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지며 노동과 생산/재생산의 문제에서 “당연한 듯 빠져있었던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 우리는 지난 9월 4일, <생산하는 사람, 재생산하는 사람, 재생산되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간담회를 열었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GP 팀장 나영 씨,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 회원 유현경 씨,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공현 씨,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소장 조미경 씨의 발제와 평등사회노동교육원 부원장 임혜숙 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간담회는 자본주의-가부장제라는 체제 속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성을 갖춘 이성애자 비장애인 성인 남성’이 아닌 이들의 생산/재생산이 어떤 위치에 놓이고 있는지를 살피는 자리였다.
“이성애-비장애인-성인-남성 중심의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재생산 관리 구조”
나영 씨는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상품을 통해 이윤을 생산하는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간주되고, 그 노동력은 '이성애-비장애인-성인-남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이들에게 가족, 나아가 사회에 대한 책임과 동시에 권리/권력 또한 집중된다”며 현 사회체제가 노동과 생산에서의 이런 위계화를 통해 개인들을 구획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다른 사회 구성원, 즉 상품 생산을 하는 임금노동 밖의 청년이나 노년, 여성, 청소년, 혹은 장애인, 성소수자 등을 의존적이거나 종속적인 위치에 있게 만들고 이들의 주체성을 보장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정상성’은 재생산 영역을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라며, 자본주의적 효율성과 직결되는 ‘정상성’을 갖춘 구성원을 재생산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나영 씨는 이 ‘정상성’이 “결국 가족 밖에서 별도의 사회적 비용을 야기하지 않는, 효율적인 노동력으로서의 기준”이며, 이것이 “부모, 특히 엄마인 여성들에게 절대적인 의무와 책임을 부여한다”고 분석했다. 특히 의학 기술의 발달이 이 정상성의 기준을 토대로 재생산 영역에 깊게 개입하고 있어, 장애인, 특히 장애인 여성의 주체적 자기 결정권의 영역을 좁히고 있는 문제 또한 지적되었다.
“장애여성의 존재 가치를 부정 당하는 문제”
조미경 씨는 장애여성과 재생산의 문제를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재생산 가능 여부에 따라서 장애여성의 존재가치를 부정 당하는 문제”가 있다며 “재생산이 불가한 존재로서의 낙인은 장애 여성 개개인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출산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기존 여성 운동은 출산하지 않을 권리에 집중해 왔지만, 장애 여성의 경우 반대로 장애가 대물림될 수 있다는 이유로 출산을 금지 당해 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조미경 씨는 “장애여성이라면 누가나 한 번 쯤은 시설 종사자나 가족, 또는 주변인으로부터 재생산을 통제 당하는 경험을 했을 정도”라며 강제적인, 혹은 본인이 인지하지조차 못한 상태에서의 강제 불임 수술 사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제도적으로 암묵적인 뒷받침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는 낙태를 금지하는 현행법에도 본인이나 배우자의 우생학적, 유전학적 사유에 따른 낙태는 허용되고 있음을 언급하며 이것이 “‘장애’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넘어서 우생학적 관점에서 ‘있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사회적 인식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국가적으로 저출산으로 위한 위기를 운운하는 지금도 “장애여성의 자녀 양육에 대한 지원체계는 거의 전무하고 그나마 현재 시행되고 있는 것도 단기적 지원이거나 중복서비스라는 이유로 받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고 조미경 씨는 전했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출산은 물론 섹슈얼리티 자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장애여성이 성적 주체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성과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얻고 피임에 대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거나, 장애여성의 몸에 맞는 피임도구가 개발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바람직한 노동자나 시민, 또는 창업자 등으로 길러져야 하는 대상”
한편 공현 씨는 “청소년의 경우는 이 구도 속에서 ‘재생산 대상’이 된다”며 “청소년을 재생산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 청소년들이 하는 많은 노동과 생산을 비가시화한다”고 지적했다. 학습은 물론이고 실습, 연수, 때로는 계약을 맺은 임금노동까지도 “일종의 ‘사회경험’이라는 논리로 저평가”된다는 것이다. 공현 씨는 “청소년들은 경제적인 면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면, 사회정치적인 면에서도 생산에 기여하는 일이 적지 않지만 이런 것들은 대개 무시된다”고 평했다.
나영 씨는 청소년과 임신출산의 문제를 장애인의 문제와 연장선상에서 다루기도 했다. “장애인과 아동/청소년은 ‘미숙한 존재’, ‘스스로 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며, 따라서 생산과 재생산 모두에서 효율성이 떨어지고 임신/출산 등을 할 경우 오히려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만들어내는 존재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청소년의 출산 역시 많은 사회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금시기의 효과로 충분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또한 공현 씨는 “재생산 대상”이라는 말에 숨어 있는 함정을 밝히기도 했다. “청소년은 재생산 ‘대상’이지만 그 재생산 활동도 결국 청소년 본인의 수고와 노력을 강제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생산자의 노력으로 생산 대상이 변화하는 사물의 생산 과정과는 다르다는 지적이다. 그는 “[청소년]은 가만히 있는데 교사나 부모가 자기들의 자원을 투여해서 재생산되는 ‘상품’과 같은 것은 아니”라며 이것이 “사회적 재생산 과정에서 당사자인 청소년이 어떻게 주체가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모두의 대안이 되는 노동시간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결국 이 날의 화두는 이 ‘비정상’들이 어떻게 주체가 될 것인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운동은 어때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유현경 씨는 진보 운동에서 “노동을 통한 자기 삶의 생산과 생식을 통한 새 생명의 생산, 이 둘 모두를 포함한 생산의 개념은 사용가치 중심의 생산개념으로 압축/축소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이에 더해 노동 운동의 의제가 고용 안정 중심으로 흐르면서 “최근 10년간 협소한 노동 개념으로 인해 위계 철폐를 위한 접근에 난점이 있어 왔다”는 것이다.
유현경 씨는 “노동시간, 여가시간, 필수시간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시간 모델은 다분히 남성중심적”이라며 “특히 재생산 노동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대단히 강도 높은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위의 분류 중 어느 곳에도 포함되지 못했다”고 말하며 “시간의 재구성”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투쟁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며 “임금의 개념을 다시 설정하고 노동시간 단축 논의를 노동시간의 재구성을 통해 모두의 대안으로서 논의”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운동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사례로 2000년대 초반의 불안정노동자공동투쟁과 임신출산결정권네트워크(임출넷)의 활동을 꼽았다. 빈민, 장애인, 청년 등의 공동 투쟁을 표방했던 전자는 “사업장 정규직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족 중심의 복지 체계, 부양의무제 등에 문제를 제기”했으며 “너무 패러다임이 크지 않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의제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고 그는 평가했다. 덤프연대 조합원들의 4대강 사업 공사 현장 투입 등을 언급하며 “운동 의제간의 충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이것이 “어떻게 연결할 수 있고 함께 꿸 수 있는지가 고민되기 시작한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임출넷의 경우는 “노동, 여성단체 등이 함께 결합했고 낙태 문제로 시작했지만 몸에 대한 권리, 재생산에 대한 사회적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의를 하게 되었다”며 이성애자 비장애인 성인 여성과 장애인, 청소년, LGBT 등의 “서로 충돌할 수 있는 고민과 의제를 어떻게 함께 모아볼 것인가에 대한 단초를 제공했다”고 평했다. 이처럼 의제 확장과 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한 유현경 씨는 빈곤, 탈학교, 장애, 성매매 등의 이슈를 아우르는 “비정상 네트워크”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겠냐며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어지는 이야기들
이야기는 청중석과 패널석을 넘나들며 진행된 토론에서도 이어졌다. 스스로를 대학원생으로 소개한 오제도 씨는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한 방법으로 “공동체적인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는 과정을 계급 이론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하고 물었다. 이 과정에서 사용가치 중심의 노동만이 아니라 “기존 생산영역에서 배제됐던 것들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제안이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참석자는 최근에 읽은 논의를 소개하며 “비사회적인 삶, 가사노동하는 주부, 성매매여성, 백수들도 제도경제 바깥의 노동을 하면서 부채금융을 통해 제도를 지탱하는, 제도에 연결되어 있는 상황”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기존의 영역 구분을 넘어서는 논의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공현 씨는 ‘청소년·대학생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하자’는 담론을 언급하며, “노동과 소득의 고리를 끊은 결말이 그것인가, 교육이 노동현장-생산과 분리되면 안 되는 것 아닌가”하고 물었다. 기존의 담론적 틀을 벗어나지 못한 논의는 “결국 정상화 맥락으로 돌아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나영 씨 역시 “(임신출산을) 재생산이라고 계속 불러야 하나, 이것이 생산노동으로서 가지는 가치를 가리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고민을 밝히며 “존재하고 있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조미경 씨는 최근 3주년을 맞은 서울 광화문 역사 내의 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을 언급하며 “정상성 기준을 벗어나는 것부터가 시작이라 확신한다, 정상성을 벗어낸 재생산 가치·개념,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애인이 태어났을 때 ‘와 장애인이다’, ‘부럽다’는 이야기까지는 나오지 않더라도 존재 가치를 밝힐 수 있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견지에서 “국가 발전의 재생산이 아닌 인권 발전의 재생산으로의 전환”이라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오는 11월 6일 저녁 7시 반, 민주노총 대회의실(서울 서대문역 인근)에서 열리는 세 번째 간담회 <좋은 몸, 이상한 몸, 나쁜 몸>에서도 정상성과 패러다임에 관한 논의가 이어진다. SOGI(성적지향·성정체성)법정책연구회 및 장애여성공감의 연구원인 나영정 씨,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루인 씨,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의 김영옥 씨가 패널로 참석하며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백영경 씨가 사회를 맡을 다음 간담회에서는 신체적 정상성이라는 기준으로 행해지는 몸의 위계화와 그 위계의 낮은 곳에 놓이는 장애인, 성소수자, 노년여성 등의 삶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간담회 진행 일정
네 번째 주제_여성 노동 : 여성-노동자의 생산과 노동, 현장과 쟁점
다섯 번째 주제_노동, 생산/재생산의 재구성과 성/노동
여섯 번째 주제_노동, 생산/재생산의 재구성과 청소년
일곱 번째 주제_노동, 생산/재생산의 재구성과 노동운동
여덟 번째 주제_노동, 생산/재생산의 지구지역적 이동과 국경
아홉 번째 주제_생태/환경 운동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노동, 생산/재생산
열 번째 주제_종합토론 : 노동, 생산/재생산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