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떠오른 재벌개혁의 화두
요즘 다시 재벌개혁이 화두로 떠올랐다. 올 봄부터 700조 원이 넘는 사내유보금 논란과 대한항공 땅콩회항사건, 삼성물산 합병사태, 롯데경영권 분쟁 등,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대중적으로 하여금 재벌독식체제와 비정상적인 지배구조에 대해 공분을 일으키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악덕재벌을 다룬 영화 <베테랑>이 천만 관객몰이를 하면서 재벌개혁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청년일자리 창출과 불황 극복을 위해 ‘노동개혁’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고 있는데, 이에 맞서 야당을 비롯하여 노조 및 여러 운동단체들이 “노동개혁보다 재벌개혁이 먼저”라고 주장하면서 재벌개혁 논쟁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박영선 재벌개혁특별위원장은 “재벌 개혁, 청년들 희망 위해서라도 밀어 붙이겠다”고 선언했다. 새민련 재벌개혁 특위가 설정한 4대 개혁 대상은 순환출자 및 지주회사 통한 문어발식 경영, 총수 전횡 방조하는 전근대적 경영, 일감 몰아주기, 조세감면 및 특혜 사면 등이다. 제도권 정당이 아닌 시민단체에서도 올 여름부터 재벌의 사내유보금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재벌독식체제를 전환시키기 위한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계급정당운동에서도 사내유보금 환수운동본부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렇게 각계각층에서 전개되는 재벌개혁 논쟁은 아마도 하반기 노동개혁 논쟁과 함께 주요한 사회적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온도차인가, 시각차인가
그런데 그 내용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재벌개혁의 과제와 목표는 여러 색깔을 띠고 있다. 재벌의 시장독점과 지배 구조 문제를 지적하는 시각에서는 공평한 시장경제 육성과 순환출자 해소를 주된 목표로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제도권 정당들이 이와 비슷한데, 새정련 김기식 의원은 “2, 3세 승계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업 가치의 훼손을 막지 못하면 재벌뿐 아니라 한국 경제에도 심각한 위협이 닥치게 된다”며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 재벌을 죽이자는 게 아니라 더욱 발전할 수 있게 개혁해야 한다는 게 당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런 시각은 기존의 ‘재벌타협론’ 및 ‘주주행동주의’의 논쟁과 맥이 닿아있기도 하다. 재벌의 지배구조는 보장해주고 재벌의 이익을 공유하도록 하자는 입장과 올바른 ‘주주행동주의’의 실현으로 내부통제를 통해 재벌의 불법적인 경영권 승계를 막자는 입장이 한때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과다한 사내유보금 문제를 지적하는 시각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재벌이 벌어들인 독점이윤에 대한 재분배가 재벌개혁의 새로운 화두로 확산되고 있다. 예전 부자증세 논쟁에서 자주 등장했던 법인세 인상이 재벌의 당기이익에 대한 과세를 겨냥한 것이었다면, 사내유보금 환수는 세후 재벌 곳간에 쌓여 있는 현금성 자산뿐만 아니라 재벌이 점유하고 있는 실물자산에 대한 재분배를 함께 겨누고 있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특별과세나 기금 설립 등이 거론된다. 그리하여 이 재분배된 재원으로 청년고용과 최저임금 및 부족한 복지재정에 활용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 목소리는 야당과 운동진영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작년에 취임한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필두로 정부에서도 2015년 세법개정을 통해 기업소득환류를 위한 세제개편을 시행했다. 물론 재벌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많아서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의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는 아니다.
이렇게 재벌개혁의 화두 속에는 다양한 시각차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재벌개혁에 대한 공감대는 대중적으로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이윤에 대한 과세가 되었든, 재벌일가의 대주주 지분정리가 되었든, 그들이 독식한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재벌개혁에 대한 백가쟁명식의 논쟁이 있지만, 한편 이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재벌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래서 재벌개혁의 이유는 단지 공평성의 문제에만 있지 않다. 경제적 궁핍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탈출구를 찾기 위해 발버둥치는 대중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여당대표 입에서 ‘재벌개혁’과 ‘사내유보금’이라는 말이 립서비스 차원에서라도 오르내리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온도차이든, 시각차이든 경제적 궁핍의 해법이 재벌로 모아지고 있다. 그들이 가진 걸 스스로 내놓게 하든, 혹은 빼앗든, 재벌 독점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 이외엔 답이 없는 상황에 있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 지고 있는 것이다.
불황의 시대, 모든 건 재벌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불황의 시대에 대해서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재벌의 경제독점이 하루 이틀 지난 문제가 아님에도, 지금 다시 재벌문제가 화두로 떠오르는 건, 우리가 겪고 있는 불황의 모습이 매우 치명적인 경향으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산업순환의 불황국면 수준이 아니라 한 세대의 재생산이 위협받을 정도로 불황이 장기화되고 깊어지고 있다.
이미 주류 언론들에선 이런 현상을 ‘저성장체제’, ‘뉴노멀(new normal)’로 표현하면서 묵시록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화(japanification)’라 불리는 담론이 그러하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빗대어 일본식 장기불황을 우리도 겪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가장 대표적인 원인으로 ‘저출산-고령화’ 담론에서 말하는 생산가능인구의 구조변화를 지목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근본적인 시장구조개혁”, “내수수요증대” 등이 제기되며, 이는 ‘신성장담론’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저출산-고령화’는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생산가능인구의 감소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청년실업 10%라는 현실은 서로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조합이다. ‘저출산-고령화’로 노동력 부족을 선전하지만, 한쪽에선 노동력 과잉으로 발생하는 실업의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해고요건 완화’ 등으로 기업의 투자여력을 높이겠다는 정책만이 제시되고 있다. 대부분 기존의 ‘규제완화’와 ‘투자활성화’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 불안정한 고용과 생활임금의 하락이 십 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정부와 재벌이 강조하는 노동개혁이 대중들의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다시 재벌에게 눈을 돌린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도 자신의 경제정책 실현을 위해 재벌회장들과의 조찬회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명박 정권 시기 평창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1인 특별사면’을 해주기도 했다. 왜냐하면 평창올림픽 유치로 인한 경제유발 효과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그런 경제유발 효과와 경제이득이라는 것은 모든 상황이 잘 될 것이라는 가정 속에서 산출한 희망가격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것이 미실현된 가치라는 것을 알지만, 과거 고성장의 기억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받아들인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보란 듯이 여론의 반발을 뒤로 하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사면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에선 재벌중심의 체제를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그것을 함께 만든 공범이었음을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독식에 대해 언제나 부당함을 지적했지만, 다른 한편에선 그들의 수출성과와 GDP성장률을 양팔저울에 올려놓고 득실을 따졌던 것이다. 이처럼 재벌들은 새로운 성장과 먹거리를 갈망하는 주체들의 희망을 먹고 자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불황의 시대, 그들이 더 이상 투자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볼멘소리를 해도 그들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계속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재벌은 과거와 현재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도 가지고 있다.
재벌사회화를 다시 생각한다
불황이 깊어지는 오늘의 상황에서 법인세 인상이나 부자증세와 같은 세금문제가 되었든, 주주자본주의의 확립과 같은 지배구조의 개선이 되었든, 사내유보금 환수가 되었든, 최저임금 인상이 되었든, 심지어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의 국가지원에 대해서든, 기본소득 관련한 논의에서든, 그 무엇이든 재벌의 독점이윤을 배제한 채 이야기 될 순 없다. 이 모든 것은 독점이윤의 분배 방식을 놓고 서로 다른 방법들을 주고받을 뿐이다. 바야흐로 독점이윤의 분배를 위한 '투쟁'의 국면에 서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벌의 독점이윤이라는 것은 단지 그들의 회계장부에 기록되어 있는 숫자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생산시스템 전체를 말한다. 그 시스템이 없이는 그들의 독점이윤은 창출될 수 없다. 그리고 ‘사회화’라는 의미는 말 그대로 개인이 알아서 그냥 하는 무엇이 아니라 ‘집합적 관계를 통해 뭔가 나를 비롯한 타인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사회와 관계 맺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벌의 독점이윤을 사회화한다는 것은 우리사회의 생산체제를 집합적 관계를 통해 사회와 관계 맺도록 만드는 것일 테다. 결국 문제는 재벌의 소유지배권의 괴리, 즉 대규모 사회적 자본으로 구성된 재벌을 총수 일가 또는 대주주(혹은 주주)가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바로 그 150년 전의 ‘원초적 모순’에 대해 끊임없는 갈등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재벌개혁의 화두는 재벌타협론이나 재벌해체론으로만 귀결될 수 없다. 재벌의 지배구조를 보장해주는 대가로 그들이 써준 투자와 고용이라는 약속어음만을 기약 없이 들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며, 이미 고도화된 그들의 생산체제를 다시 조각조각 쪼개서 시장질서에 재편입시킬 이유도 없다.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조직하기 위해선 생산의 토대를 민주적으로 사회화시키는 것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래서 재벌사회화는 단지 그들의 이윤을 재분배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또한 소유구조를 바꾸는 것에만 있지도 않다. 중요한 건 사회화된 생산의 토대를 바탕으로 미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설계할 것인가이다.
지금 당장 제기되고 있는 대중들의 요구는 복지재원과 고용기금 마련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그것을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회의 재생산구조를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계획가들에 의한 우파적 관리체제로 귀결될지, 아니면 기층대중들이 운영하는 실질적인 민주체제로 귀결될지, 재벌개혁으로 시작된 재벌사회화의 화두는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참세상연구소(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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