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교훈과 좌파정치

[진보논평] 새로운 좌파정치를 시작하자

“자기 혁신과 반성 없이 노동계급은 자신을 구조화하고 기능적으로 분할하고 지배하는 생산수단을 장악할 수 없다. 만약 그 생산수단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장악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동일한 지배체제를 재생산하고 말 것이다.”(앙드레 고르)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멘붕’ 중이란다. 심지어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은 이번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정짓고 그 증거를 모으기 위해 카톡, 아고라 등에서 수사대로 맹활약 중이다. 문재인을 지지하는 대중이 멘붕에 빠진 것은 그만큼 절망과 상심이 컸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 박근혜 당선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초박빙 상태에서 그것도 3.53% 차이로 졌으니 오죽하랴.

그래서 이번 대선이 예년과 다르게 그 후유증이 대단히 오래 간다. 따라서 선거 결과를 놓고 매우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평가가 다면적이든 입체적이든 실용적이든 특별히 의미있다고 할 만한 것도 또한 의미없다고 할 만한 것도 많지 않다. 다들 나름 할 얘기가 많고 분석하는 준거가 다르기 때문인데, 깊이나 수준이 낮고 비과학적이라고 해서 굳이 평가절하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소위 전문가들의 평론이나 유권자들의 선택은 항상 이성과 감성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또한 멘붕에 빠진 대중 모두가 그냥 소박한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절망감과 분노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시민사회가 적대적으로 양분될 것이다. 일촉즉발의 대치상태 속에서, 강한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팽팽한 긴장이 벌써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주지해야 할 사실이 있다. 부르주아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과 돈이다. 조직기반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가부장적인 낡은 이미지를 연출한 문재인 후보가 전국적 조직과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5년 전부터 준비된 ‘여성’인 박근혜 후보를 상대로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는 것은 대단히 커다란 성과임에 틀림없다. 물론 박근혜가 여성들을 대표할 여성대통령은 아니지만 ‘준비된 여성’ 대통령임에는 틀림없다. 수많은 여성 유권자들이 박근혜에게서 자신의 여성성을 발견하려 했고,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현실적 모순을 박근혜를 통해서 보상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문재인 지지자들의 냉정한 태도가 요구되며, 선거에 대한 냉철하고 엄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 지면에서는 필자의 단순한 느낌만을 피력하고자 한다.

“불안이 불만을 압도했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서 보수세력의 대결집과 지역투표 그리고 보수적 노년층의 증대 및 측은지심의 발동이 박근혜의 당선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러한 분석은 동의하기 어려운 매우 평범한 수준의 분석이다. 오히려 변죽만 울리면서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할 요량이다. 언제는 안 그랬나. 보수세력은 항상 결집력이 높았다. 특별히 이번에 더 높았던 것은 새누리당 때문이 아니라 민주통합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연대가 주요 요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페친이 이번 선거 결과를 "불안이 불만을 압도했다", "불신이 불안을 증폭했다"고 분석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역대 대선은 대부분 야권단일화를 기본 원칙으로 해서 치르는 것이 하나의 명제였다. 하지만 이번 대선의 야권단일화는 지금은 실종된 진보세력이 함께 하면서 과거와 다른 지형을 만든 것이다. 자유주의 세력이 보수주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진보세력과 연합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진보정당이 올바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을 때 유효하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 그런데 과거의 ‘비판적 지지세력’이 이번에는 통진당과 진보정의당이라는 대중적 지지가 허약한 개량화된 정당으로 재구성되어 나타나 민주노총 등과 함께 노동자계급을 배신하고 낡은 야권연대의 틀에 갇혀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들의 노동자계급 배신은 배신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이 가야할 길을 제대로 찾은 것 같다. 그 동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며 친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느라 꽤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권단일화가 만능보검인양 착각했다는 지난 4.11총선의 교훈을 무시하거나 간과했다는 것이 이번 선거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방송토론회에서 이정희 후보에게 속시원하다고 칭찬해 마지않던 유권자들 중 일부와 이정희 후보에게 버릇없다고 막말을 해대는 다수의 중장년층 유권자들이 박근혜 후보를 선택한 현실을 보라. 유신체제를 경험한 세대의 이러한 감정적 공명은 권위주의적 사회질서에 몸이 적응돼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권위에 대한 이들의 익숙한 ‘복종’은 이성의 마비가 아니라 역사인식의 빈약함과 같은 것이다. 민심은 이런 거다. 그런데 이 보다도 통진당의 구애에 대한 민주통합당의 어중간한 태도는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민주당이 진보정의당과는 손을 잡으면서 통진당과는 연합을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기대를 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선거 직후 이정희에게 선거 패배의 책임을 묻는 작태는 한심한 지경이다. 물론 이정희의 토론회 태도가 의도하지 않았던 보수결집의 원인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는 당연히 통진당으로 하여금 본질적인 반성을 요구하였지만, 따지고 보면 보수대결집 때문에 민주개혁세력의 대결집 효과가 나타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민주통합당은 박빙의 승부를 만들어 준 대중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민심은 이런 거다.

지역투표는 습관처럼 반복됐던 것이기 때문에 변수가 아니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영호남 출신의 서울 사람들이 영호남을 볼모로, 들러리로 내몰면서 사회를 운영하는 중앙집권체제이다. 영호남에 속하지 않는 지역의 주민들은 일견 자유로운 듯 보였지만 실제 양측의 싸움에 의해 오히려 소외당하거나 상처를 쉽게 받아온 것이다. 그래서 이들 지역을 장악하는 세력이 권력을 획득한다는 속설이 등장한 것이고, 지난 4.11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강원과 충청을 석권할 때도 예정된 것이었다. 오히려 지역연합을 내세운 문재인 후보가 지역투표에 대한 정책적 대안이나 고려없이 지역주의의 덫에 걸렸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그것은 유권자들이 지역을 매개로 선택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두 개의 보수주의 정당 중에서 하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정치에서 유권자들은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에 불과하다. 대중이 주체가 되어 다양한 정책이나 이념을 생산해서 선택의 폭을 넓히고 선택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하는데, 대중은 대상화되어 정치사회가 생산한 좁은 선택을 강제당한 것이다. 이번 대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통합당 패배의 가장 근본적 원인 중 하나로 중장년층의 보수화를 꼽고 있다. 50대 유권자의 89.9%의 투표율과 62.5%의 박근혜 지지에 대한 출구조사 결과에 대한 신뢰성여부를 떠나서 중장년층의 보수화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이들의 보수화가 문제가 아니라 민주통합당이 여전히 보수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현실정치는 대중과의 관계와 동의가 핵심이다. 민주통합당이 이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뒤돌아보면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민주통합당에서 근본적인 정치혁신은 고사하고 노무현 정권의 실책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반성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민주통합당이 이들로부터 정치적 동의를 얻기 위해 한 것이 거의 없다. 지난 10년 동안 민주당 세력이 집권했을 때,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 개혁, 언론개혁, 재벌개혁 등 그 어떤 현안문제에 대해서도 이룬 성과가 전혀 없다.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노동자들이 송전탑에 올라가서 고공농성을 하게 된 것도, 비정규직이 증가한 것도, 편파방송이 일상화된 것도, 청년실업이 만연된 것도, 자살률이 높아진 것도, 표현의 자유가 훼손당한 것도 그 원인은 모두 민주당 세력에게 있다. 이렇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 놓고 단 한마디의 사과로 모든 것을 털어버리겠다는 얄팍한 생각은 정치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무책임하다. 그러니 중장년층의 표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민심은 그런 거다.

유신시대,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기억

게다가 민주당은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박근혜를 낙선시키는 것이 역사적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공포심을 조장하여 대중을 멘붕에 빠뜨렸다. 아무런 근거 없이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 과거의 철권통치, 유사파시즘, 국가주의, 전체주의가 등장할 것이라는 루머를 날리면서 혹세무민하였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지금은 유신시대와는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보고만 있을 대중이 아니다.

선거에서 대중은 자신들의 마음 가는 대로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이미지일 수 있고, 기억일수도 있고, 정책이나 이념일 수도 있다. 유신시대를 경험한 세대라고 해서 동일한 문제의식과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필자의 경우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아침 일찍 새마을 노래 때문에 잠을 설친 더러운 기억밖에 없지만 누군가는 국민교육헌장과 새마을운동을 매개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고 자신과 국가를 일치시키는 아름다운 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그들이 받았던 이데올로기 교육은 평생 자신들의 인생을 규정짓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박정희는 구국의 영웅이자 자애로운 어버이 같은 존재이다. 여기서 그 누구보다 훌륭한 양친을 총탄에 잃은 딸에 대한 측은지심이 발동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민심은 그런 거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민생’ 즉, ‘먹는 문제’이다. 중장년층이 박근혜를 지지한 것은 단순히 유신에 대한 기억이나 향수, 안보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경제성장만이 선이라는 근대화론의 시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박근혜 지지자들은 이런 약점을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먹는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먹는 문제’의 역사이다. 항상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먹을 것인지 모두 중요하다. 그래서 민심을 살필 때는 먹는 문제를 가장 먼저 살펴야 한다. 부유층이나 빈곤층이나 먹는 것이 넘쳐도 그렇고 부족해도 그렇고, 먹는 문제는 항상 고민스럽다. 따라서 문재인의 민주위기 구호는 국가위기, 경제위기라는 박근혜의 구호를 당해낼 수 없었다. 대중에게 문재인이 말하는 ‘민주’는 권력을 가진 그들만의 권력행사와 권력다툼이지만 박근혜의 경제위기, 국가위기는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위기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는 법과 도덕의 공간이 아니라 실천의 공간이라는 것을 잘 아는 민주당이 대중의 마음을 어떻게 득템할 것인지 진지한 노력이 없었다. 그러니 빈곤층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를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선, ‘경제 대 정치’ 근대 부르주아 국가 전략 되풀이

이번 선거를 2002년과 비교하는 세력들에게는 현실인식이 매우 빈약하다. 이번 선거는 2007년의 '경제 대 정치'라는 익숙한 근대 부르주아 국가의 전략이 되풀이된 현실이었다. 경제 논리로 정치를 억압하는 것이 박근혜의 집권 전략이었다. 그러니 노동 의제가 소멸되고 행복 담론이 민생을 관통하는 전략으로 유효했던 것이다. 하지만 야권연대는 이와 반대로 오로지 정권교체만을 외치면서 정치 논리로 민생을 관통하려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담론은 경제민주화와 복지담론이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면서 누구에게나 ‘먹는 문제’가 체제나 이념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된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개혁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야권연대는 이를 도외시하고 정권교체만 외침으로써 유권자들부터 외면 받은 것이다.

만약 대중이 민주통합당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했다면 이번 선거의 성과는 천부당만부당이다. 박근혜의 당선이 문재인의 당선보다 앞으로의 5년을 힘들게 만들 것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도토리도 키가 다르고, 그 나물의 그 밥도 맛이 다르다. 하지만 본질은 변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가 이번 선거를 양자대결로 몰고 간 것은 커다란 문제이며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시민사회의 명망가들과 학계가 이번 선거를 과도하게 몰아간 책임이 크다. 이른바 원탁회의로 불리는 재야 원로 인사들의 행태는 정치적 과잉이다. 시민사회가 그들에게 대표성을 부여한 적은 없지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나의 상품이 되었을 정도로 공신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운동진영에서의 몰가치적 선택도 책임성있게 자기 평가를 해야 한다. 최소한의 예산 삭감도 이루어지 않았지만 해군기지 건설 중단에 대한 기대감, 문재인의 탈원전 공약으로 인해 앞으로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함 기대감, 공정방송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 등의 조급함은 이해 가능하다. 일상의 절박함으로 문재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것이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다고 해서 송전탑의 쌍차, 현대차 노동자들이 이 땅을 온전히 밟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 땅에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체제를 넘어서야 가능하다는 것이 이제는 보편적인 상식이 됐다. 이를 두고 다른 페친이 “뿌리없는 소시민의 조급성”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와 문재인의 ‘아름다운 동행’은 허상에 불과했고 진보적 정권교체는 실체가 없었다. 한마디로 선거혁명은 고사하고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도 어렵고 정권교체로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는 정치적 환상과 그들의 계급적 기반이 다 드러났다. 선거가 끝난 직후 민주당은 용서하지 말고 변화를 지켜봐달라고 하소연했지만 아직까지 파벌정치만 일삼고 있다. 이런 정당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한국의 선거정치는 내내 죽고 죽이는 전쟁이자 무협지의 강호무림과 같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때문이다. 강호에는 수많은 분파가 난립하기 때문에 강호를 제패하기 위해 수시로 정파연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각자 강호를 제패해서 최고 문파와 최고수로 인정받길 원하지만, 그 과정에서 멸문지화를 당하거나 스스로 폐관하기도 한다. 최고수로 등극하게 되면 제정파들이 무릎을 꿇고 복종을 맹세하지만, 반면에 은둔해있던 고수들이나 신성들의 출현으로 끊임없는 도전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서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공 뿐만 아니라 무공에도 조예가 깊어야 하며, 특히 적을 한방에 제압할 수 있는 필살기를 갖고 있어야 한다. 세대를 넘나드는 역용술에도 능해야 한다. 특히나 초를 다투는 찰나에 이루어지는 일합승부에 능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실력이 허명이 아니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아, 정말 어렵다. 내공과 무공 그리고 필살기와 역용술 등등. 이러한 현실적 조건을 어떻게 갖춰야 하는지 진지한 자기 성찰과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부르주아 선거, 혁명의 기대감을 비웃는 메타포

어떤 선거도 전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선악의 이분법으로 보거나 상대방을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은 기각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박근혜를 선택한 유권자나 그렇지 않은 유권자 모두 ‘국민’의 범주에 속하지만 ‘국민’을 위한 나라는 존재하기 어렵다. 대중은 투표 결과에 따라서 한쪽에서는 절망과 동일시하고 다른 쪽에서는 혁명과 동일시하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부르주아 선거는 혁명에 대한 대중의 기대감을 비웃는 메타포이다.

마르크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벗어나서는 개인이 되지 못하는 문자 그대로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했듯이 인간은 사회의 영향을 벗어난 생산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의 불가피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 중요하다는 점을 입증하지만 인간이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도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좌파에게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

지난 4.11총선 결과 가장 우려스러운 일은 미국식 양당제도가 구조화되어 계급정당과 좌파정치가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발붙일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그것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대중이 더욱 무섭다. 서구에서는 자유주의 세력의 확장과 고양이 좌파세력의 활성화를 가져오는 역할을 했지만, 이런 논리가 한국사회에는 일면만 적절하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서구와는 다른 분단모순과 계급모순이라는 이중모순에 의해 규정을 당하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식 양당제도로의 구조화가 두렵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인간해방에 기여하겠다고 해놓고 필연성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변혁의지를 꺾어놓았다.

좌파, ‘복면달호’가 되어선 안 된다

이번 선거로 인해 실질적으로 멘붕에 빠진 것은 좌파진영이다. 그것은 통진당 사태 이전부터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느낄 시간적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진보정치가 깊은 수렁에 빠졌기 때문이다. 과거 변혁과 혁명을 부르짖었던 통진당과 진보정의당이 자신들의 무책임하고 몰역사적인 정치적 선택을 역사적 대의로 포장하고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허상에 빠져버려, 그 유탄을 고스란히 맞은 좌파가 진정한 멘붕에 빠진 것이다.

통진당의 이정희와 진보정의당의 심상정은 의미 있는 지지율을 기록하지도 못했고 정권교체라는 대의를 내세우며 막판 후보 사퇴까지 했음에도 야권 후보가 패배하여 애초 의도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세상에는 민심이 있고 공의란 것이 있다. 그런데 이를 지키지 않으면 패역으로 몰려 그 누구로부터도 고립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대선이 좌파에게는 새롭게 재구성해서 출발할 수 있는 시금석이자 땅을 고르는 정지작업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노동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김소연이 악전고투 끝에 득템한 1만 7천여표는 솔직히 당황스럽다. 좌파에게 표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선거는 표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김소연 선본의 활동이 그리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대중이 선전의 대상물로 상대화된 것은 차치하더라도 주요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획득하지도 못했다. 그들의 계급의식을 올바로 견인하거나 제고하지 못한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 이 성과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가 앞으로 좌파정치의 관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노동자 후보인 김순자가 획득한 4만 6천여표로 인해 더욱 고민스럽다. 그것은 진보신당이 진보좌파의 주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대명제를 위반한 채 독자적으로 출마를 강행한 사회당계열이 정파이기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분열의 정치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순자가 김소연 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고 자신들의 과오를 정당화한다면 이는 대중에 대한 모욕에 불과하다. 내용적으로, 조직적으로 봐도 노동자 후보는 김순자보다 김소연이 더 적합하다. 그런데 두 후보의 출마가 상당히 충돌적이고 자기분열적이며 모순적으로 진행되어 노동자 후보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따라서 표를 더 많이 얻은 김순자가 노동정치의 새로운 활로 개척에 기여할 것은 별로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소연의 경우 득표수는 초라하지만 노동정치의 새로운 주체 형성과 관련해서는 그 나름의 성과를 낳았다. 서로의 입장과 태도를 확인하고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고 나아가 노동운동의 독자성을 확보하는 대선투쟁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성과는 그 동안 노동과 혁명을 외쳤던 수많은 명망가들이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노동정치와 이별을 고했다는 것이다. 다시는 반성문을 쓰고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더 이상 좌파는 존재감이 없다. 시선을 피하려고 해도 피할 곳이 없다. 트로트가 창피해서 복면을 쓰고 활동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복면달호>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진심이다. 1만 7천여 명의 적은 숫자는 우리에게 간절함을, 그 간절함은 기다림을, 그 기다림은 결국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

최근 드라마 <학교 2013> 주제곡의 “혼자라고 생각말기 힘들다고 울지 말기 / 너와 나 우리는 알잖아 / 니가 나의 등에 기대 세상에서 버틴다면 / 넌 내게 멋진 꿈을 준거야”라는 가사처럼 좌파는 결코 외롭지 않다. 혼자가 아니다. 서로서로 기대어 꿈을 이룰 때까지 중단 없이 전진해야 한다. 맑스주의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의 말처럼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경우의 결과는 암흑뿐”이다. 이제야 사회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좌파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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