지다. 고용불안을 느끼기 때문이지 않나.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말고 전체 노동자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산별노조 간부들부터 변해야 한다”며 현재 민주노조 운동이 관성화를 비판했다.

결론은 ‘현장 복원’

내적 비판을 하는 이들은 결론에서 하나 같이 ‘현장 복원’을 강조했다.

KEC지회는 파업 당시 대체 인력으로 투입된 이들을 신규 조합원으로 받아들였다. KEC지회 관계자는 “파업 때 대체인력으로 들어와 사측 생각을 꾸준히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회 조합원들이 현장에 복귀하고 나서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며 지회에 가입했다”고 설명하며 “선명하게 싸울 방향을 제시하고 아래에서부터 토론하고 요구를 모아내는 것이 민주노조 활동 방향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지회는 어용노조로 넘어간 노동자들도 다시 조직하기 시작했다. 인간관계에 대한 상처를 조금씩 지웠다. 법이 바뀌길 기다리기보다 현장에서 조직적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KEC지회는 조합원이 꾸준히 늘어 200명에 육박한다. 기업노조 조합원은 줄어들어 400명 이하로 떨어졌다.

발레오만도지회도 현장에 복귀한 조합원 일부를 공개했다. 복수노조법 내에서 교섭창구단일화 과정에 개입하기 위해서다. 더불어 어렵지만 현장 활동을 조금씩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발레오만도지회 관계자는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으므로 시간이 지나 법원 판결이 나면 현장으로 복귀할 것이다. 어렵지만 다시 현장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민, 참세상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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