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긴 투쟁은 1995년 5월 거평그룹이 필립스가 운영하던 시그네틱스를 인수하면서 시작된다. 필립스가 롯데·풍산·아남·대우·두원 등 국내기업과 인수 협의를 한 결과, 거평그룹이 한국시그네틱스의 인수자로 결정된다. 이때 거평그룹이 아닌 다른 기업이 인수했다면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다른 삶을 살았을까?
거평그룹(전 회장 나승렬)은 1979년 ‘금성주택’이라는 부동산 기획개발 회사로 시작한 지 18년 만에 인수합병을 통해 재계 28위에 올랐다. 거평이 시그네틱스를 인수하던 1년여 기간 동안 대한중석·라이프유통·포스코캠 등을 인수하는데 사용한 자금만 2,500억 원에 달한다. “골동품을 사려면 인사동으로 가고 기업을 팔려면 거평으로 가라”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경향신문> 1995.10.19.)
많은 돈을 모았어도 ‘부동산 재벌’이라는 꼬리표가 서러웠을까. 다른 기업들이 국내 제조업에서 챙길 만큼 챙기고 부동산으로 눈을 돌릴 때, ‘인수합병의 귀재’라 불리던 거평그룹 나승렬 회장은 '이제는 제조업이 중심‘이라며 제조업 회사를 사들였다. 거평은 시그네틱스를 인수하고 나서 염창동 공장의 오래된 기계를 교체하고, 경기도 파주 만 여 평 부지를 매입해 3천 억 투자 계획을 세워 제2공장 착공에 들어간다.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38억 원을 투자해 기술연구소도 설립했다. 그런가하면 4억 원의 비용을 들여 염창동 공장 인근 개인주택을 매입한 뒤 재건축해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어린이집을 재개원 하기도 했다. 거평이 천 명의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그대로 승계하면서 인수 당시 고용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파주공장 준공 이후 회사가 관리자들에게 따로 수당을 주며 관리한 게 드러나 직장폐쇄와 해고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그때 거평그룹이 문어발식 확장을 하면서 계열사들을 엄청 사들였는데, 라보라(태평양패션→거평패션) 라는 속옷 브랜드가 있었어요. 식당에 와서 재고품 판매를 해서 우리가 사기도 했는데, 그때 산 게 아직도 남아있어요. 품질은 참 좋았는데, 거평이 망했잖아요. 그런 과정에서 우리만 희생이 된 거죠. 자기들 챙길 거 다 챙겨서 빠졌겠지만, 우리는 너무 혼란스러웠죠.” (남옥연, 1차 해고자)
▲ 7월 14일 동화면세점 앞에서 피켓팅을 하고 있는 시그네틱스 1차 해고노동자 남옥연 씨 [출처: 연정] |
7월 14일 저녁, 동화면세점 앞 선전전에서 만난 남옥연 씨가 당시를 회상한다. 옥연 씨는 거평이 인수하기 직전인 1994년에 입사해 반도체 리드핀 형태를 만드는 트리폼 공정에서 근무했다. 나승렬 회장이 이쯤에서 확장에 대한 욕망을 잠시 접었다면 지금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파주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까? 영풍이 인수하는 일만 없었다면 비정규직화나 노조탄압의 화살을 완전히 비껴가지는 못했다 해도 네 번의 해고는 피할 수 있었을까?
그것 때문에 인생이 꼬일 거라고는...
거평은 1995년 시그네틱스 인수 후에도 기업 인수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적자기업 태평양패션 등의 부채까지 떠안으며 인수합병을 계속했고, 급기야 부채가 1조 6500억 원에 달하게 되면서 자본잠식 상태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IMF 외환위기‘라는 1998년 초에도 한남투자증권을 인수했다. 결국 1998년 5월 거평패션 등 3개 계열사가 만기도래한 어음 13억 원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난다. 시그네틱스도 위험에 처했지만,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 업체에 선정되면서 회생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경영권을 박탈당한 나승렬 전 거평 회장은 경영권 반환소송을 제기했으나 안타깝게도 패소하고, 시그네틱스의 소유권을 되찾으려는 노력도 실패한다.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상여금 반납, 호봉승급 보류, 퇴직금 누진제 폐지 등 임금삭감으로 고통분담을 하며 위기 극복에 함께 했다. 그 결과 시그네틱스는 2년도 되지 않아 워크아웃 조기졸업에 성공한다. 그런 시그네틱스를 2000년에 인수한 게 영풍그룹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풍은 1994년 대한중석 인수전에서 15억 원 차이로 거평에게 밀린 적이 있다. 거평그룹이 해체된 이후 배임·횡령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나승렬 전 회장은 해고된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투쟁하는 동안 초호화 해외 도피생활 등을 하며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올해 네 번째 해고를 당한 김양순 씨는 파주공장 첫 삽을 뜨는 착공식을 했던 1996년 초를 잊을 수가 없다. 염창동 공장 노동자 백여 명이 참석했던 그 자리에 양순 씨도 참석했다.
“끝나고 메기 매운탕을 먹었어. 그 매기매운탕 맛이 아직도 짜릿해. 매콤하고 시원하고 수제비도 쫀득쫀득 하고. 술도 한 잔 씩 했을 거야. 그때는 뭐 잔치 분위기였죠. 우린 당연히 파주공장으로 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비협조적이지 않았어요. 공장도 크게 짓고 공기도 좋고 통일되면 북한도 가깝고 괜찮겠다 생각했어요. 새 땅에 새 건물 짓는 게 너무 기뻤지. 그것 때문에 인생이 이렇게 꼬일 거라곤 생각을 아예 못했어요. 통근버스 이사비용 다 해주다고 했으니까. 회사는 뒤로 딴 생각 하고 있는데, 우리가 순진해서 몰랐을까? 무노조에 비정규직으로만 경영을 해야 하는 재벌(영풍)이 인수하다 보니 우리가 계속 해고를 맞지 않았나. 그때 산업은행이 잘 골라서 인수자를 정했으면 좋은데, 다 알고 지내는 사람끼리 손을 써서 했겠지.”
양순 씨는 거평이 파주에 공장을 지을 때 파주에 건물을 하나 샀으면 지금 편하게 살 거라고 했다. 건물주가 될 기회를 앞에 갖다 줘도 모르니 사람이 다 자기 그릇대로 사는가보다 하며 웃는다.
▲ 7월 28일, 저녁 선전전을 하기 전에 시그네틱스 노동자들. 왼쪽부터 정혜경, 김양순, 윤선애 씨 [출처: 연정] |
당연히 파주 공장으로 가는 거다
“각 부서에서 한 명 씩 파주공장에 가서 트레이닝도 하고 그랬어요. 염창동 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파주공장을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염창동 공장이 없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염창동 공장이 없어지면 당연히 파주 공장으로 가는 거다. 회사도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통근버스를 마련해 준다고 하니까 저도 계속 다닐 생각이었고요. 먼데 사는 언니들 말고는 대부분 따라 가려고 했거든요.” (윤선애)
1994년에 입사해서 테스트와 패킹 업무 등을 했던 4차 해고자 윤선애 씨는 파주가 아닌 다른 곳에 공장을 지어 이전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했다. 파주공장 가동이 임박하면서 염창동 공장의 노동자들이 기계와 함께 파주공장에 가서 시험작업을 하고 오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회사는 파주공장이 완공되자 STI(구 EST)라는 자회사를 만들어 비정규직을 고용했다. 부도 이후에는 회사가 2001년까지 염창동 공장을 매각한다는 내용의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약정서를 한국산업은행과 체결하면서 노동자들은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999년에 시그네틱스 노사는 STI 와 염창동 공장의 통합, 공장이전 시 6개월 전 노동조합에 통보·합의하고 이주비 지급·기숙사 마련·통근버스 운행 등 공장이전과 고용유지에 관한 단체협약을 체결한다. 하청 등 고용형태 변경 시 노사합의를 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파주공장’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짓고 있는 공장이 파주공장 한 개였기 때문에 이전하게 될 공장은 당연히 파주공장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은 회사를 살리고 파주공장으로 가기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했다.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이 ‘가자! 파주로!’라는 구호를 외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와 배경이 있다.