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 8월 29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약 네 시간의 버스 점거 투쟁이 벌어졌다. [출처: 최병선] |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은 2001년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노부부가 리프트에서 떨어져 각각 사망과 중상을 입은 참사로 촉발됐다. 휠체어 리프트는 1988년 서울올림픽과 패럴림픽을 준비하던 정부가 관광지가 몰려 있는 종로, 주경기장이 있는 잠실 등 몇 곳에 설치하기 시작했고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도입 당시에도 이동권 보장보다 국제사회에 보여주기 위한 체면치레의 성격이 강했다. ‘장애인에게 관광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면 만족하겠지’라는 시혜와 동정의 태도도 엿보인다.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1년 정부가 실시한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당시 전체 장애인 중 20%만이 외출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장애인에게 이동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장애인 대부분이 이동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살아갔다.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이하 이동권연대)가 철도청과 시내버스를 관장하는 건설교통부(현재의 국토교통부)에 보낸 공문의 회신 내용을 봐도 이동이 권리가 아닌 복지서비스로 인식되고 있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건설교통부는 “장애인 이동권 확보와 관련해서는 장애인 복지법령을 관장하고 있는 보건복지부가 정부예산을 확보하는 등으로 장애인들이 보다 노선버스를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추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답변했다.
▲ 2002년 9월 11일, 서울시청역에서 장애인 활동가들이 지하철 선로로 내려가 지하철 운행을 막고 장애인이동권 보장을 요구했다. 이동권연대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며 서울역, 광화문역, 시청역에서 지하철 선로를 점거했다. [출처: 이창길] |
그래서 이동권연대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막아 세웠다. 시민들에게, 정부에 장애인 역시 누구든지, 언제나, 어디서나, 어디로든 이동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했다. 시혜와 동정의 서비스로서가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장애인은 이동권을 보장받아야 하고, 이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사회에 외치기 시작했다. 비장애인 중심의 대중교통 체계에 문제를 제기하며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총 41차례의 버스 타기 투쟁, 세 번의 선로점거투쟁(서울역, 광화문역, 시청역), 무기한 서울시청 천막농성, 39일간의 인권위 단식 농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이 만들어졌고 제3조에 이동권이 명시됐다.
“장애인 등 교통약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장애인 등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또한 이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책무 역시 제4조에 기재됐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교통약자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교통수단과 여객시설의 이용편의 및 보행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시행하여야 한다.”
이동권 보장을 위한 외침은 왜 멈춰질 수 없는가?
그러나 으레 그렇듯 법에 한 줄 적혀 있다고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법은 중립적인 척하지만 결국 권력에서 배태된 글귀에 불가한지라 효율과 합리성을 운운하는 자본의 힘 앞에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무기력하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위해 만들어진 법 조항들도 그러했다. 2005년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을 통해 저상버스와 특별교통수단의 도입 근거가 마련됐지만, 16년이 지난 지금 장애인의 이동권은 완전히 보장됐다고 말하기 힘들다. 심지어 특별교통수단의 경우, 법정 보장 대수가 시행규칙에 명시돼 있지만 2021년 기준 충족률은 86%에 불과하다. 저상버스 역시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에 따라 5년 간격으로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계획’을 수립하고 목표를 제시하지만 단 한 번도 충족된 적이 없다. 정부는 2021년까지의 저상버스 도입률 목표치를 42%로 제시했으나, 실제 전국 도입률은 30%에 불과했다.
권리를 위한 이동:
배제되지 않고 정시에 연결될 권리, 유예된 권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행동의 주된 비판 논리는 지하철 역사(Subway station) 승강기 설치나 저상버스·특별교통수단의 보급률이 향상됐다는 것이다. 전(前) 여당 대표의 SNS부터 커뮤니티 게시물까지 장애인의 이동이 비교적 충분히 보장되고 있다는 발화와 기록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비율들은 비장애인에겐 수치로 헤아릴 필요도 없이 완전히 100%로 보장해야 할 권리이다. 이동을 서비스(service)로 생각하기에 상대적인 수준을 측정하고 정도를 판단한다. “어떤 이동은 가능하게 하면서 다른 이동은 방해하는 정당하지 않은 모빌리티 체제”(1)에 문제가 있는데 그 정도에 만족하라는 논리는 장애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권리를 소거해 버리는 차별적 언행이다. 누가 이동하고, 무엇을 움직일지 결정하는 것은 시민 모두에게 주어진 권력이어야 한다. 대중교통 시스템은 성, 장애 유무, 계급, 인종 등에 따라 시민을 배제하거나 거부해선 안 된다.
▲ 2001년의 서울역. 활동가들이 장애인 추락사고가 빈번히 발생한 지하철역 휠체어 리프트를 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출처: 최병선] |
이동의 목적과 특성을 중심으로 비판 논리를 다시 살펴보자. 이동의 핵심은 연결(link)이다. 이동은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도착하기 위한 사회적·물리적 행위이고, 목표이자 수단이다. 교통수단 간의 환승을 통해 거미줄처럼 출발지와 도착지를 촘촘하게 연결한다. 즉,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환승을 전제로 모든 교통수단이 장애인도 탑승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어야 한다. 이동 도중 한 구간이라도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다면 출발지에서 목적지에 도달할 권리가 침해된다. 가령, 지하철에서 하차해 버스를 타야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는데 탑승해야 하는 버스 노선이 모두 차별버스(비저상버스)라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따라서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저상버스 도입률이 100%가 되지 않는 이상 이동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사실 이동할 권리는 이동 가능 여부를 넘어 정시성, 예측 가능성을 포괄해 확대될 필요가 있다. 이동의 중요성이 사회적 승인을 받게 된 배경은 근대도시의 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근대 사회 이전에 교육, 노동, 여가 등 모든 일상생활의 영역은 가족 단위에서 자체적으로 수행되고 조절돼 왔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통해 도시가 개발되고 사회적 역할이 분업화했다. 가족의 역할이 학교, 공장 등으로 분산됐다. 정확하게 정시에, 목적지에 도착해 역할을 수행한다는 계약으로 사회적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모든 이동은 예측 가능성을 수반해야 한다. 즉, 이동할 권리는 정해진 시간에 그곳에 도착할 권리까지 포함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장애인이 이동할 때 몇 시에 도착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교통체계를 갖추고 있다. 저상버스가 도입된 노선이라도 차별버스와 혼용해 운영하고 있어 장애인은 눈앞에서 버스를 보내기도 한다. 정류장이 불량해 저상버스의 경사로가 착지하기 어려운 사례도 빈번하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대중교통의 임시적 대안으로 특별교통수단도 있지만 실제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고, 따라서 소홀하게 관리될 수밖에 없다.
정시에 도착할 권리를 위해 필요한 것들
특별교통수단의 대기시간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은 당연하게도 운행 차량의 수다. 시간대별로 운행되는 차량의 수는 두 가지의 물리적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첫 번째는 차량 도입이고 두 번째는 운전원 고용이다.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은 시행규칙에서 확보해야 할 최소한의 차량 수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는 보행불편장애인 150명당 1대로, 2019년 장애등급제가 단계적으로 폐지되며 수요 상승을 대비해 기존의 200명당 1대에서 조정한 결과다. 그러나 앞서 제시했듯이 최소한의 법적 기준조차 맞추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많은 지역에서 보행불편장애인 외 일시적 휠체어 이용자나 노인, 임신부 등까지 장애인 특별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한편, 차량운전원의 수를 중심으로 지역별 현황을 파악해보면 대부분 차량 1대당 1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장 많은 운전원을 확보한 지역은 대전광역시로 차량 1대당 1.24명의 운전원이 편성돼 있다. 가장 낮은 지역은 경상북도로 차량 1대당 1명도 안 되는 0.98명이 배정돼 있다. 차량운전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실질적인 차량 운행률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가령, 차량 1대당 운전원이 1명이라면 의무휴무일 등을 감안할 때 매일 전체 인원의 1/4이 쉬어, 전체 차량의 1/4이 운행되지 못한다. 또한 24시간 운행의 경우 3교대를 하게 되는데, 이용자들이 가장 많은 시간대에도 전체 차량의 30% 이상은 차고에서 운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대기시간이 턱없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농어촌 지역이 많은 광역 단위의 경우, 원거리 이동 시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는데 차량운전원 수는 충청북도(1.05명), 전라남도(1.03명), 충청남도(1.01명), 경상북도(0.98명) 순으로 도시권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 2002년 종로에서 오이도역 장애인 추락참사 1주기 집회가 개최됐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4명이 목에 사다리를 걸고 행진대열을 이끌고 있다. [출처: 최병선] |
따라서 운전원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으면 특정 시간대에 이후의 차량 대기시간이 말도 안 되게 길어질 수 있다. 2020년도 조사에선 장애인 콜택시를 타기 위해 평균 49.2분 대기해야 한다는 조사 결과도 나온 적 있다(한국장애인개발원, 2020). 비장애인의 교통체계를 생각해보면 이는 차별임이 명확하다. 비장애인 또는 휠체어 미이용 교통약자들이 택시를 이용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은 ‘카카오택시’다. 카카오택시는 대기시간 10분 이상 거리의 택시와는 기본적으로 연결해주지 않는다. 10분 내로 올 수 있는 택시가 없으면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이용 여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정도로 10분이 넘어가는 택시 대기 시간은 당연하지 않은 일로 판별된다. 그러나 휠체어 이용 장애인에게는 30분 대기가 일상이다.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재의 모빌리티 시스템은 대한민국의 차별적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다.
▲ 2022년 특별교통수단 법정보장 대수 충족과 지역 간 차별 격차를 외치며 장애인 활동가들이 목에 사다리를 걸고 도청 앞에서 장애인 콜택시 주변에 모여 요구안을 외치고 있다. [출처: 전장연] |
꽤나 간단한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방법
글을 마무리하며 대한민국이 장애인의 이동(접근)권을 권리로 고민하는 정의로운 사회인가라는 질문이 맴맴 떠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당연하게 이용하는 노선버스 탑승에서 배제되고 있다. 저상버스와 특별교통수단은 낮은 보급률과 제한적인 운영방식으로 시내·외를 가리지 않고 연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정시도착은커녕 밤에는 출발하지도 못한다. 다시 서두에 던졌던 질문을 상기해본다. 누가 이동하고 무엇을 움직일지 누가 결정할 것인가? 이동은 현대 사회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시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기본권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은 이동의 모든 영역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고 있다. 이 권리는 누가 보장해 줄 수 있는가? 누가 가로막고 있는가? 결정은 필요한가? 결정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당연시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모든 노선버스를 저상버스와 리프트 장착 버스로 교체하고, 특별교통수단의 대기시간과 운행범위를 장애인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적용하면 된다. 하지만 이를 번번이 막는 것은 예산의 논리를 가장한 장애인 차별이다. 위와 같이 정답은 분명함에도 “전면 도입하는 데에 너무 큰 비용이 소모된다”, “예산의 우선순위가 있지 않냐”라는 주장이 나온다. 신도시의 경우 지자체장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나서 대중교통 체계를 갖춰야 한다며 앞다퉈 공언한다. 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장애인의 이동권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위치되는지 분명해진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이며,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어디로나, 누구든지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와 필요가 있다. 특히 저상버스, 지하철 승강기 설치 등으로 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으면, 노인 같은 교통약자도 함께 그 권리를 누리며 정의로운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즉, 장애인이 결정하고 장애인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모빌리티 정의 사회에 더 가까이 가는 방법이다. 따라서 정치와 동료 시민들은 다른 동료 시민의 너무나도 당연한 이동권 보장을 위해 함께 책임지고 경주해야 한다. 장애인의 이동을 권리로 생각한다면, 장애인이 이동하지 못하는 물리적 현실을 개별적인 것이 아닌 분리된 것이라고 사고한다면 시민권의 관점에서 길은 반드시 연결해야 한다. 이를 상상하면 돈이 없다는 예산의 논리도, 도로 문제를 운운하는 물리적 근거도 실체 없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각주>
(1) Mobility Justice, Mimi Sheller, 2019; 최영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