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로 떠오른 국정원, 이적異的 행위의 기록
① 종북몰이 타깃이 된 민주노총 “노동 3권이 위험하다”
② 국정원의 위험한 직업활동, ‘프락치’ 공작사건
③ “형님”과 ‘수사관’의 경계에서 조작된 대공수사
④ 국정원-보수언론-보수단체 삼각구도가 만든 ‘세월호의 나쁜 아빠’
⑤ 국가정보원의 집행검 ‘국가보안법’
“세월호 유가족들은 갑작스러운 참사로 인해 소중한 가족을 잃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 그저 내 가족을 찾고 싶었고, 내 가족의 생명을 앗아간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왜 구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는지를 알고 싶었을 뿐인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우리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위로와 보호의 대상, 국가의 배상을 받아야 할 대상이었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오히려 국가로부터 사찰의 대상이 되었고, 사찰의 결과물들이 정권의 필요에 의해 여론 관리, 이슈전환에 활용된 것으로 의심되는 많은 증거들이 확인된다.”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수사요청서 중-
최근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 책임자였던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 등 해경지휘부가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판결 직전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을 방해한 혐의로 기소된 박근혜 정부 고위 인사들이 1심에서 전부 무죄를 선고받았다. 올해 세월호 참사 9주기를 앞둔 풍경들은 이토록 무력하다.
지난해 9월,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는 3년 6개월간의 활동을 종료하며 조사보고서와 국가의 공식 사과 및 개선을 촉구하는 권고안을 발표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8년이 지나 나온 보고서는 참사 당일 해경의 미구조와 세월호 특조위 활동에 대한 방해 공작 등을 확인하고 규명한 중요한 기록을 담고 있다. 보고서는 이 밖에 참사 피해자에 대한 사찰과 여론조작 활동에 대해 조사했다. 하지만 기무사, 국정원 등의 정보기관이 자료 제출에 소극적으로 나서며 조사엔 한계가 따랐다. 특히 국정원은 일부 자료만 공개하고, 사참위가 요청한 대부분의 자료를 비공개했다. 조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참위는 국정원에 대한 두 가지 불법 의혹을 기록으로 남겼다. 세월호 관련 단체와 유가족에 대한 사찰과 언론·SNS를 통한 왜곡 정보의 전파와 이를 통한 이슈 전환 및 여론 조작의 정황이다.
▲ 인터뷰 중인 김영오 씨 |
특히 유가족 김영오 씨에 대한 사찰이 문제시됐다. 2014년 7월 14일 세월호 특별법에 수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돼야 한다며 광화문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한 김영오 씨에게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자, 국정원은 김 씨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은 보수언론을 이용해 유족의 떼쓰기 행태 문제점을 알리고 이를 통해 장외투쟁을 제어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가 작성되고 공중파 뉴스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이 김영오 씨에 대한 각종 의혹을 쏟아냈다. 차마 뉴스에는 싣지 못할 선정적 가십거리들은 보수단체를 통해 확산했다. 국정원은 보수단체의 폭로 계획 등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2014년 5월부터 2015년 7월까지 국정원 활동을 조사한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적폐청산 TF(적폐청산T/F)’ 조사에 따르면 국정원은 세월호 사고 관련 보수단체 집회·시위 동향과 각계 세월호 관련 여론을 파악해 지휘부 및 청와대 보고했다. 그리고 “당시 세월호 관련 보수단체 활용은 청와대에서 ‘보수단체 매칭사업’ 등을 통해 주도하고 국정원은 보수단체를 관리하며 진행상황을 수집·보고하는 형태로 진행됐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국정원이 청와대와 교감하며 세월호 투쟁을 저지하는 데 보수단체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사참위는 이러한 조사를 토대로 지난 2020년 4월 27일 전·현직 국정원 직원 5명과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1명에 대해 ‘국정원법상 직권남용죄’로 검찰 수사를 요구했지만, 이 요청들은 모두 기각됐다. 민간인 사찰 의혹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무력감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그런 와중 국정원 민간인 사찰의 핵심 당사자인 김영오 씨는 사참위 기록을 바탕으로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을 종식하기 위한 활동을 재개하려 하고 있다. 자료의 한계와 적폐청산T/F의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조사 때문에 국정원은 모든 의혹에 대해 무혐의라는 법적 판단을 받고 처벌까지 이르지 않았지만, 이 문제를 이렇게 덮을 순 없기 때문이다. 지난 2월 16일 경기도 안산시의 한 카페에서 김영오 씨를 만나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에 대한 피해 등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근황이 궁금하다.
제주도에서 서리태 농사를 짓다가 아산으로 올라온 지 일주일도 안 됐다. 에어컨 설치 일을 하려고 제주도에서 자격증도 땄다. 농사를 무농약으로 지었는데 그때보다 수입은 훨씬 나을 것 같다(웃음). 겨울엔 설치 일이 없어서 봄까진 쉴 것 같다. 일 때문에 올라온 것도 있지만 세월호 활동을 다시 할 때라고 생각했다. 사참위 백서가 나왔지만 언론도 그렇고 너무 조용하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정권도 바뀌고, 힘들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10년, 20년이 걸리더라도 하나씩 알려야 할 권리가 있어서 활동을 다시 재개하려고 한다. 잡지 인터뷰든, 방송 인터뷰든 사참위에서 나온 자료들을 하나씩 꺼내 또 다른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의혹에 불과하더라도 먼 훗날 미래 세대들이 진실을 밝혀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참위를 통해 확보된 본인 관련 문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단식 막바지에 나에 대한 온갖 유언비어들이 제기됐는데, 비슷한 시기 국정원에 의한 사찰 정황도 발견됐다. 당시 나온 이야기 중엔 양육비를 안 줬다, 200만 원짜리 국궁을 취미로 한다는 가짜뉴스도 있었고 금속노조 조합원이라는 사실도 있었다. 국정원이 첩보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모으고, 이를 활용해 저를 공격하려 하지 않았나. 당시에도 시나리오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국정원의 지시가 확인되니 의혹이 선명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기억하기로 (2014년) 8월 23일부터 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있었는데 보수단체들이 단합해서 깃발을 들고 온갖 악의적인 뉴스를 피켓으로 만들어서 제 앞에서 시위하고 그랬다. 언론도 비슷한 내용으로 저에 대한 가짜뉴스를 뿌렸다. 국정원도 정보를 모으려 그랬는지 제 고향집을 사찰하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한테까지 저를 캐고 다녔다.
국정원은 고향집 사찰뿐 아니라 김영오 씨가 단식하다 쓰러졌을 때 입원한 병원에도 들러 병원장을 통해 동향을 파악했다. 두렵진 않았나?
그때 제일 괴로웠던 건 보수단체, 보수언론 때문이었다. 거기서 나오는 가짜뉴스 때문에 머리카락이 어마어마하게 빠졌다. 종편 뉴스들이 나에 대해 보도하면서 빨간줄을 죽죽 긋는데, 빨간줄이 쳐질 때마다 스트레스로 죽고 싶었다. 죽을 수 없었던 건 그게 가짜기 때문에. 죽어버리면 진실이 될까봐 억울해서 못 죽었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니까 도 닦는 일로 느껴졌고, 그만큼 강해졌다. 당시 일베들하고도 엄청 싸웠다. SNS에서도 그랬지만 직접 문자나 전화가 오기도 했다. 저에 대한 욕부터 시작해서 죽이려고 벼르고 있다는 협박도 많았다. 그때는 국정원이 날 죽이는 게 아니라 생판 모르는 남인 일베가 죽일 것 같았다. 겉으론 태연했지만 집에 와서 잠을 못 잤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잠그는 습관, 이중삼중으로 문이 닫혔는지 확인하는 습관들이 그때 생겼다.
▲ 김영오 씨가 언급된 사참위의 국정원 조사보고서 |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가 김영오 씨에 대한 국정원의 사찰 내용을 파악하고 빠르게 기자회견에 나섰다. 이후 국정원의 사찰 정황은 없었나?
티가 났다면 진즉에 증거를 모아 문제제기했을 거다. 사찰의 움직임은 느낄 수 없었지만 불안함은 여전했다. 단식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의하고 사람들을 만났는데 특히 운전할 때가 두려웠다. 운전할 때면 누가 미행을 할까 싶어 백미러밖에 안 봤다. 뒤에 똑같은 차가 오랫동안 보이면 갓길에 세웠다가 먼저 보내기도 하고, 원래 가려던 방향에서 경로를 틀기도 했다. 티 나게 저를 감시한 게 있다면 경찰 정도다. 얼마나 졸졸 따라다니던지 하도 자주 봐서 옷과 신발을 다 외울 정도였다.
국정원은 김영오 씨의 단식 농성 자체를 반정부 행위로 규정했다. 국정원 보고서엔 “김영오의 반정부 행위: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다 13.7.22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노조에 자동 가입, 조합원 자격을 떠나 부모 입장으로 단식농성”이라고 적혀 있었다. 반정부행위라고 할 만한 일들을 한 적 있나?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아이 낳아 키우고 노동자로 일하다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다. 반정부 활동이라 할 만한 일은 단 한 개도 없다. 비정규직으로 어렵고 힘들게 일한 게 잘못이라는 얘긴지 모르겠다. 단식할 때 활동가들이 창문도 가리고, 휴대폰 배터리도 빼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본인들의 경험에 비춰 국정원에서 도청하고 사찰할 게 뻔하니 피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저는 ‘들으라고 하세요’ 하면서 휴대폰을 켜놓고 다녔다. 나는 죄지은 게 없어 떳떳했고, 그래서 당당하게 싸웠다. 북한 사람은 만나본 적도 없다.
국정원은 김영오 씨가 세월호 대책위에 의해 활용당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김영오 씨가 주변 활동가들을 매우 신뢰하고 있고, 조언은 100% 수용하고 있다며 주변 활동가의 과거 시위나 정치활동 전력 파악에도 나섰다. 그리고 이를 부각하는 보도를 통해 배후조종설을 만들려 한 정황도 포착된다. 당시 활동가들과는 어떤 관계였나.
당시 세월호 투쟁에 대한민국에서 활동 열심히 하는 분들이 모두 모였다. 우리 손을 잡아준 것도 고맙고, 큰 싸움을 해본 분들이니 그분들의 조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럼에도 (국정원에서 주장한 것처럼) 100% 수용하고 그런 건 아니었다.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할 땐 남의 말도 잘 안 듣고, 내 고집대로 행동한 것도 많다. 단식이 장기화되는데 정부 쪽에서 미동도 없으니까 난동을 부려볼까, 자해를 해볼까 이런 생각도 했는데 이런 행동들을 막아준 사람들이다.
국정원은 세월호 대책위가 투쟁의 고조를 위해 김영오 씨의 자살을 종용할 수 있다며, 이를 대비해야 한다는 문건도 작성했다.
자살, 분신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죽을 수 있나.
언론사에서 김영오 씨에 대해 쏟아낸 기사 중 상당수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정정이나 사과가 있었나?
양육비 20만 원을 보내기도 힘든 한 달 140~150만 원 받으며 자동차 부품업체에서 일했다. 한번은 라디에이터 공정 일을 하다가 다친 적이 있는데 한동안 젓가락을 못 들 정도로 아파 일을 일 년 쉬었고, 그 기간 양육비를 못 보낸 적이 있다. 보수언론에서 양육비를 안 줬다고 집중적으로 보도했는데 양육비 명목은 아니었지만, 다만 얼마씩 보탠 게 있다. 나중에 변호사한테 물어보니 그것도 양육비에 포함이 된다고 하더라. 전국에 강의를 돌면서도 계속 양육비 얘기를 들어야 했고, 나중엔 은행에서 입출금 내역을 뽑아서 다니며 사람들에게 확인시켜주기까지 했다. 물론 기자들이 매일 기사화했던 제 페이스북에도 올렸지만 이 얘기는 기사 한 줄 안 나가더라. 나를 물고 뜯었던 언론 중에서 단 한 군데도 정정보도해 준 일이 없다.
당시 그 뉴스들을 직접 봤다. 변호사랑 같이 볼 때도 있었는데 ‘저 기사 가짜다. 고소합시다’하면 언론사 키워주는 것밖에 안 된다고, 고소할 필요 없다고, 참자고 해서 참았는데 지금은 대응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지금도 김영오를 치면 그 기사들이 나온다. 살아있는 그 기사들이 지금도 나를 괴롭히는 것 같다.
어떤 괴로움인가?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대부분 내 이야기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해준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지금까지 나에 대해 퍼진 많은 가짜 정보 때문이다. 이혼하고 10년간 양육비도 안 주고 얼굴 한 번 안 비추다가 보상금을 바라고 갑자기 나타난 사람, 양육비는 안 주면서 호화 취미를 즐기는 사람…. 사실 석궁은 200만 원이라고 종편에서 보도가 됐는데 3만 원밖에 안 한다. 아무튼 이러한 의혹들을 실제로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기사가 있었는데 사실이냐고. 그런 일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강연을 하러 들어가면 위축되기 시작했다. 지금 내 이야기에 경청하고 있는 저 사람들 중에서 사실은 날 욕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라는 의심도 생기고, 기대하는 눈빛이 아니면 눈치를 보기 시작하고, 그러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두려워졌다. 그렇게 대인기피증이 생겨서 조용히 제주로 내려갔다.
▲ 인터뷰 중인 김영오 씨 |
세월호 진상 규명 활동도 다 접는 계기가 된 건가?
박근혜가 탄핵되고, 시민들이 각자 일상으로 돌아가고, 세월호 활동을 함께 했던 단체들도 자기 활동 공간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제주에 가선 유민아빠라는 것도 숨기고 살았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고 1년 정도가 지난 지금은 탄압이 심해지고 다시 노동자, 서민이 뭉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에어컨 설치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정부 비판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은 장사하는 사람대로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제 뭉쳐서 싸울 때가 온 거다. 이렇게 가다가는 다 죽지 않겠나. 정부에서 화물연대 상대로 강제로 진압하는 것을 보고 투쟁 분위기를 강하게 느꼈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할 계획인가?
국정원 사찰 건으로 국가 상대의 소송을 하고 싶은데 쉽지 않아 보인다. 변호사 몇 분께 연락을 드려봤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변호사들은 많은 경험을 통해 이 싸움이 정말 힘들고, 어쩌면 무의미하게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국정원 민간인 사찰이 벌써 몇 년째 문제가 됐어도 국정원은 그때도 무혐의였고, 지금도 무혐의다.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 당시 만들었던 특수단(검찰 세월호참사 특별수사단)도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을 조사하겠다며 1년 2개월을 썼는데 더 밝혀낸 게 없다. 압수수색 같은 것도 할 수 있었고, 특조위보다 더 많은 수사를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면죄부를 주는 결론을 내렸다. 특수단을 꾸린 것도 조국 사태 같은 위기가 오니 물타기하려는 목적이었던 것 같다. 국정원에 대한 어떤 수사도, 재판도 시작된 게 없다고 본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행위를 여기서 끊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될 거다. 사찰당하고 감시당하는 피해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길 바란다. 이를 위해 누군가는 싸워야 하지 않겠나. 이 싸움 역시 세월호의 진상규명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