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다음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A씨는 뉴스 속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새벽 6시 경, 신한국당 의원 154명이 버스를 대절해 국회본회의장에 들어가 7분 만에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는 소식이었다. 자동차 부품사에 다니던 그는 지난여름부터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법 개정 방향에 대한 여러 차례 교육을 받아왔다. 만약 신한국당의 의도대로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시간제’ 등을 골자로 하는 노동악법이 통과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아직 30대 중반인 A씨에게는 초등학교 문턱도 넘지 못한 어린 아이와 아내가 있었다. 그야말로 밥줄이 걸린 문제였다.
출근하는 내내 마음이 뒤숭숭했다. 총파업을 하겠다며 으르렁거렸던 민주노총은 11월과 12월에 걸쳐 파업 돌입 날짜를 유보한 바 있었다. 현재는 여당이 노동법 개악을 강행할 시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지침을 확정한 상태였다. 지침대로라면 오늘부터 파업에 돌입해야 했다. 정말 파업에 들어가는 건가? 공장에 도착하면 먼저 노조사무실에 들러 친한 노조간부 B씨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B씨는 노조 사무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야 신한국당의 날치기 소식을 알게 됐다고 했다. “나는 팩스 보고 알았어.” B씨는 턱짓으로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자동차연맹에서 팩스로 파업 지침을 내렸다고 했다. “이제 어떡할 거야?” A씨의 질문에 B씨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뭘 어떡해. 파업하는 거지.”
공장 식당과 광장은 조합원들로 시끌시끌했다. 노조 지도부는 꽤 분주해 보였다. 연맹에서 파업 지침을 내리기는 했는데, 구체적인 행동 지침은 확정된 것이 없다고 했다. 얼마 뒤, 민주노총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무기한 총파업 돌입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같은 연맹 소속 기아차, 쌍용차, 아세아 노조 등을 비롯해 현대그룹노조총연합도 파업에 돌입했다고 했다. 기아차 소하리공장 노동자들이 민주노총 지도부가 농성 중인 명동성당으로 집결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노조 간부들은 점심 식사 후, 공장을 벗어나 지역본부별로 파업 집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A씨는 조합원들을 따라 공장을 빠져나왔다. 24일간 이어진 전국적 총파업 투쟁의 시작이었다. 언론에서는 이 시기 노동법개정투쟁(노개투) 파업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50년 만의 첫 정치총파업이라고 불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록된 총파업의 역사
1996년 12월 26일부터 다음해 1월 18일까지, 무려 24일간 이어진 노개투 파업.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출범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록되는 총파업의 역사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2015년 현재, 쉰 살을 훌쩍 넘긴 A씨는 노개투 파업을 떠올리며 쓸쓸하게 말했다. “그때는 우리(노조) 조직력이 좋았어요. 노동운동 할 만 했습니다.” 당시 노조 간부였던 B씨도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렸다. “파업이 될까, 했는데 그냥 돼 버렸어요. 준비가 잘됐기 보다는 운이 좋았지. 조직력도 좋았고. 우리 사업장은 24일 내내 전면파업을 했으니까요.”
노개투 파업 이후, 민주노총은 종종 총파업을 선포하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뻥파업’이니 ‘출장파업’이니 하는 비아냥거림만 늘어났다. 3년 전 민주노총이 정치총파업을 선언했을 때, 노조 활동가들은 토론회 자리에서 ‘노개투’라는 승리의 역사가 오히려 노동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노개투 파업 당시 내로라하는 연맹위원장 출신의 어떤 이는 “노개투 총파업은 총파업이 아니면 투쟁이 아니라는 트라우마를 던졌고, 노동운동의 발목을 잡았다”고 말했다. 당시 또 다른 노조위원장 출신의 어떤 이는 “파업 만능주의로 민주노총이 망했다”고 날을 세우기도 했다. 도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투쟁이었기에 ‘트라우마’를 넘어 민주노총을 20년씩이나 망조에 들게 했다는 걸까.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파업 첫 날인 26일. 85개 노동조합 조합원 14만 2,416명이 일제히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민주노총 조합원이 49만 6,908명인 점을 감안하면, 첫 날만 28%이상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파업에 동참한 셈이다. 이날 파업은 금속연맹, 자동차연맹, 현총련 등 현재 금속노동조합으로 묶인 제조업 중심의 노동자들이 주축이 됐다. 민주노총은 노개투 총파업이 ‘정치총파업’임을 선언했다. 권영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은 26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은 반민주적 폭거를 저지해 신한국당을 해체시키고 김영삼 정권을 퇴진시키기 위해 전국적인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다”고 선언했다.
둘째 날 파업 참가규모는 더욱 늘어났다. 27일 165개 노동조합 소속 20만 9,548명이 일손을 놨다. 제조업 노동자를 비롯해 사무직을 중심으로 한 전문노련과 공공부문 병원노련 등이 파업에 가세했다. 셋째 날에는 173개 노동조합 22만 명이, 넷째 날에는 186개 노동조합 21만 명이 파업에 참가하며 파업 규모가 확대됐다. 1월 3일~7일까지는 연초 혼잡을 피하기 위해 공공부문이 파업을 잠정 중단하는 등 파업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8일부터는 다시 180개 노동조합 22만 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공공부문의 병원, 지하철, 의료보험노조 노동자들을 비롯해 방송 4사와 사무노련, 건설노련, 대학노련 등 사무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본격화됐다.
노동자들은 오전에 각 사업장에서 파업집회를 벌이고, 오후에는 거리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곤 했다. A씨도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처음에는 제조업 중심이었지만, 이후에는 화이트칼라가 붙으면서 뉴스에도 크게 나왔어. 매일 가두집회를 했고, 이후에는 무조건 신한국당 당사 앞으로 몰려가 집회를 했지.” 파업 규모가 확대되면서 정권은 만만치 않은 공세를 펼쳤다. 시위자 연행 및 고소고발이 이어졌고, 140여 명에게 소환장이 발부됐다. 지도부를 상대로 사전영장을 신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해 전국 20여개 지역에서 집회 및 가두행진이 이어졌고, 1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집회에 참여했다.
1월 15일은 전 부문 집중투쟁이 전개됐다. 388개 노동조합 소속 35만 여 명의 조합원이 파업에 돌입하며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 진행됐다. 이후 민주노총 지도부가 20일부터 수요파업으로 전환키로 결정하면서 총파업은 정리기로 접어들었다. 결과적으로, 노개투 총파업 기간 동안 528개 노동조합의 40만 3천 여 명의 조합원이 한 번 이상 파업에 참가했다. 민주노총 조합원 81%가 한 번 이상 파업에 참여한 셈이다. 파업 참가 누적 규모는 총 3,206개 노동조합 359만 7천 여 명에 이른다.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던 민주노총 지도부 C씨는 “명동성당에 갇혀 있어서 모두 보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명동성당을 에워싸고 매일 집회를 벌였다. 최루탄이 터지고, 최루가스 냄새도 날아왔다”며 “하루 평균 5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약 30일 동안 총 150만 명이 집회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된다”고 밝혔다.
곰이 웅녀가 되길 기다리듯...‘총파업 준비’의 길은 멀기만 하고
그렇다면 노개투 투쟁은 정교한 준비와 확신이 담보된 투쟁이었을까. 매번 노동계에서 ‘준비된 총파업’을 강조하기에, 노개투 투쟁의 준비과정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B씨의 대답은 무심했다. “조합원 총회나 교육은 이뤄졌지만, 대단한 준비라기보다는 그냥 지금이랑 비슷해. 그때도 아무도 총파업이 될 거라고 확신하지 못했어.” 실제로 당시 상황을 보면, 고뇌에 빠진 민주노총 지도부는 꽤 오랜 방황을 한 것으로 보인다. 투쟁본부 대표자회의는 그해 10월 초 회의를 열고, 11월 15일을 총파업 돌입시점으로 잠정 결정했다. 하지만 11월 초에 돌연 선제 파업을 포기하고, ‘노동법 개악을 강행할 시 총파업 돌입’으로 방침을 선회했다.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이 발표된 뒤에도 비슷한 방황이 이어졌다. 12월 초, 민주노총 비상중앙위는 회의를 열고, 12월 13일 4시간 총파업 돌입 방침을 결정했다. 하지만 6일 뒤 열린 임원산별대표자회의는 또 한 번 위원장의 파업 유보 방침을 발표했다. 정부가 의도적으로 파업을 유도해 민주노총을 탄압하려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민주노총 간부였던 C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사실상 선제파업에 못 들어간 거죠. 조건이 안 된다고 했어요. 지도부가 조합원을 못 믿은 거예요. 노개투 투쟁은 정치총파업이었기에 정권에서는 불법파업이라고 했어요. 민주노총이 전국적인 차원의 정치파업을 해본 적도 없었고요.” 무엇보다 지도부는 총파업의 주요 동력인 현대차 등 완성차 공장의 주동력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2015년이 됐고, ‘즉각적인 선제총파업’을 공약으로 내건 한상균 지도부가 민주노총 지도부로 당선됐다. 막판까지 경합을 벌이다 낙선한 타 선본은 ‘준비된 총파업’을 강조하던 후보자들이었다. 한상균 지도부의 당선은 ‘총파업’으로 정권과 자본의 투쟁에 나서겠다는 조합원들의 의지로 평가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합원들은 노개투 이후 긴 세월동안 숱한 총파업 준비기를 거쳐 왔다. 작년만 해도 ‘박근혜 퇴진’을 내건 2.25국민총파업을 준비해 왔고, 2012년에도 10대 우선입법과제 관철을 위한 8월 총파업을 준비한 바 있다.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 노개투 파업 이후 97년부터 2009년까지 민주노총이 수행하거나 선포, 철회, 유보한 총파업 현황은 총 30여 건이다. 20년간 총파업과 ‘썸’만 탔던 조합원으로서는 감질날만 하다.
그렇다고 정권의 공세가 잠잠해진 것도 아니었다. 2013년 말 철도파업 당시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 여론은 빗발쳤고, 심지어 사상 처음으로 민주노총 건물이 공권력 침탈을 당했다.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가 터졌고, 연일 전국에서 ‘박근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왜 매번 주요 투쟁 시기를 놓치고 마는가를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다. 준비가 미흡했다는 것이다.
20년의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올해 민주노총의 총파업 선포 이후, 일부 산별연맹에서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느 정도 규모가 파업에 복무할 수 있는지 밝혀야 한다며 민주노총에 ‘양심선언’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총파업에 돌입할 여건이 안 된다는 앓는 소리, 주요 산별의 참여 가능성을 점치는 눈치 보기도 이어졌다. 얼마 전에는 주요 산별노조 간부에게 “민주노총 총파업에 복무하는 거냐”고 묻자 “민주노총 파업에 복무한다기 보다는...그냥 연대하는 정도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분명 세상은 20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일각에서는 노개투 투쟁을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분출했던 노동자들의 열망이 장렬히 산화한 마지막 투쟁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C씨는 “87년 이후 10년 동안 조직력이 계속 강화됐고, 민주노조 운동이 상승국면에 있었다. 하지만 98년 외환위기 이후 17년간 노동운동은 하강국면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매번 싸움에서 밀리다 보니 노동조합에 대한 신뢰도 낮아졌고,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게 됐다. 파업을 떠올리면 징계해고와 손배가압류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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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노개투 당시 노동계의 첫 총파업에 화들짝 놀란 정권과 자본은 착실히 관리매뉴얼을 만들어 갔다. “그때(노개투)도 파업하면 해고, 구속은 있었지. 근데 대공장 정규직들이 그걸 다 돌파해 낸 거야. 손배가압류는 그 이후에 자본이 만들어 낸 거고.”(B씨) “해고, 구속 등의 탄압은 싸움의 승패에 따라 달라지죠. 노조법에 따르면 노조활동은 민형사상 처벌에 저촉되지 않는 것인데도 노동운동이 힘이 없으니 해고, 구속, 손배가압류 같은 탄압이 오는 겁니다. 노개투는 정권이 굴복한 투쟁이었으니 그런 탄압을 극복해 낼 수 있었던 거고요.”(C씨)
무엇보다 20년 전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정세는 바뀌었는데 투쟁 주체는 그대로라는 점이다. 96년, 정리해고제를 골자로 한 노동법 개악 반대 투쟁은 당시 투쟁의 주체였던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공통된 요구였다. 하지만 이제 민주노총은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공무원, 공공부문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등 다양한 고용형태의 노동자들의 요구를 모두 수렴해야 하는 조건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민주노총 총파업의 주요 동력은 97년 노개투 파업을 이끌었던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로 머물러 있다.
C씨는 “자본은 노동계 내부를 갈라치기해 전쟁구조를 만들었고, 이제 자본과 노동의 전쟁이 아닌 노동 내부의 적대관계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며 “현재 민주노총의 요구와 주체는 분리돼 있다. 조합원들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파업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민주노총은 현재 각 지역 단위로 총파업 실천단을 구성해 파업 조직 및 조합원 교육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도부는 매일 아침 7시부터 밤까지 현장순회를 이어가며 선전전, 간담회 등을 통해 조합원과 만나고 있다. 오는 3월 21일부터 다음달 4월 8일까지는 총파업을 놓고 전 조합원 총투표가 실시된다. 지금 민주노총 사무총국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노개투 파업이 한창이던 97년 1월 16일, 한길리서치가 조사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65.5%가 민주노총 총파업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노총의 호감도는 66.4%, 영향력 평가는 77.8%, 기대감은 69.8%였다. 노개투 파업에 지지하고 연대했던 시민사회, 그리고 민주노총이 이야기하는 다수의 ‘노동자 서민’들은 민주노총 파업에 어떤 방식으로 화답하게 될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