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정리해고 이후 1,000일 넘게 싸우고 있는 풍산마이크로텍지회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날은 10월 10일이었다. 한글날에서 주말로 이어지는 연휴임에도 컨테이너 노조사무실과 농성 천막이 자리한 공장 한 켠에는 수십 명의 조합원들이 함께였다. 2010년 매각 이후 대다수 조합원이 가입했고 평균 연령대도 높은 정리해고 사업장. 해고자·비해고자 할 것 없이 천 일이 넘는 긴 싸움을 한결같이 이어가는 동지들의 묵묵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영섭 지회장을 비롯한 집행간부들과 함께 나눈 당연하고도 특별한 투쟁의 이야기를 전한다.
▲ 2014.10.10 마이크로텍지회 사무실 인터뷰 현장 [출처: 철폐연대] |
풍산은 어떤 회사이고, 정리해고 투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현장은 어떠했는가.
풍산은 온산에 있는 제련 공장이 핵심이고, 거기에서 동 소재를 만들면 방위산업체는 포탄이나 모든 실탄 등을 만들고, 다른 공장들에서 소전과 리드프레임 등을 만든다. 새로운 작은 10원짜리가 풍산이 새로 개발한 도금동전인데, 동전 껍데기라고 할 수 있는 소전을 풍산에서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반도체 칩을 올리기 위한 연결 받침대라고 할 수 있는 리드프레임만 주력으로 한다. 여기는 방위산업 모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준공무원 시스템이고, 상대적으로 이직률도 굉장히 낮은 편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 파업 진압하고 공장을 세 개 법인으로 분리하면서 당시 젊은 20대 말 사람들을 다 여기로 몰았다. 그때는 풍산정밀이었는데, 그분들이 이제 정년이 시작되는 거고 동래공장이나 이런 데는 이미 정년이 진행됐다.
2002년 말에 풍산 그룹 계열사 차원으로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여기에 부부사원들이 많았는데 그중 한 명씩을 내보내는 게 핵심이었는데, 합리적인 이유 없이 너희는 수입이 두 배니까 하나 나가라는 식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수긍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심지어 아내가 더 어려서 정년까지 많이 남았으니까 남편이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다들 문제라고 인식은 했지만 당사자는 비교적 소수고 위로금도 적절하게 주고 하니까 대부분 사표 쓰고 나갔다. 그 싸움은 초반에 정리가 됐지만 그런 과정을 보고 하면서 2003년 3월에 노조가 만들어진 거다. 그때부터 2010년 연말 매각 시까지 7년 정도 동안 조합원이 현장 인원의 8% 정도, 많을 때 10% 정도였다. 탄압도 거센 편이었고, 조합원이 소수이니까 비조합원과의 차별이 심해서 조합에 잘 못 뛰어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풍산 계열사에 민주노총은 우리가 유일하다. 90년 파업에 깨지고 전노협에 잠시 있다가 약간의 시기 차이는 있지만 모두 한국노총으로 갔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탄압이 거셌고, 현장에서 노조 지키는 투쟁을 하는 게 일상이다 보니까 선뜻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못한 거다. 한국노총이랑 차별도 심해서 여기 공장에서도 딱 보면 차이가 난다. 그래서 풍산 계열사 한국노총 노조들은 우리한테 우호적이다. 금속 덕분에 얻는 반사이익도 많고, 우리가 버텨주는 게 있으니까 갈등이 별로 없다. 그게 민주노총의 힘이기도 하다.
2010년 말 풍산그룹이 풍산마이크로텍을 하이디스에 매각하면서 투쟁이 시작됐다. 당시 현장의 상황과 정리해고까지의 과정은 어떠했는가.
2010년에 매각이 진행되는 객관적인 정황이 파악돼서 노조가 제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룹 부회장이 내려와 아니라고 얘기를 하니까 현장에서는 안 믿을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연말 되면 보통 물량이 없어서 전체가 연차휴가를 가는데, 휴가 사흘 만에 회사가 매각됐다는 소식을 인터넷 뉴스로 접했다. 노조와 아무런 논의도 없었고, 우리는 부회장의 구두 선언 말고 확실한 공문을 보내라고 했었는데 회사는 말을 못 하는 거고 그룹사가 넘긴 거다. 여기가 근속이 굉장히 높다보니 모두들 배신감도 불안감도 컸다. 또 처음 인수자는 키코 사태로 자본 잠식 된 하이디스라는 회사였는데, 그러니까 더 황당한 거다. 그룹사 부회장이 한 말도 거짓말이 됐고, 상실감도 크고 그러니까 조합으로 결집이 된 거다. 2011년 1월에 현장 노동자 90% 이상이 조합에 가입했다. 매각 한 달 후에는 사채자본이 들어와서 2011년 초에는 기존 풍산 사장, 하이디스 사장, 사채가 자기가 주인이라고 온 부사장급까지 세 명이 공존하는 희한한 꼴이 났다. 주인이 누구냐 하다보니까 사채가 최대주주가 됐다. 지분을 사기 위해서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지분을 담보로 잡았으니까 담보권을 행사하고 하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2011년 3월 1일에 사채가 7.9%의 극소지분을 가지고 경영진이 됐고, 우리 원래 영문상호가 PSMC였는데 이름을 (주)피에스엠씨로 바꿨다. 그때부터 위장매각, 사기매각 문제가 제기됐고, 인수에 따른 협상이 3월 말부터 진행됐다. 사채는 지금 경영진인데, 무조건 400억이든 600억이든 유상증자 해야 한다는 걸 내걸었다. 당시 해외공장 모두 포함할 때 연 매출이 1,200억 원이었고 유상증자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명박 정권 말기에 보면 사채들이 유상증자해서 돈 빼가고 하는 게 많이 잡히고 문제가 됐었는데 똑같은 형태로 했다. 자기들이 직접 하는 게 아니라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서, 그것도 5천만 원짜리 유한회사를 만들어서 그 밑에 우리 회사를 놓은 거다. 자기들은 미래를 위해서 팔았다고 하지만, 내용은 아닌 거였고 그러니까 결국 격렬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7월말에 유상증자를 통한 투자유치와 지난 몇 년간의 적자를 이유로 첫 번째 정리해고 통지를 했고. 8월에 격렬하게 붙어서 8월 23일에 노사가 정리해고 철회 합의를 했다. 그러고 나서도 계속 임금 삭감하자고 하고 우리는 자기들 안으로 고통 분담하겠다고 했는데도 결국 결렬되고 다시 9월에 11월 7일자로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그래서 11월 2일부터 그전에 2년간 미뤄졌던 임·단협이랑 정리해고 문제랑 다 의제로 묶어서 총파업을 시작했다.
정리해고 이후 투쟁은 어떻게 진행해왔는가.
총파업 3일 만에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총파업 참여자 중에서 58명이 정리해고 됐고, 노조 집행부 다 포함되어 있었고, 11월 7일에 정리해고가 단행됐다. 투쟁의 시발점이었다. 네 명이 비조합원이었는데 바로 희망퇴직 해서 최종적으로 조합원 54명이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다. 매각 직후에 많을 때는 전체 현장 인원 190명 중에서 180명 이상 조직됐었는데, 정리해고 투쟁을 시작한 건 비해고자까지 포함해서 108명이었다. 지금 현재 조합원은 87명이다. 현장대오는 안에서 투쟁하고 있고, 해고대오는 밖에서 싸우고 있다. 투쟁 시작하고 2012년 5월 말에 한 달 동안 국토대장정도 하고 서울이랑 부산 중심으로 지역선전전도 하고 연대투쟁도 계속 했다. 2012년 12월 말까지는 비해고자도 모두 함께 했고, 그렇게 투쟁이 계속 되니까 현장에서 밀리는 게 별로 없다. 저 안에 들어가면, 안에 180명 정도 있는데 우리 조합원이 30명이다. 처음 복귀했을 때는 바로 쫓겨나고 징계 때리고 교육 돌리고 하면서 불이익들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업장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다. 안에 복수노조로 회사가 만든 어용노조로 80명 정도 있고 국민노총도 10명 정도 있지만, 회사하고 주로 부딪히는 거고 노동자들끼리의 갈등은 물론 있겠지만 크게 비화되지는 않는 편이다.
투쟁하면서 앞이 안 보이는 고비도 많았지만, 우리는 좀 상대적으로 투쟁할 계기가 많았고 동력도 받쳐줬다. 처음 해고되고 바로 전경련에서 땅 개발하자고 TF팀 만들자는 공문을 부산시 각 기관에 뿌려서, 거기서 특혜문제 전면에 걸고 싸우기 시작했다. 다음에 지노위·중노위에 희망국토대장정 다녀오고 겨울에 약간 공백이 있었는데 2013년에 행정법원 투쟁이 있었고, 이기고 나니까 버틸 힘도 좀 생기고 고법까지 온 거다. 2012년 말에 비해고 조합원들 복귀 시킬 때도 현장에서 버틸 수 있을지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사실 11개월 동안 100명이 함께 투쟁하는 게 재정이 너무 힘들고, 해고자들은 해고된 입장이 있는 거고 40명 넘는 비해고 조합원들은 자기 선택을 한 거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들여보냈는데 회사는 징계에 교육을 4개월씩 시키고 순차 복직을 시켰다. 이런 과정들이 집행부 입장에서는 힘들고 했지만, 그런 걸 다 뛰어넘은 동지들이 지금까지 안에서 살아남아 있는 거다. 2013년부터 해고자만 밖에서 투쟁하면서 좀 벅찬 부분이 있었지만, 현장대오가 주말 일정이나 철농에도 결합하고 공장 앞 선전전도 도맡다시피 한다. 상경투쟁 간다고 하면 연차 때리고 다 같이 간다. 회사는 협박도 하고 무단결근 처리도 하지만, 그래도 조합원들이 잘 해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 문영섭 지회장 |
지난 9월 24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전원이 부당해고 판결을 받았다, 예상했던 승리였는지? 그간의 법률 투쟁 경과는 어떠했는가.
당연하고 정당한 판결이지만 예상은 못했다. 회사가 고등법원 들어오면서 대리인을 김앤장으로 바꿨는데, 서면을 제출하면서 절묘하게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게 있었다. 그리고 김앤장 대표변호사가 서울고법 부장판사 출신이었고, 재판장이 두 번 바뀌었는데 판결한 재판장이 김앤장로펌 출신으로 10년 전에 특채 채용된 판사였다. 기간이 있어서 제척 사유가 안 됐는데 8월에 재능교육 판결을 뒤집은 판사였고, 8월 20일이었던 선고도 연기된 거였다. 정황상 힘들겠다고 생각해서 조합원들 모아놓고 이건 진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싸운다, 그런 결의를 다 했었는데 다행히 잘 돼서 여유가 조금 생겼다.
법률 투쟁은 이제까지 다 이겼다. 지노위에서는 경영상의 이유가 있기는 하나 해고할 상황은 아니었다는 판정이었다. 해고 회피 노력도, 합의를 깼으니 노조와의 성실 협의도, 기존의 인사고과 평가가 있는데 새로 업무능력평가 도입해서 그걸 기준으로 해고시킨 거여서 대상 선정도 모두 인정이 안 됐다. 노조 간부 중심으로 해고해서 부당노동행위도 인정을 받았다. 문제는 2012년 6월 중노위였는데, 미래에 다가올 위기에 대한 사전 구조조정이라고 해서 뒤집고, 대상 선정만 부당하다고 해고자를 반으로 갈랐다. 그해 10월에 창조컨설팅 소송에서 입금내역이 드러나면서, 풍산이 창조컨설팅 동원해서 개입한 게 드러났다. 매각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지배를 다 하고 있다는 게 확인된 거다. 행정법원에서는 지노위와 유사하게, 경영상의 이유는 존재하나 정리해고 할 사안은 아니라고 판결했는데 부당노동행위는 인정을 안 했다. 그리고 지난 고등법원에서도 유사하게 판단하고 인정했는데 하나 다른 점은, 회사가 주장하는 미래에 다가올 경영상의 위기는 인정하지 않은 거다. 부당노동행위는 기각됐다.
성세경 노동안전보건부장: 법원은 두 가지를 본 것 같다. 첫 번째 경영진이라는 사채의 문제점을 본 것 같다. 자본의 성격 규정이 법리적인 영향까지 미치지는 않았겠지만, 인수자금을 소액만 넣고 회사 자산을 팔아서 충당하는 방식에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회사가 김앤장 로펌을 통해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현실이 아니었고, 충분히 노조와 협의해서 극복할 수 있는데 무리하게 진행했다는 거였다. 사실은 회사가 고꾸라졌다고 해도 당시 극복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2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는데 무시했고, 그걸 없는 것처럼 만들어서 주장을 했다. 법원에서 그걸 인정하지 않은 거다.
▲ 성세경 노동안전보건부장 |
9월 26일에는 풍산그룹이 도시첨단산업단지 개발 사업 참여를 포기했다. 지회의 판단과 대응은 어떠한가.
예전에는 그린벨트 개발 방식이 공공개발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워낙 규제가 풀려서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국토해양부가 주관하는 도시첨단산단은 전국에 여섯 군데 하는데 광주 쪽이나 이런 데는 다 하고 있고, KEC하고 우리가 특혜 문제가 있었는데 둘 다 신청을 안 했다. KEC도 우리하고 비슷하다. 지역 국회의원이 시장이 돼서 개발을 진행하는 건데, 이번에는 신청을 안 해서 도시첨단산단은 무산된 것이지만 이거 말고도 개발 방식은 많다. 풍산에서는 이사 하나가 내려와서 도시첨단산단은 수익성이 없어서 신청 안 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는데, 이번에 우리가 고법에서 승소했으니까 여론을 의식해서 안 한 거라고 보는 거고, 또 시도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청에 개발 계획을 확인하기 위해서 시장 면담을 요청해놓고 추진 중에 있다. 몇 년 동안 부산시청 앞에서 집회도 하고 노숙도 하고 있는데, 시청의 입장이 나와야 우리가 철수할 수 있다. 부산에서는 오랫동안 지역 현안이었고, 계속 선전전하면서 알리고 하니까 시민들 대다수가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개발을 포기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는 육군 조병창이 있기 때문에 본사 2층 건물 말고는 다 1층이고, 완전한 평지다. 산에 올라가면 다 보이는데, 부산시가 계속 발전하고 있으니까 도시 개발상 안 할 수가 없는 구조다. 우리는 개발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개발에 있어서 지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부산시가 공공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개발 때문에 회사를 사채에 넘기고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해고 직후부터 비해고자까지 함께 싸우고, 투쟁이 장기화되고 있는데 이탈자가 거의 없다. 인원도 많고 생계 문제도 컸을 텐데 가능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원래 우리 노동운동사나 노동조합운동사를 봐도 다 그렇게 한다. 누가 잘리든 같이 싸운다, 누가 잘리면 안 잘린 사람들이 임금 보전해준다, 이건 확약서도 다 쓴다. 확약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우리 노동조합의 구호다. 내가 지회장이지만 누가 해도 다 마찬가지고, 그 구호가 현실화된 거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대안을 세우고 그래야 투쟁에 이긴다고 하지만, 몇 개월의 짧은 기간에 깨지고 해고 싸움은 장기화되고 그런 문제인데 우리는 실제적으로 집행이 된 거다. 처음에는 해고자들의 퇴직금으로 투쟁기금 마련하고 일부를 떼서 현장대오의 생계비를 한두 달 정도 챙겨줬고, 이후 실업급여 받아서 싹 다 모아서 똑같이 나누고 그런 식으로 해왔다. 평균 근속이 20년이 넘으니까 대부분 가정이 있고 대학생 자녀가 있는 경우도 많았다. 한 달에 50만원, 어떤 때는 후원금이 좀 들어오면 100만원, 두 번인가는 아예 못 준 적도 있다. 생계 문제가 모두 어렵고 제일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가정을 다 꾸린 거다. 집에서 난리가 나고 했지만.
성세경 노동안전보건부장: 그러다가 좀 안정이 된 게, 중노위에서 분할 판정 나고 20명이 이기면서 그걸로 가처분 신청을 했는데 인정을 받게 됐다. 부당해고 판정 난 20명이 받는 걸 지회로 모아 배분하면서 2012년 여름부터는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그리고 현장대오가 복귀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월 20만원씩 투쟁기금을 내고 있는데 모이면 적지 않은 금액이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내성이 생긴 부분도 있고, 그래서 지금은 경제적으로는 많이 나아진 상황이다.
물론 함께하는 투쟁이지만 3년이면 짧은 시간은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각자의 개인적인 이유와 사연도 있을 것 같고, 궁금하다.
이강문 조사통계부장: 조합원 20% 정도는 기존에 많이 하셨던 분들이고 나머지는 투쟁의 투자도 잘 모르는 보수적이고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족, 회사, 국가를 위해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만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회사가 매각을 하더라도 정상적인 과정으로 했다면 분노나 그런 게 없을 거였는데 아니다보니 배신감이 밑바탕이 돼서 가입하고, 매각 이후 경영진들도 이상한 놈들이고 하니까. 그 힘으로 지금까지, 이탈자 없이 힘들지만 왔지 않나 생각한다. 시작은 일종의 배신감이었지만, 투쟁을 하면서 조금씩 눈을 떠가는 것 같다. 나는 처음에 와가지고 내가 새로운 인생을 사는 구나, 이런 인생도 있구나, 지금까지는 회사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게 노예식 비슷한, 그런 게 아니었나, 이제 좀 탈피를 하자 하는 생각도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나이도 먹고 애들도 크고 나니까,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래도 직장생활 착실히 해줬고 그러고 나서 해고되니까 집사람도 이해해주는 게 있고, 길어지니까 이제 끝날 때 되지 않았느냐 하는데 나는 이왕 시작했으니까 끝을 봐야 되지 않느냐 하는 거다. 애들도 웃으면서 완전히 노숙자네 그러고 이해해주고, 부모님들도 인정해주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다. 또 예전에 같이 못했던 게 미안하기도 하고 지회장님부터 해서 솔선수범하니까, 그전부터 했던 사람들이 열심히 하니까 그런 거 보면서 따라가는 거다.
▲ 이강문 조사통계부장 |
윤광섭 교육선전부장: 2002년 11월에 결혼했는데,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금속조합원이 됐다. 2003년에 노조 만들고 회사에 교섭 요구하고 그런 과정들이 있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십여 년을 달려오다 보니까 사실은 가족들한테 제대로 못 해주고 참 미안한 게 많다. 소수조합원일 때는 힘든 게 투쟁보다는 금속노조 깃발을 지켜야 한다는 그것 때문에, 거의 매주 회의하고 고민하면서 가야하는 부분이 컸다. 그러다 보니까 실제적으로는 개인적인 삶은 없었던 것 같다. 간부가 그 정도니까 지회장은 오죽 했겠나 싶고, 그런 게 하나의 힘이 되어서 지금까지도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기존에 하시던 분들이 헌신적으로 하고, 그걸 기득권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하면 융합이 안 됐을 건데 그걸 내려놓고 했던 게 있다. 2011년에 가입한 분이나 7, 8년을 투쟁했던 분들이나 같이 하나가 되니까 비해고자 동지들도 같이 하는, 그런 바탕이 된 것 같다. 한편으로는 같이 하던 사람들이 탄압에 떨어져나가는 걸 지켜보며 아픔들도 있었고 한 동지가 사고로 돌아가시는 슬픔도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2011년에 투기자본이 들어와서 하는 게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고, 우리는 우리의 삶터를 빼앗길 수 없다는 게 컸다. M&A 전문가들이 무자본으로 들어와서 기업을 해먹고 가려는 부분, 기업사냥꾼들한테 현장을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길게 올 수밖에 없고 와야 되는, 짐을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 윤광섭 교육선전부장 |
강동선 조사통계차장: 나는 매각되기 전에는, 개인적인 생활 위주로 어디 소속되고 이런 걸 싫어해서 솔직히 노조에 대해서 잘 몰랐다. 매각이라는 그 자체가 큰 거였고 보면서 동료라는 것, 많이 느꼈다. 처음에 시작할 때도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옳은 길이니까 가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다. 지금 40대 중반이 되어 가는데 살아오면서 다 부모님 뜻에 따랐고, 스스로 결정했던 것은 결혼하고 투쟁이 처음이었다. 싸우기로 결정하면서 와이프한테도 내가 이렇게 할 거니까, 어차피 가진 건 없는 사람들이니까, 힘들겠지만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었다. 정리해고 터지고 나서는, 이 사람들 살려야 되겠다. 같이 싸우면 힘이 되니까 함께 시작을 한 거다. 3년이 될지, 5년이 될지, 지회장한테 속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왔고 오다 보니까 징계도 먹고 나름대로 해고도 됐다가 복직도 됐다. 기간으로 봤을 때 비해고자 중에서는 해고자들이랑 같이 있는 시간이 제일 많았던 것 같고, 그래서 나는 그 입장을 좀 이해한다. 사람이 자기 의사가 아니라 남에게, 쉽게 말하면 칼 맞은 것처럼 해서 잘렸을 때의 그 입장, 제일 큰 게 그거였다. 의료보험이 없어진 것, 그걸 또 가족들한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 그것도 컸었고, 그 심정을 좀 많이 이해했다. 그러면서 복직하기까지 10개월 정도 투쟁했는데, 그 기간 동안 마음이 더 커진 거다. 이 싸움을 어차피 끝내야 하고, 처음 마음 품었던 그대로 같이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안에 있는 비해고자들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말은 쉽게 투쟁기금 내고 주말에 나오고 이렇게 한다지만, 그게 자기가 마음이 없으면 힘든 거다. 저 안에 들어가서도 우리가 안 죽는 게 우리는 서로를, 사람 간의 관계를 보고 하는 거니까. 싸움을 이겼다는 것보다 같은 동료를 살렸다는 게 더 크게 와 닿는 거고 그래서 당당할 수 있는 거다.
▲ 강동선 조사통계차장 |
성세경 노동안전보건부장: 처음 시작했던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해고 직전에 명단은 몰랐지만 잘릴 거라고 예상을 했었다. 싸움해야 될 거라는 예상을 했었고, 근데 사실상 해고통지서를 받으니까 기분은 정말 더럽더라. 해고통지서를 와이프가 먼저 봤는데 딱 받아서 뜯어보더니 울더라, 아직도 기억이 난다. 비 오는 날, 토요일이었는데. 사실 와이프도 강한 사람이다, 보더니 “싸움 할 거쟤?” 이러더라. 그렇게 시작된 거다. 법률 부분을 담당하다 보니까 소송하면서 느끼는 건데…… 사실은 법이 우리 편이 아닌 거고. 판사들의 시각이 보수적이다 보니까 노동조합이 지는 판결들이 많이 나오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실 모든 정리해고는 불법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리해고 요건을 강화해서, 최소한 자본이 자기 욕심 채우는 정리해고는 못하도록 법을 예전처럼은 되돌려놔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후의 투쟁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일단은 하던 대로 계속 할 예정이다. 그런데 대법원까지는 굉장히 긴 시간이기 때문에 판결로 복직하겠다는 건 폐기했다. 대법 대응은 하겠지만 이제 생존권 투쟁을 본격화해야 된다고 정리를 했다. 그리고 최근의 소송 과정에서 불법매각 관련해서 새로운 사실이 나온 게 있다. 풍산그룹이 회사를 매각했을 때 하이디스가 돈을 못 갚아서 사채로 넘어간 걸로 알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사채로 넘기려고 주식세탁을 했다는 정황이 포착된 거다. 원래도 문제가 많았지만 계획적인 불법매각으로 정리해고한 거다. 이 부분을 결합해서 생존권 투쟁에 집중할 생각이고, 개발 문제는 시에 확인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투쟁은 계속 유지하되, 그동안 조합원들이 너무 오래 달려와서 간담회를 통해서 내부적으로 서로 힘을 주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 2014.10.10. 풍산마이크로텍지회 조합원들 [출처: 철폐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