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설스럽다, 외설obscenity이 무대에 올릴 수 없는 것인 한, 무대에 올릴 수 없는 것이 하두 많은 나라라는 뜻에서 대한민국은 외설공화국이다. 왜 이렇게 무대에 올릴 수 없고, 무대에 올라서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들이 많을까? X파일이 많은 외설국가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어난 성균관대 김명호 교수 사건도 외설스럽긴 마찬가지다. 판사들은 고발인 김명호 교수 앞의 높은 단상에 앉아 교육자로서의 자질 운운하며, 한두 살 애도 아닌 김명호 교수에게 가정교육을 시키기만 했을 뿐, 무대에 올라서서 진실 게임을 연출하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김명호 교수 사건 주심판사는 인터넷무대에 올라서긴 했지만, 그 무대 위에서조차 인간의 얼굴 뒤로 법관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그들 특유의 끼리끼리 의식을 유감없이 발휘하다가 누리꾼들의 비판 여론에 밀려 무대 뒤로 외설스럽게 사라졌다. 법관의 가면, 이 얼마나 외설스러운가? 카우치가 더 외설스러운가, 법/관이 더 외설스러운가 라고 물어본다면, 필자는 법/관이 더 외설스럽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법은 국가와 자본의 충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명호 교수 사건은 X폴더 안에 들어 있고 그 폴더에는 여러 가지 파일들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 폴더는 컴퓨터의 오작동이 아니라 외설스러운 커넥션들 - 끼리끼리주의, 담합주의, 학연/지연/혈연, 조폭의식, 동종교배의식 등 - 때문에 열 수 없다. 김명호 교수 또한 이 열리지 않는 폴더의 희생물이라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김명호 교수가 재임용에 거부된 것은 김 교수가 수학 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것에 있다. 지난 날 교실 밖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두고 “저런 것들도 학생이냐, 죽이고 싶다”는 식으로 말한 것, 이러한 것들 때문에 성대 학생들이 김 교수에 대해 품은 불만, 법원이 이것을 걸고 넘어져 김 교수의 교수자질을 문제삼은 것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수학 문제의 오류를 대학 당국에 지적했다는 것, 그것도 다른 재단이 아니라 삼성이 재단인 학교에 문제를 제기하고 무대에 올릴 수 없는 것을 무대에 올려 만인이 다 알게 하고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데 있다. 김 교수의 교수로서의 자질 부족 문제는 바로 이 문제가 치환된 것에 불과하다. 외설은 감추어야 제 맛이 나는데, 그 외설성을 만 천하에 공개하고 공론화 했으니 김 교수가 괘씸죄에서 무사할 리 만무하다.
신성불가침의 영역, 금기의 극한
우리 시대에 대학과 법원은 신성한 영역에 거주하고 있다. 아니 차라리 금기영역이라고 해야 올바를 것이다. 신성의 측면에서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자기들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성한 대학에서’, ‘신성한 법정에서’ 등등 우리는 얼마나 신성이란 단어를 뇌까리며 살고 있는가?
금기의 극한을 건드리는 일은 절대 불가한 일이다. 금기의 극한에 있는 대학 당국/재단, 법원은 아담이 함부로 따먹을 열매가 아니다. 그런데 하물며 아담도 아닌, 일 개 대학교수인 사람이 그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려 하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대학과 법원은 끈끈하고, 예의 그 ‘신성한’ 커넥션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일반인들은, 그리고 인터넷 위의 평범한 누릿꾼들은 그 금기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다. 분위기 싸한 그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여 놓아 본 적이 없다. 해서, 우리는 김 교수가 석궁으로 해당 판사를 의도적으로 쏘았는지 어쨋는지 알 길이 없다. 현장에 없었다는 알리바이가 우리 평범한 일반인만큼 잘 통하는 곳이 있을까? 우리들은, 그 알리바이를 충족시킬만한 위치에 있듯이, 그 신성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구축한 커넥션에서 늘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언론들은 살인미수죄로 김 교수가 유치장에 갔다는 말을 하다니, 알리바이 100% 충족의 우리들에게 무슨 판단을 기대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주심판사의 자기변명 편지에 누릿꾼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은 특권층들의 현장에 있어본 적이 없고, 그 신성한 현장에서 배제된 일반인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이윤만 추구하는 자본주의적인 현장에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현장의 알리바이를 충족시키는 우리들에게 살인미수라는 말에 동의하라고 강요하는 것인가.
이정렬 주심판사는 스스로를 진보적이고 법조계에서도 튀는 판사라고 했다. 이에 비한다면 지난 날 민주화운동 시기에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욕설을 퍼부은 김명호 교수는 반민주적이고 튀기는커녕 반진보적인 사람일 것이다. 언뜻 보면 이정렬 주심 판사나 김명호 교수는 대칭적인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 교수에 비해 그렇게 튀고 진보적인 주심판사에게 누리꾼들은 왜 동정표를 던지지 않는 것일까?
사실 보면 이정렬 주심판사와 김명호 교수는 비대칭관계에 있다. 대학과 공유하는 신성한 커넥션을 유지하기 위해 김 교수의 교육자적 자질만 문제삼고 그것을 비호하는 주심판사가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했으니, 그러한 진보는 이제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러한 진보 자체가 허구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 것 아닐까?
삼각, 사각, 오각동맹식 담합주의 외설의 순환
민주화로 민주주의를 덮어씌우기 하는 주심판사의 행동에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과거의 진보를 무기로 현재의 그 비민주주의적인 판결을 덮으려 하고 정당화하려는 외설스러운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대학 - 법원 사이의 신성한 커넥션이라는 예의 그 ‘담합주의’에 대해 우리 일반인들! 은 치를 떨 뿐이다.
김 교수의 지난 날 학생들에 대한 비판은 학생운동에 영향을 끼치지 않은 개인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 진보적인 주심판사는 자신의 판결에 의해 자기들의 특권적인 커넥션을 더욱 튼튼하게 유지할 뿐더러 그것을 통해 사회의 민주주의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법부가 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하지 못하는 마당이라면 응당 김 교수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 주심판사의 진보는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벌어진 일들이 아니다. 1년 전 우리는 황 우석 사기사건에서 드러난 정부-국회의원-자칭 과학자-언론-서울대 사이의 담합주의, FTA를 둘러싼 정부-재벌-언론-연구소-미국 등의 삼각, 사각, 오각동맹식 담합주의 등 숱한 외설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안에서 순환하고 있다. 그들의 담합주의에 절망하고 죽어나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땅의 민중이고 김명호 교수이며 상당 부분 교육자적 자질 핑계로 해직된 수많은 교수들이다.
새로운 중세시대를 결연하게 떠받치고 있는 이 거대한 외설의 서사구조, 외설의 순환고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절딴 낼 수 있는 것일까?
- 덧붙이는 말
-
이득재 님은 대구카톨릭대 교수로, 본 지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