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둔 3월 4일 정오, 당시 국회 의원회관 이정희 통합진보당 의원실에서 민주노동당 시절 서울시장 후보로까지 나섰던 C 예비후보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C 후보는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민주당)의 야권연대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던 상황에서 자신이 야권연대 후보로 선정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C 후보와 통합진보당 수도권 비주류 중진 지역구 후보들 10여 명은 이정희, 심상정, 유시민 공동대표를 찾아가 강하게 항의했다. 지역구에서 그냥 양보 사퇴로 주저앉는 게 아니라 제1야당 후보들과 경선이라도 치르게 해달라고 했다. 당시 민주당은 ‘비야권연대 양보 지역 통합진보당 후보 전원 사퇴’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인의 공동대표들이 모인 것은 오후 2시에 한명숙 대표를 만나 야권연대 협상안을 최종 조율하고 4시 발표를 위해 사전 회동을 한 것이었다. 애초 3인 회동 장소는 국회 본관 의정지원단 회의실이었지만 비주류 중진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이정희 의원실로 피신한 셈이었다. 수도권 지역 출마 중진들이 이정희 의원실에 들어가려 하자 보좌관들이 막았다.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비주류 중진들은 3인 공동대표에게 “비야권연대 양보 지역에서 경선도 없는 것으로 물밑 합의하면 지역구 후보자들은 총사퇴하라는 것이냐”고 따졌다. 한 참석자는 3인 대표들에게 욕을 하기도 했다.
C 후보는 “당 창당 공신들이 여기에 다 와 있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접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비주류 중진 후보들의 항의에 심상정, 유시민 대표는 무조건 양보가 아니라 경선을 치르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4시로 예정된 야권연대 협상안은 발표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종 야권연대 협상 결과는 이들에게 참담한 결과였다. 성남 중원 등 통합진보당이 양보받은 지역은 대부분 당권파 핵심 지역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ARS 여론조사로 경선을 벌여야 했다. 오랜 지역 활동과 몇 차례 지역구 출마 경험으로 나름 조직력과 인지도에서 자신이 있었던 비주류 중진들은 최소한 여론조사+국민경선을 기대했던 터였다. ARS에 들어가는 후보 경력부터 게임이 안 되기 때문에 국민경선이 포함돼야 그나마 해볼 만 했다. 이정희, 노회찬, 심상정, 천호선 같은 이름이 알려진 대표급 후보들에게는 유리했다. 결과는 대부분 후보의 패배. C 후보는 이후 통합진보당이 내홍을 겪는 과정에서 탈당하고 새정치연합으로 갔다.
야권연대는 지역구 후보 단일화뿐 아니라 비례경선 부정이라는 초유의 상황에도 영향을 미쳤다. 진보대통합에 이은 야권연대 상승효과는 잘만하면 비례후보 당선권에 안착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높였다. 비정규직은 5천 원만 내면 당권을 얻을 수 있었고, 노동조합 집단가입을 통한 조직관리가 횡행했다. 진보정당의 자랑거리였던 진성당원제는 정파의 피라미드식 조직관리 모델로 전락했고, 국민참여당계의 한 후보는 인터넷 투표 기술 조작도 했다.
야권연대 수렁엔 민주노총 출신 노동자 후보들도 빠져들었다. 비례 후보자들이 속한 산별노조(연맹)는 당원 배가라는 이름으로 수천 명 집단가입 기자회견과 정책 협약식을 이어갔고, 결국 조직적 표 동원으로 민주노총 산하 조직마저 비례경선 부정 수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통합진보당에선 수도권과 부산, 울산, 경남 등에서 야권연대 후보만 되면 당선은 보장됐다는 말이 떠다녔다. 이렇게 19대 총선 야권연대는 정치적 욕망의 분출구였다. 그 전에 진행된 경기교육감 선거 등에서 제1야당까지 포괄한 야권 단일후보가 되면 굳이 제1야당 출신이 아니어도 당선은 확실시 된 점이 학습효과로 나타난 것이다.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은 야권연대 상승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선거 운동복 색깔 맞춤으로 개나리-진달래 유세단도 만들었다. 첫 합동유세는 양당 지도부와 주요후보들이 총출동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시절 이어온 끈적끈적한 세를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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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반MB 야권연대 뒤로 밀려난 혁신
자기 정파 챙기기로 변질한 공천 과정
야권연대의 주요 고리는 반MB-새누리당 심판이었다. 대통령에 대한 반대와 여당 심판론은 대안 사회의 상을 말하거나 정책적 아젠다를 선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반MB 정서에 기대고, 여당의 실책을 선전하는 네거티브를 기본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아젠다는 사라지고 진보가 말해야 할 체제 도전적인 공약은 무상 복지나 경제민주화로 대체되고 있었다.
선거 패배를 각오한 새누리당은 당명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혁신 이미지로 포장했고 대중적 성공을 이뤘다. 이준석 같은 청년 정치인을 발굴하고 박근혜 대통령 후보에 대한 과감한 정치적 비판을 할 날개를 달아줬다. 어진 정치인이 대통령 후보 비판도 자유롭게 하게 놔둔 새누리당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언론.정치사상의 자유가 더는 후퇴하지 않을 것이란 착시를 일으킬 만큼 영악했다. 정책적으로는 야당이 제기한 경제민주화 담론을 선도하며 야권과 정책적 변별력을 없앴다.
새누리당의 혁신 쇼는 19대 총선 초기 경제민주화, 반값 등록금, 복지 문제에서 단순히 누가 재원을 더 마련하느냐의 차이로 만들었고, 진보정치는 빈곤과 비정규직, 정리해고를 낳는 근본적인 사회시스템 변화에 대해서 건드리지 못했다. 경제민주화 논쟁은 민주노동당이 15년 전부터 외쳐온 재벌체제 해체에서 후퇴해 적당한 재벌 규제는 필요하다는 선에서 멈췄다. 야권연대 장막에 둘러싸여 다른 아젠다를 만들지 못한 것이다.
새누리당이 야권연대에 맞서 혁신 쇼를 진행하는 동안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은 ‘야권연대=당선’이라는 환상에 빠져 자기 혁신보다는 자기 정파(계파) 후보 만들기에만 골몰했다. 민주당은 공천과정에서 사무총장이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통합진보당에선 야권 단일 후보 성추행 전력이 드러났지만 침묵으로 일관하다 여론이 악화하자 뒤늦게 사퇴로 가닥을 잡았다. 이정희 전 대표의 관악을 야권연대 경선에서 전화여론 조작 의혹이 나온 것도 전체 야권의 도덕성을 흔드는 계기로 작동했다. 당시 통합진보당 당권파들이 가장 많던 경기도당의 한 정치행사에선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한 후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다양한 공직 진출을 대비하자는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지역구를 다져왔지만 ARS 경선에서 패배한 한 인사는 “야권연대가 묻지 마 반 새누리당 투표라 누가 후보가 돼도 당선되는 상황이었다. 어느 후보가 더 경쟁력이 있는가를 가리는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통상 민주노동당 후보 지지율 5-10%는 사표 심리와 빨갱이 소리를 들으면서 지역 활동에 몸 바쳐 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야권연대는 지역에서 생활정치를 열심히 하면 원내로 진출할 수 있다는 얘기를 뻥으로 만들어 버렸다”며 “새누리당이나 민주당 공천을 받으면 5%에서 3% 차이로 승부가 난다. 나머지는 후보 경쟁력 문제인데, 생활정치를 안 해도 야권 단일후보만 되면 무조건 근접치 5%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결국 야권연대는 진보정당의 의석점유율을 높이는 데는 필수적인 측면이 됐지만, 알고도 마셔야 하는 독배 같았다. 대중이 보기에 민주당과 진보정당 사이에 차이점을 구별하기가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당은 진보정치와 거의 한 몸으로 총선을 마친 후에 본격적으로 자신을 진보세력으로 당당히 호명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체제나 재벌의 소유 질서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 진보정당을 향해 민주당과 빅텐트로 합치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상할 리가 전혀 없게 됐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가치연대는 사라지고, 선거 이후 종이 쪼가리가 된 야권 정책합의서
선거 공학적으로만 보면 야당은 야권연대를 발판으로 하지 않고서 이기기 어려운 상황인 것은 맞다. 2008년 총선에서 야권난립으로 야권 대패와 진보정당 축소를 경험했기 때문에 야권 후보 단일화는 의회주의 정당이 포기할 수 없는 단기 목표일 수밖에 없다. 이 단기적 목표를 위해 진보정당은 야권연대 초기 가치연대라는 이름으로 민주당의 정책을 진보적으로 견인하려고 노력했다. 지난한 정책연합부터 돌입한 것도 그런 정치적 명분과 진보적 가치를 잃지 않으려는 일환이었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는 최근 <참세상>과 통화에서 당시 야권 정책협약에 대해 “시간에 밀려서 진정성이나 무게가 실리지 못했다”며 “그러다 보니 선거 끝나고 종이 쪼가리가 됐다”고 평가했다. 박석운 대표는 2010년 이후 다양한 선거에서 시민사회 야권연대 협상 중재자로 참석해 왔다. 실제 민주당은 야권연대 논의를 위한 야3당 공동행보 과정에서도 한- EU FTA 비준동의를 합의하고, 노동 문제에 대해서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박석운 대표는 “야권연대 후보만 되면 당선 된다는 분위기가 생기자 야권연대 경선과 공천 과정에서 이런저런 불협화음들이 쏟아져 나왔다”며 “시너지를 일으키는 대중의 참여 같은 것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노동당의 한 지역당협 위원장도 “묻지만 야권연대가 진보정치의 대리주의화를 심화시키고 있다”며 “요즘은 정책(연합) 문제는 아예 안 나오고 그냥 여론조사로 끝내버리고 있다. 무엇을 위한 어떤 야권연대인지 양해와 설득과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 2012년 통합진보당 총선 결과 발표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야권연대의 또 다른 독, 노동자 정치세력화 혼란
야권연대가 낳은 또 다른 문제는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혼란을 주는 데 있었다. 2012년 총선과 대선 야권연대를 염두에 둔 야당 공동행보 속에서 2011년 5월 1일 민주노총 노동절 노동자대회에 단상에 민주당 내에서도 중도 우파적 스펙트럼을 보이는 손학규 당시 대표가 나와 공식 발언을 했다. 손학규 대표는 “4.27 재보궐 선거를 통해 국민의 뜻이 확인됐다”며 “노동자의 권익이 보장되고 노동조합이 사회발전에 적극 참여하고 기여하는 사회를 여러분과 저 손학규, 우리 민주당, 민주진보진영이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 2011년 노동절 대회 단상에 오른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출처: 참세상] |
이는 민주노총 정치방침인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배타적 지지가 담고 있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침과 사실상 모순됐다. 배타적 지지는 취약한 노동자 정치의식 속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보수 정당보다는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만을 지지할 수 있게 해 경쟁력을 키우자는 취지였다. 이런 취지 때문에 배타적 지지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실천하고 있는 진보신당(노동당)이나 계급정당 추진 세력에 대한 공조직적 지원도 원칙적으로 배제한다는 논란을 낳았다. 그런 상황에서 손학규 대표가 노동절 단상에 오른 것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근본 취지가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졌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혼란은 민주노총이 보수 야당인 민주당과 최초로 총선 정책 협약식을 하면서 더욱 커졌다. 2011년 4월 8일 오전 민주노총과 민주당이 정책 협약식을 한 직후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한명숙 민주당 대표와 함께 민주당 후보 집중 유세 지원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한명숙 대표는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여기 함께 계신다. 민주노총과 민주당은 함께 정책 협약을 했다”며 “야권이 단결해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를 이뤄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이 함께 민주진보정권을 마련해 서민의 꿈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이날 박선숙 민주당 선거대책본부장은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민주당 6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양대노총과 함께 이번 선거를 치른다”며 “노동계가 똘똘 뭉쳐 민주당 후보와 야권단일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접전지에서 노동계의 전폭적인 지원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김영훈 위원장이 한명숙 대표와 기호 2번을 찍으라는 지지유세를 다닌 것은 조합원에게 혼란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도 민주노총의 동지로 인식되면서 더는 민주당 공개적 지지가 민주노총에서 금기가 아닌 상황이 됐다. 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당시 “노동자 국회의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에서 시작된 독자적 정치세력화 열망은, 민주노동당을 잉태했지만 의회진출을 위한 야권연대의 장막에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길은 다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 민주당과 민주노총 역사상 최초로 민주노총 위원장이 민주당 야권단일 후보 지지 유세를 함께 했다. [출처: 참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