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을 둘러싼 경찰버스 안의 ‘불법분향소’
지난주 서울시청을 지나면서 광장 주변을 둘러싼 경찰버스들을 보았다. 서울광장에 10.29 이태원참사 희생자 분향소가 유가족과 시민의 의지로 자리 잡은 지 열흘 정도 지났을 즈음이었다. ‘국가애도기간’을 정하고 누구라도 언제든지 추모할 수 있다고 광장을 개방했던 광경과는 너무 달랐다. 그때의 분향소와 지금의 분향소는 무엇이 다르길래 풍경이 다른 걸까? 그때의 서울시는 합동분향소를 설치하면서 시민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주변에 경찰을 배치했고, 지금의 서울시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광장 사용 보장과 안전 등을 이유로 철거하겠다 한다. 시민의 조문을 도우려고 배치됐던 그때의 경찰이 왜 이제는 분향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까? 오히려 경찰버스가 분향소를 가리고 외부와 분리하고 있다. 경찰은 가족과 대책회의의 동향을 살피고 철거에도 동원될 수 있다는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덕분에 유가족들은 분향소를 찾은 시민과 함께 위로와 애도의 마음을 나누어야 할 이곳에서 언제 닥칠지 모를 분향소 철거에 대비해 24시간 불침번을 서고 있다.
서울시는 서울광장에 설치된 분향소가 불법시설이라며 철거를 주장하고, “추모는 법과 원칙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국가가 허락한 추모만이 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추모의 시간은 ‘국가’가 허용한 ‘애도기간’을 통해 이미 끝났고 서울시의 합동분향소가 아닌 다른 추모 공간을 허락한 바가 없으니 이는 그저 철거돼야 할 ‘불법시설물’이다. ‘불법 분향소’와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다른 시민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참사 100일 추모제를 앞두고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에서의 추모대회를 허용하지 않고 광장을 봉쇄했다. 유족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녹사평역 지하 4층의 추모 공간을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추모공간은 누구를,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는 장소인가? 희생자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일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는 피해자의 권리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과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에게 보장돼야 할 애도의 시간이자 치유의 권리다. 또한 이는 공동체의 책임을 통감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미래를 다짐하는 시간이자 사회적으로 기억할 권리이기도 하다. 이 권리들을 위한 공간은 국가가, 서울시가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피해자와 우리의 권리는 불법이 됐다.
분리하고 차단하고 불법으로 만드는 경계선
서울광장을 둘러싼 경찰버스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시민 분향소’와 세월호 유가족을 둘러싸던 광장의 차벽을 연상시켰다. 차벽은 안과 밖으로 나눈다. 원래부터 존재하던 안-밖이 아니라 차벽 이후 형성된 안-밖이니 이는 그로써 의미가 생겨난다. 안-밖의 구분은 안쪽에 있는 ‘우리’와 바깥사람들을 분리한다. 안은 차벽에 가려져 누가 무엇을 하는지, 왜 그곳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경계선-차벽(경찰)이 안쪽에서 불온한 어떤 존재들이 만드는 위험한 상황을 추측하게 만들어 경계를 넘어 안으로 다가가기보다는 물러서게 한다. ‘우리’가 만나고자 했던 우리 ‘밖의 사람’들을 만나기, 연대하기는 그렇게 차단된다.
또 집회에 종종 등장했던 차벽-명박산성을 비롯해 지독하게 물대포를 쏘아대던 살수차 앞의 차단벽까지-도 떠올랐다. 차벽은 이쪽과 저쪽으로 나눈다. 차벽은 이쪽에 있는 ‘우리’가 저쪽의 ‘그들’을 향해서 갈 수 없도록 하는 저지선이다. 차벽이 없을 땐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도 차벽이 생기고 이쪽의 ‘우리’가 되는 순간 갈 수 없다. 저쪽으로 무사히 가는 ‘통행증’은 이쪽의 ‘우리’가 아닌 ‘순수한 시민’의 증명으로 가능하다. 경계선-차벽을 무너뜨리거나 넘는 순간 불법을 저지른 범죄자가 된다. 차벽 뒤의 무기들-물대포, 최루액, 채증 장비-이 이쪽의 ‘우리’들을 위험에 빠뜨리지만, 오히려 위험하다고 지목된 사람들은 ‘우리’다.
차벽은 구획을 가시화한다. 단지 공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계선을 보면서 합법/불법의 경계를 가늠하고, 사회를 위협하는 행위와 사람을 추측하게 만든다. 허용할 수 있는 행위와 입장 가능한 존재가 구분되면서 장소의 의미가 만들어진다. 구획의 경계를 만드는 것은 권력이다. 정치, 행정 권력을 쥔 이들이 장소를 점유하고 통제하려는 의지로 경계를 만든다. 권력은 일방적으로 장소를 의미화, 상징화하는데 특별히 그 의미를 지키고 싶은 장소에 대해 개방과 폐쇄의 힘을 강하게 발휘한다(대표적으로 최근 재개장한 광화문광장). 이런 힘을 정당화하는 것이 법과 제도다.
집시법이 보호한 장소들
집시법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강력한 경계를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집시법 11조(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 장소)는 권력 밖의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면서 오랫동안 성역을 유지해왔다. 정치권력과 동일시되는 장소인 청와대와 용산을 비롯해 국회나 대사관, 법원 앞도 ‘특별한 보호’를 받는 장소이다. 집시법은 1962년 제정 당시 국회의사당, 각급법원, 대통령 관저, 중앙관서 인근 200m 이내에서의 집회를 절대적으로 금지했다. 이후 법률 개정에 따라 중앙관서가 금지 장소에서 제외되고 금지 범위가 100m 이내로 축소됐으나, 국회의사당, 법원,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는 계속 집회가 금지되었다. 불복종 행동과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헌법재판소도 ‘국내 주재의 외국의 외교기관’, ‘국회의사당’, ‘각급 법원’, ‘국무총리 공관’ 인근에서의 절대적 집회 금지에 대해 모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집시법 11조는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집회의 권리를 침해하는 조항이다. 국회와 법원 앞 100미터 집회금지에 대한 헌법불합치 이후 사라졌어야 할 이 조항은 다시 입법권력에 의해 예외적으로만 집회를 허용하는 조항으로 변경됐다. 대규모 집회로 확산할 ‘우려’와 기관의 기능이나 안녕을 침해할 ‘우려’가 없는 경우만 집회가 가능한데 이는 전적으로 경찰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2022년 12월, 대통령 관저 앞 100미터 이내 집회 금지 조항에 대해서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왔다. 그런데 역시 앞선 개정과 동일한 내용의 개정안이 발의됐다. 헌법적 판단이 무색할 정도로 권력은 자신의 장소 지키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용산 대통령 집무실과 전직 대통령 사저를 금지장소로 추가하는 집시법 개정안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했다. 법 개정으로도 부족했는지 지난 2월 6일 국가경찰위원회는 용산 대통령 집무실이 인접한 이태원로를 집시법 12조 1항의 교통 소통을 이유로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할 수 있는 주요 도시 주요 도로에 추가하는 개정안을 의결했다.
장소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은 권력과의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장소를 보호하려는 조치는 누구를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려는지 그 의도를 담고 있다. 권력 밖의 사람들이 쫓겨나고 진입을 차단당하는 그 장소를 ‘우리’가 점유할 때 장소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