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10월 10일, 서해 페리호 침몰 사고로 294명이 사망했다. 법원은 사고 책임의 90%가 국가에 있다고 판결했다. 1년 뒤인 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참사고 32명이 사망했고, 사흘 뒤에는 충북 단양군 충주5호 엔진 과열 화제로 29명이 사망했다. 다음해인 95년 4월, 대구지하철 1호선 공사장 가스폭발사고로 101명이 사망, 두 달 뒤 6월에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502명이 사망했다. 97년에는 KAL기 추락사고로 229명이 사망했고, 99년에는 경기 화성군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참사로 23명이 사망했다. 세달 뒤, 인천 호프집 화재 사고로 56명이 목숨을 잃었다.
20세기 대형 참사의 공포는 21세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2003년 2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로 192명이 사망했으며, 2007년 2월에는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로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8년 1월 이천 냉동창고 화재참사로 40명이 사망, 2013년 7월에는 태안 해병대캠프 참사로 5명이 사망했다. 2014년 2월에도 마우나리조트 붕괴로 10명이 사망했고, 두 달 뒤인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됐다. 세월호 참사 한 달 뒤인 5월에는 고양터미널 화재로 8명이 사망했고, 5월에는 장성효사랑나눔병원 화재로 21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2월, 오룡호 침몰로 53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족이 수 천 명입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재난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달라는 거예요.” 2년 전, 태안 해병대캠프 참사로 아들을 잃은 이후식 씨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렸다. 세월호 참사 1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고, 배,보상 문제로 여론몰이를 하는 정부에 화가 단단히 난 듯 했다.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최근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며 함께 눈물을 삼키곤 한다. 비슷한 사건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생겨날 때마다 아물지 않은 상처는 더욱 곪아만 간다.
세월호 참사 1년. 유족들이 다시 거리로 나왔다. 사건이 꽤 잊혔다고 생각했는지 공권력의 대응도 달라졌다. 유족을 향해 캡사이신을 살포하고 연행도 불사한다. ‘어떻게 1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을까요?’ 질문은 넘치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다. 정부는 마치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놓은 듯 늘 똑같이 사건을 은폐하고 꼬리를 자른다. 여론이 잠잠해질 때쯤에는 유족을 반사회적 인간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참사를 경험했던 수많은 유족들은 세월호 참사를 보며 기시감을 느낀다. 수 년이 지나도 아직 참사와 싸우고 있는 유족들. 그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참사 유족 두 번 죽이는 정부, ‘고소’까지
‘진상규명’ 요구 싸움 뒤에는 고통스런 트라우마 뒤따라
2003년 2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발생했다. 192명이 목숨을 잃은 대형 참사였다. 12년 후인 2015년 현재. 유족들은 아직도 지자체와 싸움을 진행 중이다. 4년 전, 추모공원 설립 과정에서 대구시가 유족들을 ‘유골 불법 암매장’으로 형사고소한 까닭이다. 법원은 유족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고, 마음을 다친 유족들은 명예훼손과 무고, 위증죄로 공무원들을 고소했다.
“2005년에 대구시에서 수목장을 해주겠다며 먼저 제안을 했습니다. 이견이 있었지만 유족들은 받아들였고요. 웃기는 것은 시가 당분간 비밀로 이면합의를 하자고 했어요.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겠대요. 유족들은 믿었죠. 그리고 2009년 (팔공산 시민안전테마파크에) 수목장을 했는데, 2010년 대구시가 유족을 불법 암매장으로 매도하며 고소를 했어요” 유족 윤석기 씨(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원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유족대표 3명에게 벌금형이 선고됐지만, 항소심에서 대법원은 유족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유족들은 해당 공무원들을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했다.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되는 4월 16일에는 대구 지하철 유족들의 항소심 재판이 예정돼 있다.
2013년 7월, 태안 해병대캠프 참사로 아들을 잃은 이후식 씨. 그는 지난해 11월까지 청와대 앞에서 1년 넘게 1인 시위를 해 왔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이 씨의 요구는 세월호 유족들의 요구와 같았다. “태안 참사를 이대로 덮으면 분명히 대형 참사가 일어날 것이라 수도 없이 외쳤습니다. 청와대 앞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지만 귀담아 듣는 분은 없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참사 2주기예요. 저희 문제도 아직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입니다”
태안 해병대캠프 참사 직후, 정부는 유족들에게 이 같은 안타까운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진상규명과 대책을 약속했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시간이 흘러 사건이 잊히기만을 기다렸다. 사건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응은 무대응이었다. 2011년 춘천 인하대 봉사활동 참사 유족들도 춘천시를 상대로 1년 넘게 싸움을 벌여왔다. 유족 정경원 씨는 “책임회피가 기본입니다. 처리 과정에서 책임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법대로 하라고 했어요. 대응조차 하지 않았고요”라고 말했다.
가족을 잃은 고통을 미처 치유하지 못한 채, 억울함과 분노만 켜켜이 쌓여간다. 1년 넘게 정부와 싸움을 벌여온 이후식 씨 부부. 그들에게 뒤늦게 참사의 트라우마가 덮쳐왔다. “투쟁을 하다 보니 트라우마를 느끼지 못했는데, 1인 시위를 중단한 뒤부터 몰려왔어요. 그냥 늘 눈물이 흘러요. 집사람도 잠을 못자요. 저를 쫓아다닐 때는 괜찮았는데,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집사람 혼자 놓고 밖을 돌아다니지 못해요. 얼마 전에 그러더라고요. 베란다 앞에 스무 번도 넘게 섰었는데, 그때마다 남은 딸을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왔다고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정부 상대로 ‘재발방지’ 요구하면 ‘폭도’, ‘빨갱이’로 몰려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싸움은 반사회적 행동으로 낙인찍힌다. 사실과 다른 무분별한 신상 털기가 이뤄지기도 하고, 유족들을 ‘폭도’ 내지는 ‘빨갱이’로 몰아가기도 한다. 지난해 46일간 목숨을 건 단식을 진행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 고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 씨. 보수언론 및 단체들은 그가 딸 양육비조차 내지 않은 채, ‘귀족스포츠’인 국궁을 즐겼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만들어냈다. 그가 금속노조 조합원이라는 것도 좋은 먹잇감이 됐다. 어느 샌가 그는 종북 좌파인 ‘나쁜 아빠’가 돼 있었다.
[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상처를 추스르지도 못하고 다시 광화문 광장으로 나온 김영오 씨는 온갖 유언비어에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돈 가지고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밝혀내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싸웠지만, 유족을 돈을 더 달라며 생떼나 쓰는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어요. 선동꾼, 종북 빨갱이라고 몰고 갔어요. 저는 위자료도 꼬박꼬박 입금했고, 보수언론의 국궁회비 보도도 사실이 아니예요. 입증 자료까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한 명 매장시켜 놓고 정정 보도를 낸 언론사는 단 한 군데도 없어요. 언론은 나를 나쁜 아빠로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매체를 접하지 못하고 방송보도에만 의존하는 시골에 가면 저는 개새끼기 돼 있어요.”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는 헌법에 적시된 기본권이지만, 왜곡된 사회는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종북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대한민국에 노조 조합원이 몇 십만 명은 족히 넘지 않나요? 저는 정규직이라서 의무적으로 노조에 가입이 됐습니다. 예전에 노조에서 집회에 같이 가자고 여러 번 꼬셨는데, 정말 집회에 나가보고 싶었지만 가질 못했어요. 빚이 많아서 토요일, 일요일 특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집회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 사람한테 빨갱이라며 신상을 터니 어이가 없는 일이죠.”
대구 지하철 유족들은 대구시로부터 고소까지 당했다. 보수의 근거지인 대구지역에서, 유족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폭도가 돼 있었다. 윤석기 씨는 “지역 신문사 사장이 ‘미국 같으면 총 맞을 놈들이다. 경찰은 잡아 가두지 않고 뭐하나’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며 “유족들이 직접 신문사 사장실에 찾아가 2박 3일 동안 점거농성을 하고 사과를 받아냈다”고 설명했다. “언론은 사실 자체를 보도하기보다는 시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집중을 합니다. 경찰과 검찰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 무마시키려 하고요. 대구시가 유족을 ‘불법암매장’으로 매도해, 유족들이 명예훼손 등으로 대구시를 고소했어요. 근데 경찰과 검찰은 절대 수사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진실규명,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뿐”
유족들은 오랜 시간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재발방지를 위해 매달린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안전관련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돼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남은 유족들이 감당해야 하는 구조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간단하다. 다시는 가족이 겪은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것. 그리고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유족들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먼저 떠난 가족이 남기고 간 숙제 같은 것이었다. 99년 경기 화성군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참사로 자녀를 잃은 고석 씨는 한국어린이 안전재단을 만들었다. 그는 “안전관련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다”라며 “참사 당시 희생됐던 아이들이 남기고 간 숙제라고 생각에 활동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출처: 미디어충청 자료사진] |
대구지하철 참사 유족 윤석기 씨도 안전한 지하철 운영을 위해 다방면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일본에 방문해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유족들과 만남을 가졌다. 지난 2005년 4월 일본에서는 106명의 승객이 사망한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가 발생했고, 유족들은 올해로 10년째 기업 책임을 묻기 위한 법적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윤 씨는 그곳에서 서로의 활동들을 공유하고 아픔을 위로했다.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의 잘못은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그것은 참사의 본질이 아닙니다. 대구지하철 참사 역시 방화범이 불을 지른 잘못은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야 정상입니다. 그것이 시민이 원하는 안전한 지하철이죠. 1년 후에 홍콩 지하철에서 똑같은 방화 시도가 있었는데 전동차가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위험한 시도가 있었을 때 참사로 이어지지 않는 안전기준과 제도, 안전한 전동차를 만드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점입니다.”
국민안전처는 지난달 말,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을 발표하고 재난안전관리체계의 밑그림을 마련했다고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참사 유족들은 정부 정책을 보며 헛웃음만 짓는다. “내용이 마치 구름 같아요. 손에 잡히는 내용이 없습니다. 마치 각자 개인한테 모든 것을 감수하라는 허황된, 수박 겉핥기 식 정책 이예요. 이런 탁상행정이 당장은 국민에게 먹힐 수 있을지 모르지만 또 다른 참사가 발생하면 불신은 극에 달할 겁니다.” 이후식 씨는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에 큰 실망을 한 것 같았다. 진상규명 없이 마련된 안전대책은 유족들에게 공자님 말씀일 뿐이다. “세월호 유족들이 인양을 요구하는 것도 사고의 근본적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진실과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지침서든 뭐든 나올 것 아닙니까. 원인을 감추면 어떠한 안전지침서도 나올 수 없어요.”
김영오 씨가 다시 광화문 거리로 나온 이유도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해서다. “세월호 특조위에는 정치적 개입이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시행령을 통해 특별법을 여당으로 가져가려 하고 있어요. 진상조사를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정부가 밝혀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시행령은 처음부터 재조사도 하지 못하도록 막아놨어요. 시행령을 폐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멈추게 될 겁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싸움이지만 그는 5년이고 10년이고 그만둘 생각이 없다고 했다. 아침저녁 쌀쌀한 바람이 부는 탓에 건강을 염려하자 그가 단호한 목소리를 낸다.
“몸이 아픈 게 뭐가 중요한가요. 자식이 죽었는데요. 그동안 유민이한테 많이 못해줬어요. 돈이 없어서 맛있는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못 사줬어요. 지금 와서 그게 너무 미안합니다. 진실을 밝히고 안전사회를 만드는 것은 유민이가 마지막으로 저에게 남긴 숙제입니다. 그 숙제를 위해서 이제 내 몸이 어떻게 된대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