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정부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을 발표했다. 35세 이상의 기간제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겠다는 것이었다. 비정규직을 확대, 고착화하는 정책이라 논란이 일었다. 이를 예상했는지, 정부는 국민의 생명, 안전관련 분야의 비정규직을 제한하겠다는 정책을 끼워 넣었다. 여객운송 선박과 철도(도시철도 포함), 항공사업 중 생명, 안전 관련 핵심 업무에 기간제 및 파견근로자 사용을 제한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조건이 붙었다. 대상업무는 여객선 선장과 기관장, 철도 기관사와 관제사, 항공기 조종사와 관제사로 한정됐다.
노사정위가 결렬되자, 한 보수언론은 노동계 때문에 안전관련 분야의 비정규직을 제한하는 것이 요원해졌다며 비판을 했다. 노동계가 안전사회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정부는 여객, 철도, 항공 분야의 기관장과 관제사만 정규직화 한다면 안전사회가 올 것이라 믿고 있는 걸까?
여전히 생명, 안전 직결 업무에 ‘비정규직’ 천지
달리는 KTX열차 안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흔히들 승무원이 승객의 안전을 책임질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승무원들은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고 싶어도 책임질 수 없다. 이들은 외주화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승무원들은 열차팀장 및 역 직원과 긴밀한 업무협조를 통해 사고에 대응해 왔다. 그래서 법원에 소송도 제기했다. 철도공사로부터 직접 업무지시를 받는 만큼, 공사가 승무원들을 직고용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 2월, 승무원들에게 패소 판정을 내렸다. 사고가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이었다. 공사는 불법파견 논란을 피해가기 위해 승무원의 안전업무를 포기했다.
“현재 관광레저(외주업체) 승무원의 매뉴얼에는 사고 발생 시 승객들과 같이 대피하라고 나와 있어요” 김승하 KTX승무지부장의 설명이다. 안전업무는 400미터 당 1명 씩 배치돼 있는 열차팀장의 소관으로 모두 떠넘겨졌다. “사고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가끔 생기는 일이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를 이례적이라고 취급할 수 있나요. 그러면 승무원은 필요가 없는 거예요. 공사는 파견을 합법화하기 위해 사고가 나도 승무원에게 승객과 대피하라고 할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사는 철도 안전의 핵심인 유지, 보수업무도 모두 외주화 했다. 철도시설 유지보수 업무 노동자들은 외주업체 비정규직으로 채워졌다. 선로 보수 외주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무려 96%에 달한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정부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통해 철도 기관사와 관제사에 한해서만 기간제 및 파견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우선 철도 관제사는 모두 정규직이며, 기관사 중 300~400명 정도의 준비기관사만 파견업체 소속 비정규직이다. 정부는 기간제 및 파견근로만 제한을 두는 대신 외주화 문제를 덮었다. 김영준 철도노조 비정규국장은 “정부는 외주업체의 정규직이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긴밀한 업무 연계가 이뤄져야 하는 철도 안전 업무에 있어 외주화는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라고 설명했다. 김혜진 장그래운동본부 정책팀장도 “공사는 승무, 정비 등 안전과 직결된 업무를 안전업무로 보지 않고 외주화한다. 안전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안전업무에 대한 외주화 자체를 금지해야 하는데, (비정규직 종합대책은)안전을 위하는 척 하며 사실상 외주화에 면죄부를 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지하철의 경우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서울메트로는 2008년부터 경정비 업무를 외주화했다. 논란이 일자 서울시는 지난 2012년, 올해 4월부터 경정비 간접고용 비정규직을 직접고용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서울메트로 경정비업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난 8일 서울시청 앞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최인수 서울지하철비정규지부장은 “정규직이 하던 업무를 외주용역 노동자들이 하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같은 열차 안에서 같은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한다”며 “열차 정비는 간단한 업무가 아니다. 외주화는 협업을 방해하며, 협업이 잘 이뤄지지 않을 경우 안전문제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메트로에서는 경정비업무를 포함해 역 및 유실물센터, 구내운전, 모터카, PSD 유지관리 등 5개 영역을 민간위탁하고 있다. 대부분이 안전업무와 관련된 분야다.
항공사와 공항에도 무수한 비정규직들이 고용돼 있다. 심지어 항공사 조종사도 10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이다. 지난해 이노근 새누리당 의원실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8개 국적항공사 내국인 조종사 4천 392명 중 414명이 비정규직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함께 항공사들은 보안업무를 비롯해 서비스 지원, 여객운송 등 거의 모든 영역의 업무를 외주화했다. 지난해 기준, 국내 항공사 고용인력(37,441명)중 약 24.2%가 비정규직이었다. 1~2년차 객실 승무원을 인턴 형식의 직접고용 비정규직으로 활용하는 경향도 있었다.
인천공항의 경우 ‘비정규직 공항’으로 명성을 날렸다. 인천공항 노동자 7천 200여 명 중 86%이상이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다. 경비보안과 보안검색, 소방대 등 승객의 생명과 직결되는 안전업무도 모두 비정규직 하청노동자가 맡는다. 소방대장과 특수경비업무 노동자까지도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테러나 화재가 발생해도 ‘현장 대기’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논란이 일자 인천공항공사는 올 1월, 소방 및 구조 등 안전관련 업무를 직영화하거나 자회사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 밝혔다. 신철 공항지역지부 정책기획국장은 “직접 노동자들과 협의한 바는 없다”며 “언급된 특정 분야 이외에도 약 6천 명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모두 공항의 안전업무와 연관 돼 있다”고 설명했다.
여객, 철도, 항공 분야만 비정규직 제한한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나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인 2013년 국정감사 당시. 이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북한산, 설악산, 지리산 등 전체 국립공원 내 안전관리전담자 95%가 비정규직 신분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재난구조대 100여 명을 비롯해 안전 관리반 대다수가 비정규직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리고 1년 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며 안전관리 업무의 정규직화 요구가 일었다. 그렇다면 참사 1년이 지난 현재, 국정감사에서까지 지적받았던 국립공원 안전관리 요원들의 고용 형태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안타깝게도, 재난구조대 등 국립공원 안전관리전담자는 여전히 비정규직 신분이다. 대형 참사로 인한 사회적 논란에도 이들의 고용형태는 꿈쩍도 않는다. 불과 사흘 전인 지난 7일,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북한산 국립공원사무소 재난구조대’ 채용공고를 내보냈다. 재난구조대의 역할은 안전사고 예방활동과 탐방객 구조, 응급처치 등이다. 고용 형태는 비정규직, 고용 기간은 채용 시부터 올해 12월 31일까지다. 길어야 8개월짜리 계약직 일자리다. 게다가 공단은 ‘계약기간 내에서만 채용하며, 차기년도 고용은 보장하지 않는다’고 버젓이 써 놓았다. 하루 전인 6일에도 속리산국립공원 비정규직 재난구조대 모집 공고가 났다. 내용은 같았다. 이들의 보수는 세전 170만원 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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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수준의 안전관리가 필요한 원자력발전소의 사정은 어떨까. 원전에 종사하는 노동자 중 3분의 2는 비정규직 또는 하청노동자다. 지난해 기준 1만 9,693명의 원전노동자 중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65.6%(1만 2,922명)로 집계됐다. 한수원 방사선안전팀은 안전관리 업무까지 용역을 주고 있다. 업체가 바뀌면 숙련된 노동력의 공급이 불가능해 안전에 위협을 받게 된다. 영광원전 비정규직노동자들로 구성된 영광지회의 김기선 지회장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변한 것이 없다.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고용돼 있다”고 설명했다. “안전교육도 여전히 부실합니다. 안전교육이나 관리는 조그만 용역회사에서 해요. 원청에서 교육을 하면 직고용을 해야 하니까요. 그러다보니 안전 교육, 관리가 중요해지지 않죠”
육상교통 분야의 안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인력 부족과 비정규직 고용, 열악한 노동조건이 사고를 부르고 있는 탓이다. 시내버스, 마을버스, 농어촌 버스, 시외버스, 고속버스 등 노선버스업 분야에서는 연간 7천 건의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약 1만 1천 명가량의 사상자가 나온다. 사회공공연구원은 지난해 12월, 육상교통물류 분야 관련 연구자료를 통해 “운전직의 부족으로 장시간 저임금이 만연하고, 정비직의 노동조건도 열악해 정비불량이 우려된다”며 “격일제와 복격일제 근무가 만연한 마을버스 및 농어촌 버스, 경기도와 같은 민영제 시내버스에서 교통사고가 대폭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마을버스 및 중형버스 기사들은 1년 단위의 비정규직 신분이다. 게다가 버스 업체들은 버스정비 인력을 매해 줄여가고 있다. 버스정비직 또한 1년짜리 계약직 노동자가 대부분이다.
전세버스업체의 직영 운전기사도 1년 단위로 계약을 체결하는 비정규직이다. 사회공공연구원은 “업체들은 수익확보를 위해 운전자들에게 장시간, 저임금 운영을 강요하고 있고, 미숙련, 임시직, 무자격 기사도 다수 사용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세버스 교통사고는 2008년 6,309건에서 2012년 13,972건으로 폭증했다. 5년 사이에 2배 이상이 증가한 셈이다. 이로 인해 지난 5년간 311명이 사망하고, 57,8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화물운송업도 달리는 시한폭탄과 같다. 화물차 교통사고는 연 평균 3만 건에 달하며, 사망사고 발생건수도 1만 1,125명에 이른다. 지입제와 다단계 하청으로 화물운전기사들이 장시간 노동과 과적, 과속,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탓이다. 택시운송업에서도 사납금 제도와 도급제 확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으로 안전사고가 빈번하다. 연간 2만 5천 여 건의 사고로 3만 5천 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안전업무에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안전’보다는 ‘비용절감’에 시선이 쏠려 있다. 안전업무에 비정규직을 제한하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논의 시작점에서부터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다. 김혜진 정책팀장은 “안전업무 정규직화 이야기가 나오면, 무엇이 안전업무에 해당하느냐로 논란이 벌어진다. 누가 봐도 안전업무에 해당하는 업무에 대해서도 정부는 ‘안전업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더 심각한 것은 정부의 정책이 ‘안전산업 발전’에만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안전도 돈벌이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