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환호성은 박지성이 동점골을 넣는 순간에 터져 나왔던 비명이었단다. 후배는 그 이후에 펼쳐진 한국팀의 플레이를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다는 또 다른 서두를 달면서 논평했다. 한국팀 정말 애쓰더라, 기를 써서 하는구나, 실력보다 노력이 가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왠지 감동스러웠다고 말이다.
동그란 공은 무조건 싫어하고 누군가 이기고 져야하는 게임은 더욱 싫어하며, 애국주의자들을 자본주의 신봉자들만큼 멀리하는 나로서는 (월드컵은 내 알바 아니지만) 문득 딴 생각이 들었으니 그것은 그날 마침 읽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었다.
소설(을 읽지 않은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의 요지는, 인류는 삼미 슈퍼스타즈식 야구처럼 살아야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미 슈퍼스타즈식 야구가 뭐냐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쟁과 속도로 점철된 21세기 신자유주의 공화국에 사는 사람으로써 이해하기 힘든 위대한 논리 ‘대충대충 살자’가 소설가의 주장인데 나는 이 사람의 주장에 80%쯤 동의해 버리고 말았다. 기를 쓰고 이겨야 생존하는 프로의 세계에 능력도 안 되고 장애도 있고, 남성도 아닌 사람들이 자신들의 속도대로 사는 것이 정당하고, 그래야 모든 이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데 이것이 진정 인권이 지향하는 가치 아니겠는가.
결국 팬클럽 여러분들은 ‘2루타 성 타구를 잡으러 가던 외야수인지 내야수가 공을 찾다가 발견한 노란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공을 찾지도 던지지도 않는’ 게임을 하고야 만다. 물론 조그맣더라도 동그란 공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룰을 알고 싶지 않은 야구경기(는 내 알바 아니)지만 승부를 초월한 삼미 슈퍼스타즈 팬클럽은 결국 상대편으로 하여금 “아이구 우리가 졌습니다”를 끌어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지면 어때?”라는 그들의 반문이다. 져도 되고, 느려도 되고,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필승의 대한민국, 적을 보면 승리하라!
한국의 월드컵 대표팀은 왜 그렇게 열심히 뛰는 것일까.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왜 그렇게 축구에 열광하는 것일까. 잠깐 딴 이야기를 하자면, 어제 수원공군비행장 일명 제10전투비행단을 가게 되었다. 환경탐사란 수작으로 들어갔지만 공군기지의 주요 지형지물을 탐구하려는 목적으로 침투했다. (애석하게도 소득이 없었다. 스파이질을 하려면 머리가 좋아야 한다)
거기서 ‘견적필승’이라는 이해 못할 표어를 보았다. 견적필승, 견적필승... 오호라 적을 보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뜻이구나 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그런데 해석의 순간 아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멸공통일 초전박살의 포스터 그리기 대회에서 수상했던 과거까지 거슬러가지 않더라도 지금 2006년 한국은 온통 견적필승의 구호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오 필승 코리아, 파이팅 코리아, 토고전의 승전을 기원합니다, (맙소사) 박살내자 프랑스’
스포츠 애국주의는 군사주의를 장렬히 부활시켰다. 적을 보았으니, 기필코 승리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 정신에서 파생되는 ‘주의’ 말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스포츠정신은 간 곳이 없다. 누가 그렇게 순진하고 천연덕스럽게 축구를 보고 있는가. 손에 땀을 쥐고 우리 편이 우승하기만을 학수고대하면서, 11명의 전사가 적군을 물리치고 승전의 나팔을 불러주기만을 날밤 새워 기원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경기라는 것은 속성상, 이길 것을 욕망하게 되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3천만 명은 족히 될법한 인원의 사람들이 겨우 축구공 하나를 두고, 전쟁을 불사하는 필승의 신념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전 사회적인 병리현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이 현상을 두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지. “한국 사람들 요즘 희망이 없는가 봐” 고단하고 누추한 현실을 반전해줄 인생의 승부는 이미 고정불변하고 아무리 기를 써도 퍽퍽하기만 한데, 화끈한 축구경기가 이를 대리만족해준다니...좋을 수밖에.
“지면 어때?”라고 말하다가는 몰매를 피할 수 없을 테니 그냥 당신들 취미생활을 알아서 즐기라고 하고 싶은데, 문제는 왜 흥미 없는 사람까지 무국적의 사람(내가 그걸 원하긴 하지)으로 만들면서까지 축구를 즐기라고 부추기는 거냐는 말이지. “아니 이 사람 토고 전에서 이긴 줄도 모르다니, 한국사람 아니야?”
일등만이 사람이쟎아
핸드폰 장사, 텔레비전 장사, 은행까지 나서서 꼭지점 댄스를 추고, 3개의 공중파 방송국이 쌍 나발을 불면서 월드컵 특수를 누리는 것이 문제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으니, 기왕의 무국적자 그렇다면 고래 적부터 문제 많았던 학교를 씹고 넘어가 볼까. 사람들이 전체를 벗어난 개인을 인정하지 않고, 축구에 목숨 걸고 국운 융성을 부르짖는 ‘이상 현상’에 걸려 있는 이유는 1등만을 존엄한 존재로 인정해 준 학교 경험 때문이다.
1등이면 선생들이 흔히 때려주시는 귀싸대기 한번 맞지 않을 것이고, 딴 애들이 잘못한 것까지 뒤집어써서 징계당하는 꼴지의 처지를 벌레 보듯이 볼 수 있으니, 무릇 1등이 아닌 중생들은 부당함을 따지는 정파의 길을 걷지 않고, 무조건 1등만 되고 보자는 사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어쨌든 이러한 학교를 국민 대다수가 거쳐야하는 불행한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1등이 주인이 아닌 세상을 꿈조차 꿀 수 없다. 그러니 무조건 이기고 싶다. 이기고 싶다를 연호하는 것은 대한민국 교육을 제대로 수료한 사람들의 미덕이다.
여기에 신자유주의 경쟁사회는 직장, 병원, 명품 백화점에서 사람들을 부추겨 주신다. ‘1등의 세계로 오셔요. 아름답고 화려하고 편리한 상품들을 소비하고 인생 폼 나게 살아보시라’ 이러니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이 될 수 있는 강고한 신념의 소유자들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1등의 세계에 줄 서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축구에서도 기를 쓰고 이기고 싶다. 모두 한 덩어리로 한국이 되어, 한국의 필승을 기원한다. 안방에서 거대한 초슬림 디지털 평면 TV로 응원하는 이건희와 역 대합실에서 노숙인 동지들과 TV를 시청하는 사람들까지 이순간은, 필승의 애국자가 되어 평등하다.
그러나 평등하지 않다
하지만 독일 월드컵 경기장에서 당신 안방에서 태우는 불굴의 의지는 FIFA라는 축구마피아의 주머니를, 핸드폰 장사들의 창고를, 하루 87%의 월드컵 방송으로 광고비를 끌어 모으는 언론자본들의 호주머니만 빵빵하게 불려주고 있다. 나이키, 아디다스, 필라 등 다국적 스포츠메이커들의 주가를 높여주고 있다. (지금은 이름이 뭔지 모르겠지만) 2002년 월드컵 당시, 공식 축구공 피버노바를 손으로 꼬매다가 시력을 잃은 소니아가 한국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15살이었던 소니아는 고된 노동에 어린 시절을 저당 잡힌 2억 5천만 명의 어린이들을 대표해, 월드컵 개최국인 일본과 한국을 방문했다. 7살 때 소니아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축구공 바느질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청중들 앞에 선 소니아는 불구가 되어버린 손을 내밀고 “제 친구들이 제 동생들이 더 이상 축구공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학교에 가고 놀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당시 피버노바의 가격은 15만원. 그러나 인건비는 150원이었다. 어린 소녀, 소년들이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지문이 지워져가며 12시간 일한 대가는 하루 몇 천원에 불과했다. 다국적 스포츠 메이커들이 수백억 원씩 쏟아 붓는 광고비와 후원비 사이에서 소니아는 인간이 아니었다.
국제 민간구호단체 옥스팜의 최근 보고서에 의하면 나이키의 경우 전체 제품의 38%가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국가에 세워진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최근 몇 년 동안은 현지 업체가 노동조합과 협상 움직임을 보이면 즉시 관계를 끊었다고 한다. 아디다스는 영국의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신고 있는 축구화를 만드는 인도네시아 현지 공장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합법적인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을 전원 해고했다.
아디다스는 프랑스의 지단에게 100만파운드(약 18억원)가량을 후원하고 있지만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시간당 30페니(약 500원)의 저임금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애국으로 똘똘 뭉쳐 응원(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나라도 다르지 않다고 하니)하고 있던 평등한 당신들의 오락 뒤에는 데이비드 베컴의 축구화와 150원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부양하는 소니아의 보이지 않는 눈이 함께 있다. 무엇이 평등한가?
그래서 어쩌라고?
(언제 한국경기가 끝나는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한국팀이 16강에 들어서던 아니던 별 상관이 없고 한국이 16강에 들어서서 세계만방에 국위선양이 되던 안 되던 상관없다. 왜냐면, 올해도 가난하고 내년에도 가난하고 아마도 수십 년 뒤에도 (대를 이어) 가난할 것이 확실한 내가 국위선양의 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는 대가로 얻어진 떡고물을 받아먹을 확률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삼성의 애니콜이 유럽아이들에게 명품대접을 받는다는 소리에 괜히 어깨 으쓱하지 마라. 삼성 핸드폰 잘 팔려봐야, 이건희는 부자 되지만 삼성 하청업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서 2백원 정도 더 받으면서 회사 다닌다. 그러니 이기고 싶다는 욕망과 애국과 경제발전, 나아가 개인의 영달까지 바라는 당신들의 착각을 수정하라. 축제에 찬물 끼얹는다고 미워해도 할 수 없다.
‘닭의 목을 쳐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말(지사적 의미가 아니라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주길)이 있듯이, 당신의 축구애국(다른 애국도 마찬가지다고 말하고 싶다)은 당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아무짝에도 소용도 연관도 없다. 그러니 애국 들먹이지 말고, 이기기만을 염원하지 말고 그냥 축구만을 즐기기를 정중히 권유한다.
한국이 (어느 팀하고 경기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져서, 월드컵을 볼 재미가 없는 분이 생긴다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어보시라.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명한 조언을 얻을 것이요. 결국 나는 무슨 글을 쓰려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삼미 슈퍼스타즈식으로 변명하자면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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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님은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